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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순이 Aug 23. 2024

신입인데 실장이 됐다

지원하면 다 붙을 줄 알았건만, 하늘이 노래졌다. 왜 떨어졌는지 의문이 들어서 가고 싶었던 회사에 다짜고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입사지원한 이지연이라고 하는데요. 떨어졌다는 소식을 받고 궁금해서 전화드렸습니다. 죄송하지만 이유를 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아, 이유요? 저희 회사가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을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네. 포트폴리오 보고 결정해 주신 거죠?"

"네. 그렇습니다."


속 시원하게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포트폴리오가 문제였다는 말에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듯했다. 며칠을 공들여서 작업한 포트폴리오였고, 수없이 수정을 한 결과물이었는데 단칼에 퇴짜를 당하다니. '그래, 내가 받아들여주마. 너희는 인재를 놓쳤다.' 마음속으로 욕하며 다른 회사를 찾아봤다.


조금 만만해 보이는 회사. 썩 좋지는 않지만 다녀볼 만한 회사에 지원서를 넣었다. 이번엔 5군데에 넣었다. 다음날부터 문자가 왔다. 또 퇴짜다. 아예 연락이 안 오는 곳도 있었다. 

'이럴 수가. 내 포트폴리오가 그렇게 문제가 있나.' 

친구들에게 포트폴리오를 보여줬는데 대단하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학원 선생님도 이 정도면 잘했다고 하셨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는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보이는가 보다. 좋은 회사 갈 거라고 그렇게 입방정을 떨었는데, 이젠 나의 오만함을 내려놓아야 했다. 날 뽑아주는 회사가 있다면 겸손하게 토 달지 말고 열심히 다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겸손하려고 하니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어디라도 붙어야 했다. 취업포털사이트를 또 뒤졌다.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우리 집 앞에 있는 10평 정도 규모의 작아 보이는 회사. 직원도 없을 것 같은 분위기의 허름한 간판. 1층에 위치한 유리창 너머로 안이 훤이 보이는 사무실. 기계가 빽빽이 들어찬 그 사무실에서 과연 내가 앉을자리는 있을까 의문이 드는 회사였다. 그곳에서 직원을 채용한다는 글을 봤다. 눈을 질끈 감고 지원하기를 클릭했다. '에라, 모르겠다'


다음날,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준광고기획입니다. 입사지원하셨죠?"

"아 네. 안녕하세요."

"집이 바로 앞이네요? 오늘 면접 가능한가요?"

"네. 가능합니다. 헤헤"


막상 면접을 보자는 전화를 받으니 설렜다. 사장님이신지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친절한 분위기의 목소리도 나긋나긋했다. 기분이 들떠서 옷을 입는데 이상한 소리가 났다.


"투두두둑. 헉! 치마가 찢어졌어."


면접 보러 갈 때 입으려고 백화점에 가서 큰돈을 주고 블라우스와 치마를 샀는데, 치마 옆 박음질이 뜯어진 것이다.

'뭔가 불길해. 안 좋은 징조 아닐까? 아냐, 액땜했다고 생각하자.'

면접용 정장도 없고, 입을 건 청바지뿐이었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면접을 보러 갔다. 다행히 옷과 크게 상관없는 면접이었고, 어여쁜 사장님이 혼자 사무실에 앉아계셨다. 짤막한 호구조사와 어떻게 디자인을 하게 됐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이었다.


"신입인 건 아는데, 우리 회사에 디자인 실장님이 필요해요. 저 대신으로도 모든 걸 총괄할 수 있는 분이요. 실장님과 직원이 있었는데 사정이 있어서 모두 퇴사를 했어요. 하루라도 빨리 출근했으면 하는데 가능하세요?"

"제가 실장을 맡아야 한다는 말씀이세요? 저 프로그램 툴만 다룰 줄 알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괜찮을까요?"

"그건 상관없어요. 옆에서 차근차근 배우면 금세 다 하게 될 거예요."


'사회생활하는 선배님들이 그토록 힘들다고 말하던 사수가 없는 회사인가' 아무리 동네회사라도 회사의 시스템이 있을 텐데, 과연 얼마나 빠르게 습득하서 실장노릇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다행히 말만 실장이지 밑에 직원도 없고, 사장님께서 다 알려주신다고 하셨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사장님도 좋아 보였다.


바로 다음날, 사뿐사뿐 출근길 발걸음이 가벼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가 회사원들처럼 보였고 회사를 향해 힘차게 걷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나도 이제 떳떳한 직장인이야. 어깨 쭉 펴고 미소 짓고, 당당히 걸으면 못할 게 없다고 했어! 나도 이제 남들처럼 제대로 돈벌면서 살아야지.' 

새로운 다짐을 하며 5분 거리의 회사에 도착했다. 사무실에 새롭게 보이는 작은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내 자리 인가 싶어 앉아서 사장님을 기다렸다. 시공팀이라고 하시며 몇분이 출근 인사를 해주셨다. 그로부터 1시간이 흘렀다.


'사장님이 왜 이렇게 안 나오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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