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곰순이 Aug 19. 2024

내가 한번 승부해 봐?

원하던 대학에 떨어지고 집 근처 전문대로 들어갔다. 그 당시 쇼핑몰이 한창 인기를 누리던 때라 전공학과는 전자상거래학과로 선택했다. 집 근처라는 장점 빼고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름 엉덩이를 떼지 않고 공부했던 나는, 대학이라는 곳에 와서 처음으로 결석이라는 것을 했다. 강의 시간에 매번 졸고 멍 때리며 시간을 보냈고, 시험 전날부터 아침까지 술을 마시며 교재 한 글자도 읽지 않고 시험을 본 적도 있다. 어느 날 전공과목 교수님께서 메일이 왔다.


"여태까지 보여준 태도로는 좋은 학점을 줄 수 없으니 잘 판단하도록." 


글을 보자마자 콧방귀를 뀌었다. '이깟 대학 잘 다녀서 뭐 해. 어차피 내 인생은 망했어.' 

그렇다. 나는 원하는 대학을 가는 게 인생의 최종 목표고 성공의 지표였다. 그걸 이뤄내지 못했으니 나머지 인생은 덤으로 주어진 거라 생각했다. 이제는 막 사는 게 목표였고, 자살 안 하는 게 다행이라며 나 자신을 막무가내로 대했다. 


2년 후 가까스로 졸업은 했는데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대책이 없었다. 호프집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 버스 정류장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국비지원 수업을 들으면 취업을 시켜준다는 내용이었다. 편집디자인 6개월 과정이라는 것이 눈에 띄었다.

'디자인? 좀 있어 보이는데? 예쁜 거 좋아하니까 한번 해볼까.'


집에 들어오자마자 인터넷으로 검색창에 편집디자인을 입력했다. 엄청난 양의 글이 검색이 되었는데, 포털 사이트에 편집디자이너들의 수다라는 카페가 있었다. 글을 하나씩 읽어보기 시작했다. 요즘 비전공 디자이너들이 국비지원으로 디자인을 대충 배워 취업하는 경우가 많다며, 골치 아프다는 식의 글이 유독 많았다. 나도 모르게 하루종일 카페에 있는 글들을 읽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디자인이 뭐 그렇게 대단하고 어려운 거라고 다들 이렇게 난리야? 내가 한번 비전공자로 승부해 봐?'


갑자기 전공자와의 경쟁심, 승부욕이 생겼다. 예쁜 거 잘 골라내는 것은 내 주특기고, 내가 또 하면 제대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도전해 봐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다음날, 바로 국비지원 학원에 상담을 신청을 했고 때마침 시작하는 수업이 있어서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강사진은 대부분 편집디자인 업계에 경력이 3~5년 정도 있으신 분들이었고, 자부심과 열정이 대단하셨다. 학원 수업은 자격증을 목표로 단계가 나뉘어 있었다.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라는 프로그램에 관련된 자격증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학창 시절 공부하던 습관이 드러나서 모의고사를 치르면 반에서 1등으로 성적이 나왔고, 자격증도 1급까지 모조리 휩쓸었다. 학원에서는 수업시간 외에 빈강의실에서 언제든 공부해도 좋다고 했다. 그곳에서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하루를 모두 쓰는 날이 많았다. 


어느덧 학원에서 취업을 알선해 주겠다고 나섰다. 지원하면 다 붙을 거라는 자만에 가득 찬 마음으로 입사지원서를 준비했고, 알선해 주는 회사 중에서도 디자인 실력이 좋아 보이는 곳들에만 지원서와 포트폴리오를 넣었다. 그런데 한 가지 내색하지 않고 있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디자인 프로그램 툴은 잘 다루겠는데, 디자인을 예쁘게 하는 방법은 서툴어... 괜찮을까.'


며칠 뒤 지원한 회사들은 나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모조리 퇴짜를 놓았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