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삿밥에 스며있던 저릿한 짠맛

유년시절 음복했던 예천식 제삿밥

by Gomsk

부모님은 결혼하고 아빠의 예천 본가에서 1년 동안 신혼을 보내셨다. 아빠에게는 당신의 가족이 모여있는 집이지만 엄마에게는 당신의 엄마와 떨어져 홀시어머니와 살아야 했던 서러운 곳이었을 것이다. 78년 12월 결혼한 엄마는 이듬해 12월 첫째인 나를 낳을 때까지 한동안 아빠와 주말부부로 지냈다. 엄마에게 예천 큰집은 어떤 곳이었을까? 이후 세 가족은 김천으로 단칸방 살림을 내서 분가하지만 예천 할머니 집은 잦은 제사 때마다 방문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큰집은 종갓집까지는 아니었지만 안채와 사랑채가 구분되어 지어진 양식 갖춘 기와집이었는데 뒤란 돌벽을 사이에 둔 이웃집은 짚으로 이은 지붕이었다! 요즘처럼 방 안에서 놀만한 장난감이나 볼 것도 없었기에 바쁜 어른들이 제사 준비하는 걸 건너다보며 뛰어다녔고 선산 입구 낮은 무덤가에서 놀다가 벼락 떨어지는 호통을 들었던 것 같다.


80년대 예천 큰 집에는 얼라들이 많았다. 어른들이 제사 모시느라 바쁠 때 어린 사촌들끼리 흙먼지 일어나는 마당에서 작대기 휘두르며 놀았다. 옛날식 부엌에 가마솥이 두 개, 사랑채 쪽 군불 때고 쇠죽 끓이던 가마솥 하나, 증조할머니가 계시던 아래채에도 외양간 쪽으로 작은 가마솥이 또 하나. 잔치나 제사 때는 그 흙바닥 한 켠에도 가마솥이 걸렸다. 그 솥에 쇠고기가 든 탕국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 국에 든 쇠고기는 너무 질겨서 어금니 사이에 끼면 악! 소리 나게 아팠다. 두껍게 깍둑 썰은 무와 두부에 배인 간은 맑고 검은 그 '조선간장' 이었을 것이다. 과일이나 버섯과 배합한 달큼한 간장이 아니라 정말 짜기만 한 집간장 말이다.


제사는 꼭 밤에 치러졌다. 나방이며 붕붕 입가를 스치는 날벌레가 잔뜩 불빛에 달려드는 자정에 동네 모여사는 친척 남자 어른들이 하얀 옷을 입고 갓을 쓴 채로 지방을 읽어 내려갔다. 시골이었기에 해 뜬 동안 실컷 뛰어다닌 아이들은 제사를 기다리면서 오래된 검은색 마루 끝에 앉아 크라운 산도가 들어있던 과자 상자에 있는 산도 모양을 가위로 오리면서 놀았다. 그런 놀이마저 지루하면 마당 끝 대문 앞에서 제사가 진행되는 전체 화면을 조망하듯 구경하기도 했다.

그 늦은 시간에도 제사가 끝나면 음복을 했다. 지금도 미각에 아로새겨진 그 짠맛은 어릴 때는 입에 당기는 맛이 아니었다. 촌스럽고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맛이었다. 선명한 그 짠맛은 친할머니 손과도 연결된다. 할머니 엄지와 검지는 지문이 미세한 고랑마다 까맣게 채워져 있었고 음복하는 밤에는 음식을 손으로 나누느라 고기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표정이 무뚝뚝하셨는지 그 얼굴은 그림자처럼 떠오르는데 나에게 쇠고기 산적 한 점을 건네던 손은 화질 좋은 동영상처럼 저장되어있다. 산적에서도 그 짠맛이 났다. 깊은 우물처럼 하늘을 비추는 간장의 검은 얼굴을 들여다본 기억도 따라 나온다. 어른들은 날 좋은 때를 골라서 장독 뚜껑을 열었을 텐데 어떻게 그런 기회도 있었나 보다.


