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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e Lee Oct 02. 2015

메모하는 여자

건망증 요정의 특권: 메모를 누리다

보테로 전을 관람한 날.
짐이 많아 필기구를 들고 가지 않은 탓에, 오디오 가이드 속 설명과 감상을 머릿속에 위태롭게 넣어왔다.

초저녁 카페에 앉아 오늘 아침의 감상을 놓치지 않으려 부지런히 펜을 굴린다.
건망증이 유독 심한 나는 무엇을 쉽게 기억하고 또 쉽게 잊는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메모를 시작하게 된 이유다.

내가 가장 오래 서 있었던 그림이 뭐였더라.

과한 감탄사가 절로 나올만큼 나를 찌릿하게 했던 작품들과 그 해설을 더듬더듬 회상하며 천천히 하나씩 다이어리로 옮겨본다.

아쉬운 아침이었지만 다행스런 저녁 속에 와 있다.
메모의 소중함을 실감하는 오늘.

짧은 기억력 탓에 시작했던 메모 습관이지만, 생각보다 메모는 효자노릇 할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특히 나는 휴대폰이나 컴퓨터 말고 직접 종이에 적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아날로그 향수에 젖어있는 내 취향 때문이기도 하고, 손가락 전체를 움직이며 또각또각 글씨를 쓰고 나면 신기하게도 기억이 더 잘 되기 때문이다. 검고 둥글둥글한 펜글씨로 가득 찬 나의 다이어리를 보고 있자면, 뭔가 예술작품이라도 완성한 듯 배부르고 뿌듯한 느낌이 든다.

매일 아침 회사메일로 성공의 명언이 배달되는데 마침 며칠 전 이런 문구가 있었더랬다.
"결핍은 성장의 에너지다. 촉매다."
흔하디 흔한 명언이지만 꿰어보면 내게 얼추 맞는 것도 같다. 나의 결핍을 채워주는, 나의 전전두엽을 대신하는 이 귀찮은 습관.

저녁에나마 남겨둔 이 기억의 조각들 덕분에 난 오늘 그림들과의 만남을, 그 첫만남의 향기를 조금 더 오래 오래 깊이 깊이 간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집으로 가는 길, 저녁 바람은 많이 차갑지만 마음까지 차가워지지 않는 것은 이 덕분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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