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바로 건너편에는 신축 아파트 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편의상 A아파트라고 하자. 최근 매매된 가격을 보니 벌써 11억을 육박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A아파트 입구 곳곳에 철문을 만들어 이제 출입카드 없이는 단지 내를 지나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아마도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을 우려한 주민들의 결정이었겠지만, 바로 옆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이쪽 주민들이 6호선을 타러 가기 위해선 A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는 것이 빠르고, 그쪽 아파트 주민들도 1호선 지하철을 타려면 우리 아파트를 가로지르지 않고서는 빙 돌아가야 한다. 그들은 여전히 1호선을 타거나 마트를 이용하기 위해 우리 아파트를 자유자재로 출입하고 있으면서 일방적으로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 참 매정하고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몇 년 전, A 아파트가 처음 철거와 공사를 시작할 때, 주변 거주민들은 심한 먼지와 소음에 시달렸다. 여러 차례 항의와 설명회가 소집되었는데, 그때 건설사 담당자가 힘주어했던 말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우리 아파트는 일부러 주변 이웃들이 함께 지나다니시고 시설을 이용하실 수 있게끔 담을 만들지 않습니다. 문과 담이 없어 이웃 주민들과 공존하는 아파트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 공존하는 아파트가 되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
물론 그로부터 약 이년이 지난 시점에 공사 기간의 소음, 분진 피해에 대한 보상금을 집집마다 지급하긴 했지만, 설명회 때 들은 저 말에 나름의 가치를 느끼고 그날의 감동을 오래 간직했던 나는, 지금 굳게 닫힌 A 아파트의 철문을 바라볼 때면 자꾸 서글픈 마음이 든다. 누군가는 그런 말을 믿은 나를 너무 순진하다고 할 테지만 말이다.
여기서 더 큰 반전은, 정확히 4년 전, 이 아파트 1층에 내가 당첨되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포기했다는 사실이다. 포기한 이유는 분명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과 신혼 시절 1층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고단한 점이 많았다. 1층은 텃밭을 가꿀 수 있고, 아이가 맘껏 뛸 수 있고,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을 수 있는 등 여러 가지 장점이 있어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의 취향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두 번 다시 1층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역력했기에, 모두가 토끼 눈을 하고 진짜 포기하실 거냐고 묻는 순간, 망설이지 않고 뒤를 돌아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5억도 넘지 않던 분양가가 불과 3년 새에 2배 이상 올랐고, 이제 서울 여기저기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지금 사지 않으면 영원히 집을 살 수 없다는 공포가 조성되기 시작한 요즘, 나는 ‘그때 포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몇 억을 벌었을 텐데, 안 살더라도 그냥 갖고 있다 팔았으면 되는데’ 하는 생각이 떠올라 점점 후회가 밀려오고 속이 쓰렸다. 그러던 중, 『어디서 살 것인가』를 만났다.
유명한 건축가이자 교수인 저자가 쓴 이 책은 건축과 도로, 주변 생활공간 등에 대해 알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 주어 흥미롭게 읽힌다. 무엇보다 ‘크고 멋지고 돈이 되는 건축’에 비중을 두는 것이 아닌, 공간의 가치에 대해 깊고 따뜻한 철학을 잔잔히 꺼내 놓는 그의 목소리가 참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 그의 말대로 땅이 아닌 하늘에 공간 건축이 가능하게 되면서 층수가 높아지고 공간의 효율성이나 산업의 발전을 앞당길 수 있었지만, 폐쇄성과 단절이 강화되었고 우리가 실감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소통이 차단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인식하고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살 집을 모델하우스만 보고 결정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안타까운 현실도, 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반기를 들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이 당연한 거라고 받아들이는 현실도, 그리고 내가 살고 싶은 곳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일단 돈이 많이 오를 수 있는 노른자의 아파트를 찾아다니는 우리의 현주소를 그가 너무도 냉철하게 콕 집어 말해주어서 부끄럽고도 고마웠다.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이 좋은 책이다."
약 4개월간 독서모임에서 수많은 책을 읽으며 내가 깨달은 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가 아파트에서 살겠다는 마음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살고 싶은 공간에 대해 마음속으로 한 번쯤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하고, 내가 걸어 다니는 도로와 공원 등을 비롯한 모든 건축의 가치와 가능성, 그리고 부작용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해 준다는 측면에서 참 유익한 책이다. 특히 에세이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 책은 건축에 대한 새로운 지식도 많이 담고 있으니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 같다.
결정적으로, 『어디서 살 것인가』를 읽고 난 뒤 나는몇 년 전에 포기한 아파트 생각에 속 쓰리고 배 아파하던 고통과 번뇌에서 조금은 벗어나게 되었다. 살고 싶은 곳에서 살겠다는 나의 가치관을 따라 한 결정이니, 돈이 많이 올랐다고 해서 그 패기 넘치는 선택을 후회로 물들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건 나의 마음을 움직여 준 이 책에게 나는 참 고맙다. 집값으로 모두의 마음이 까칠해진 요즘, 2020년이 가기 전에 이 책을 만난다면 분명 당신에게도 소중한 깨달음이 있으리라 믿는다.
잘 만들어진 건축물은 상을 받은 어린아이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제대로 설계된 공간은 갈등을 줄이고 그 안의 사람들을 더 화목하게 하고, 건물 안의 사람과 건물 주변의 사람 사이도 화목하게 하고, 사람과 자연 사이도 더 화목하게 한다. 좋은 건축은 화목하게 하는 건축이다. 물론 건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갈등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는 화목하게 하는 건축이 더 많이 필요하다. (중략) 세상을 더 화목하게 하는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건축을 조금씩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디서 살 것인가』370쪽
"어디서 살 것인가?" 이 문제는 객관식이 아니다. 서술형 답을 써야 하는 문제다. 그리고 정해진 정답도 없다. 우리가 써 나가는 것이 곧 답이다. 아무도 채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이 공간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드는가?' 자문해 보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