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놀이

딸아, 잘 지내니?

by GOMU


"엄마, 여기 사인해주세요."

학교에서 돌아온 오복이가 들어오자마자 손은 안 씻고 알림장을 내민다. 사장님에게 결재받는 듯 매일 부모님 확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 쓰는 일기 숙제가 있는 날이기도 하다.

"오복이 오늘 일기 써야겠네?"

"네, 그런데 오늘 아빠 언제 오세요? 약속 있으세요?" 아빠 컴백 시간을 묻는 오복이다.

백날 깔리던 엄마의 BGM은 듣기 좋아도 로커보다 더 샤우팅을 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아빠의 눈빛과 JUST '해'라는 말 하나로 오복이의 데드라인은 학교가 아닌 아빠의 퇴근 시간으로 변경되었다.


아빠 퇴근 후, 엄마의 '얼른 이제 들어가서 일기 써야 하지 않을까' 소리에 큰 목소리로 ''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오복이 일기를 아직도 안 썼어? 일기는 좋았던 그날 바로 써야지." 다정한 목소리 내는 아빠다.

"저는 미리 쓰지 않아요. 일기 제출 전까지 더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하고 대꾸한다.

그 말을 들은 최애씨. 오른손을 내밀며 오복이와 하이파이브를 한다.

"신선했어."

맞다. 그는 아이가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할 때면 바로 좋았다는 피드백을 날리고 아이의 제안에 응해준다. 이럴 때면, 미래의 협상의 달인이 된 오복이의 모습을 상상해보고는 한다.

반대로, 말도 안 되는 이유나 예의, 자세가 본인 기준 조금이라도 불량이면 더 빠른 피드백으로 차가운 눈빛을 쏘아댄다. 예전에는 그 분위기가 너무나도 싫었다. 도대체 아빠인가 싶었다. 삼촌이나 옆집 아저씨도 저러지 않겠다 싶었다. 게다가 최애씨 본인조차도 남편으로서는 잘하는데 아빠는 적성에 안 맞는다는 객관적인 자기 평가를 한다. 듣고 있다가 어쩜 그리 잘 파악했냐며 남편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최애씨의 아빠 역할에 최저점을 주던 내가 오복이가 커 갈 수록 그의 행동이 맞았었다고 수긍하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 게다가, 샤우팅과 감정이 빠진 오직 차가운 눈빛이 부러워졌고 가끔은 자세히 관찰하며 습득하려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너무나도 감사한 건 아이들 둘이 같은 시간에 힘들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복이와 트러블이 있을 때면 오팔이는 테이블에 자리 잡고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온갖 아웃풋을 한아름 엄마에게 선물한다. 오팔이가 할 수 있는 '그만 진정해요' 약을 말이다.


스스로 기침약 만들어 먹는 오팔이


"엄마, 더하기를 할 줄 아니까 이제 약도 혼자 먹네요." 한 손에는 약, 다른 한 손에는 미리 뜯어 놓은 비타민을 쥐고 있는 오팔이의 얼굴에는 본인의 자랑스러움이 가득하다.

"그러니까, 엄마가 정말 놀랍네. 우리 딸 다 컸어, 약도 챙겨 먹고."

"맞아요, 더하기는 너무 쉽거든요." 라고 말하는 만 5세의 오복이는 올 초에 덧셈을 한 권 풀어 본 경험이 있다. 누가 보면 매일 공부하는 줄로 착각할 수 있는 꼬맹이의 허세이다.

"엄마, 그래서 이제 더하기 안 하잖아요." 하며 턱을 치켜드는 아이다. 정말이지, 귀여운 그녀의 이런 당당함에 뻔뻔함 한 스푼을 섞은 모습을 배우고만 싶다. 안아주면 마음이 다 풀리는 것 같다던 엄마의 말을 기억하고 두 팔을 벌린다. 그리고 나는 작은 가슴에 안긴다. 이런 그녀에게도 불량식품 같은 낮잠이 오면 이상행동이 보이기 시작한다. 싹싹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심술덩어리가 굴러왔나 싶을 때가 있다. 엄마가 어느 정도까지 화날 수 있나 체크하는 것은 필수 코스이다.

이럴 때면? 오복이가 나의 진정제가 된다. 옆에 딱 붙어 책 읽어 줄 테니 낮잠을 자라는 둥, 저녁은 제일 간단한 걸로 해줘도 된다며 인심 쓰듯 말하기도 한다. 어디서 보았는지 머리 지압에 열을 올리고, 손아귀에 힘도 없으면서 헉헉대며 안마를 해주기도 한다. 평소에는 내가 화내도 화내는 줄 모르고 이러다 끝나겠지 하는, 나를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은 아이. 먼저 다가와 아까 미안했어요라고 사과하며 안아주기를 기다리는 아이. 아이들의 진심 어린 행동과 말이 느껴질 때면 내 못난 모습에 부끄러울 때가 있다. 몇 살을 먹어야 진짜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아이가 어른인 듯 커 보일 때가 종종 있다.


잠자리 독서를 마치고 어두워진 침대 위, 왼쪽에 누운 오복이는 내 팔을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감싸 안고 말한다.

"엄마, 내일도 행복하게 해 줄게요."

오른쪽에 누운 오팔이가 엄마 놀이하듯 내 볼을 쓰다듬으며 다정히 말한다.

"딸아, 잘 지내니? 사랑한다. 오늘도 수고했어. 잘 자렴"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했을까. 이 한마디로 하루를 몽땅 위로만 받았을까.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근사한 말이기도 했다.


내 마음을 잔뜩 부풀리고 잠든,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따뜻한 말의 온도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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