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칸방에 살아도 넓게 누렸던 공간
그해 가을에 우리 가족은 세 번째 집으로 이사했다. 나는 일곱 살이었고 노란 모자와 원복을 입고 유치원을 다닐 때였다. 유치원 졸업이 두어 달 남아서 같이 살던 막내 이모와 살던 집에 남았다. 고등학생이었던 이모와 둘이 남았다니, 지금도 아리송한 결정이다. 아마 멋모르고 이모랑 둘이 지낼 수 있다고 대답한 모양이다. 부모님과 3살 여동생이 이사 갈 집으로 먼저 떠나고 아침에 이모가 먼저 등교하면 나는 혼자 동네 슈퍼 앞에서 유치원 버스를 기다렸다. 지금도 구불구불한 슬레이트 지붕 끝에 맺힌 빗물과 두 뺨을 감싼 서늘한 공기를 기억한다. 이르게 느낀 외로움이다. 매일 혼자 유치원을 오가는 나를 보다 못한 슈퍼 아주머니는 엄마에게 전화를 넣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가족이 이사 간 집으로 한 달 늦게 합류했다. 커다란 연못이 있는 조용한 동네를 떠나서.
이사한 집은 사람이 몰려드는 소도시에 있었다. 철로 된 대문이 찰캉 소리 내며 잠기는 단정한 양옥이었다. 아담한 마당을 지나 하얀 돌계단을 다섯 걸음 총총 오르면 현관과 이어졌다. 현관 오른쪽으로 나란한 화분을 지나면 좁은 계단을 통해 옥상에 올라갈 수 있다. 네모 반듯했고 해 드는 자리에 고추나 무를 말리는 광주리가 있었다. 긴 빨랫줄은 팽팽하게 두 줄로 나란했다. 하나는 주인집, 하나는 우리 집 몫으로. 뒤꼍으로 돌아가면 단칸방과 연탄을 쓰는 부엌이 있고 시멘트 담벼락 너머에는 얼음 공장이 있었다.
옥상 계단이 있는 것처럼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도 있었다. 지하실도 주인집과 함께 광으로 썼다. 단칸 살림이어도 요긴하게 쓸 바깥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아주 작은 창문이 있는 다락이 있고 연탄불에 밥을 짓던 엄마가 부엌 쪽문으로 밥그릇을 방으로 건넸던 것 같다. 나는 네모난 해표 식용유통에 학교 앞에서 산 병아리를 넣어 키웠다. 바깥에 두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고양이가 물어갔다. 이른 아침 기름통이 넘어지는 소리에 잠을 깼고, 내복 바람으로 후다닥 나갔지만 이미 늦었다. 지하실에 보관한 쌀을 훔쳐가는 도둑도 있었다. 마침 우리 집을 방문하던 화장품 방판 아주머니 덕분에 시골에서 받은 식량은 무사했다. 도둑 아저씨는 어리숙하게 "미안합니다."하고 쌀자루를 놓고 도망갔다고 한다.
단칸방 안에도 방문이 두 개 있었는데, 주인집과 면한 방문들은 열리지 않게 봉해져 있었다. 닫힌 문을 책장 삼아 내 동화책을 진열했다. 하서출판사에서 나온 어린이 전집이었다. 나는 복숭아가 아름다운 처녀로 변하는 중국 이야기에 열광했고 <삼국유사>도 요술 부리는 도사가 나와서 좋아했다. 지금보다 볼거리가 없고 읽을 책도 귀해서 집에 있는 전집을 나는 반복해서 읽었다. 사탕 봉지에서 골라 먹는 것처럼, 흥미 있는 책을 먼저 읽고 나중에는 안 읽고 남겨뒀던 책도 마저 읽었다. 돌이켜보면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모르는 말이 나오면 제멋대로 해석하고 넘어갔다. 그래도 그렇게나마 <몽실언니>를 읽은 건 귀한 경험이었다. 가슴 에이는 느낌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당시 나와 나이가 비슷했던 몽실이가 모진 고생을 하는 이야기에 깊이 몰입했기 때문이다.
내가 동화책을 읽거나 숙제하는 동안 단칸방 방문은 대개 열려 있었다. 심심하면 옥상에 총총 올라가 트인 하늘을 보며 만세 부르는 자세로 훌라후프를 돌렸다. 아파트 복도에 해당하는 시멘트 담벼락 아래에서 이것저것 너저분한 재료를 주무르며 놀 수도 있었다. 마당에 외따로 있던 화장실 문살 틈으로 밖을 내다보다가 노란 줄무늬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 적도 있다. 새끼 두 마리를 거느리고 있던 고양이는 지하실에서 살다가 이사를 가려던 참. 살금살금 걷던 고양이는 1초 얼어붙는가 싶더니 잽싸게 새끼를 물고 사라졌다. 그러고보니 푸세식 화장실이 있던 마당 창고 위에 장독이 모여 있었다. 우리집 된장도. 항상 볕이 드는 자리였고 앙상한 철제 계단이 사다리처럼 붙어 있었다.
대문 밖은 양옥집이 엇갈리게 마주하고 있는 골목이었다. 그늘 진 골목에서 동네 아이들이 떠들썩하게 놀았고 골목 끝집까지 연탄 트럭이 들어올 만큼 널찍했다. 그리고 길바닥에 내키는 대로 뭔가 그려 놓아도 되었다. 오징어 게임이었을지도. 가장 가까운 슈퍼에서 100원이면 군것질 거리를 살 수 있었으니 해 질 녘까지 놀아도 골목 안은 안전했다. 단칸방에 살되 온 식구가 하루 종일 집안에 모여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답답하지 않았고 지금의 원룸과 다른 느낌이다. 단칸방은 일종의 공용 공간이 넓다.
막내가 태어나면서 식구가 다섯으로 늘었다. 그즈음 주인집에서 방을 하나 더 내어 주었다. 주인집과 이어지는 방문 중 하나를 열면 어린이 둘이 누울만한 깜찍한 방이 있었다. 벽이라고 여겼던 문이 쩍 소리를 내며 열리던 날, 나는 새로 생긴 문턱을 들락날락하며 감탄했다. 작은 방을 트고 나서 그 방이 주인집과 통하는 문을 다시 봉했다. 우리 집이 된 작은 방에 피아노가 놓였고, 나는 월간 만화 <보물섬>을 한쪽 벽에 꽉 차도록 모았다. 그래도 넓은 집 10개 사고 싶다고 울어서 아빠 마음을 아프게 했다. 마침 아빠는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 이듬해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사했으니까. 셋방을 빠져나올 때 신 났던 기억이 난다.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도 홀가분하게 버리고 떠났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집' 하면 그 셋방이 떠오른다. 온 가족이 연탄가스 마시고 생사를 오갔지만 그 집에서 쌓인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살가워진다. 깔아 둔 요 아래 따끈한 바닥과 방문을 열면 훅 들이치던 아침 찬 바람, 스텐 밥그릇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 김칫국. 동생이 벽지 위에 넓게 그린 그림과 다락에 걸어놓았던 탬버린, 방 한쪽에 세워 둔 빨간 밍키 책가방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