시대에 뿌려진 선명한 청춘, 영화 <암살>
미라보 작전이 순조롭게 풀렸다면 석진은 명우(허지원 분)의 바이올린 연주를 더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머리 감던 세광에게 물 바가지를 쏟아부으며 "안 죽어, 안 죽어." 장난치던 정겨운 시절 또한 좀 더 누렸을 수 있다. 위장된 평화로움은 곧 바닥나고, 김 구 선생이 석진의 배신을 간파하여 명우를 부르자 그는 자신의 권총을 선생에게 건네고 영문을 모른 채 묻는다. "총알은 없는데, (순간 멈추었다가 재빠르게) 장전할까요?"
명우와 세광처럼 앳된 젊은이였을 때 석진(이정재 분)은 종로 경찰서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암울한 시대의 수레바퀴는 세대를 거쳐 젊음을 무심히 밟고 지나간다. "명우야! 명우야!" 해명하려는 듯 석진이 다가서자 명우는 주춤거리고 그 틈을 냉정하게 파고든 석진의 칼날과 총탄에 명우와 세광은 꽃잎이 으깨지듯 스러진다. 김 구 선생의 제거 명령에 석진이 무너진 것처럼 명우도 석진을 다시 마주할 때까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갈고리처럼 박히는 캐릭터가 있는데 <암살>에서는 그것이 명우다. 완전하게 믿고 사랑했던 상대를 망설임 없이 처단하는 단호한 손짓에 그가 경쾌하게 바이올린을 든 모습이 겹쳐져 애통해지기 때문이다. 명우는 그날 이후 더는 연주하지 않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