음복하면서 어린아이에게 새겨진 미각은 딱 그와 같은 음식을 먹게 되면 그 시절 추억까지 소환한다. 음식에 깃든 장맛은 사람의 장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당시 기억을 장세포에 상세하게 묘사해 놓는 게 틀림없다. 제삿밥 먹던 그 한밤의 기억은 깨동동 국간장에 비벼먹던 무나물, 한두 번에 씹히지 않던 질긴 쇠고기가 든 탕국, 손으로 계속 집어먹었던 스텐 종지에 든 짠지로 새겨졌다. 지금와서 짚어보니 그 맛은 갈증 나게 하는 짠맛이 아니었다. 엄마는 나쁜 음식 먹으면 물 마시고 싶어지는 거라고 '물 쓰인다'고 얘기하셨다. 시골 집간장은 이맛살 뿌려지게 냄새도 그다지인데 물 쓰이는 짠맛이 아니었던 것이다.


투박해도 몸에 나쁜 음식은 적었던 고향 음식과 시골 할머니가 함께 하는 기억이 목가적이면 좋겠지만 예천 큰집에 계시던 친할머니는 손녀들에게 살가운 분이 아니셨다. 아마 엄마에게도 비슷했을 것이다. 딸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80년대 시골집은 이미 쇠락해가는 중이었고 좀 더 자라 사춘기가 다가온 십 대 시절, 다섯으로 늘어난 우리 가족은 대구로 이사했다. 시골집은 친척관계만큼 완전히 멀어졌다. 치매로 말년에 고생하신 할머니도 그때 돌아가셨고, 나는 대구라는 대도시에 이사 온 만큼 촌년 이미지를 벗고 싶었다.


스무 살이 되면서 서울로 혼자 '가족'을 떠나게 되었다. 아직 무궁화호로 서울을 오갈 때였다. 4시간 이상 걸렸던 기차를 타고 상경한 촌티 어린 아가씨는 서울에 있는 달동네에 살았다. 혼자 사는 동안 먹거리는 확연히 부실해졌고 서른이 가까워서는 속이 허깨비 같은 음식들로 채워지고 있었음을 알았다. 이럴 때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은 없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주인공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서 유년의 맛을 되돌려줄 앙증맞은 고향집이 내게 없었다. 물론 부모님이 여전히 동생들과 대구에 계셨지만 한 번 떠난 집에 학교 방학이나 명절에 돌아가 보면 마치 내가 손님처럼 며칠 머물다 가는 것 같았다.


10년 자취 끝에 결혼을 하니 다시 제삿밥을 먹는 기회가 돌아왔다. '시댁' 제삿날에 음복을 하게 된 것인데 시댁은 전라도식 음식을 했기 때문에 맛있는 그 음식들이 입에 착 붙지 않고 비교부터 하게 되었다. 제삿밥 음식은 이게 아닌데.. 비로소 유년에 켜켜이 저장된 친할머니의 장맛이 떠올랐다. 내게 호되게 망할 년이다, 쓸데없는 지지바라고 대하던 친할머니의 짠맛이었다. 제사상 올리는 데는 큰어머니와 엄마의 수고가 뒤따랐겠지만 어쨌든 나는 할머니의 장맛에 길들여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사랑한 어른은 내게 살뜰했던 외할머니뿐이었지만 음식만은 어쩐지 친할머니 장맛이 가장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내 아이에게 지어주는 국과 반찬에 설탕을 많이 넣는다. 현미밥 먹고 채식을 하니 꽤 건강을 챙기는 것 같지만 깊은 맛을 내는 선대에서 이어진 장 담그는 기술이 없기에 단맛으로 넘치게 채우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여러 해 목 넘긴 제삿밥마다 그 짜고 짠 할머니의 장맛이 스며있었다. 혀에 감기는 감미로운 맛이 아니라고 저릿한 짠맛을 괄시했던 나는 마흔을 넘겨 그리워한다. 완고한 할머니가 오래 묵은 간장으로 간한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예천 큰집 제삿밥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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