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혼자만의 취미 생활을 찾다가 페인팅을 알게 되었다. 그저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이 좋았다. 숫자에 맞춰 정해진 색으로 채워가는 단순함이지만, 며칠이 지나면 멋진 작품으로 탄생해짐이 좋았다.
하다 보면 새벽에 잠이 들기 일쑤였고, 하나 둘 개수도 늘어났다. 에펠탑부터 명화들까지 질리게 해야 끝내는 나를 발견했던 기간이었다. 지금도 친정, 시댁, 아이들 방에도 나의 DIY 결과물은 걸려있다.
최애씨의 쓸데없는 거짓 자랑으로 부끄럽지만 시아빠는 아직도 내가 그렸다며 좋아하신다.
12년 전 처음 완성했던 페인팅
완벽한 그림이 나왔을 때, 신세계를 만난 듯 좋아했다. 그래서 휴대폰으로 멋지게 찍어보았고, 가족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그림마다 생생히 기억되는 날이 있다. - 회사의 지하 구내식당은 맛집이었다. 오죽하면 친구가 와도 거기서 먹었으니 말이다. 식후에는 코스로 아띠제에 가서 망고 빙수와 커피를 마셨다. 15% 할인이어서였던가, 아니면 몇 걸음의 가까움이 더 컸던 것일까 생각해 보니 따뜻할 때는 덕수궁 돌담길을 한 바퀴 돌았지만 덥다, 춥다 여러 핑계로 그때도 잘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다. - 구내식당 옆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그날은 팀 점심 회식 날이었다. 식후 망고 빙수를 먹기 위해 옹기종기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중, 그림을 완성했다며 옆에 대리에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는데 전무님이 힐끔 보신다. 휴대폰을 가져가 한참을 확대하고 이리저리 보시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부르신다.
"GOMU 씨, 이 작품 너무 멋있는데, 내가 살게요." 미쿡사람 같은 표정과 칭찬에는 꼭 사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아, 이거 그냥 색칠한 거예요. 정말 감사해요." 나의 얼굴은 안 봐도 달아올라있었을 것이다. 취미로 한 일에 이렇게 크게 칭찬하심이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 원래도 나를 좋게 봐주셔 감사한 일이 많았다.그분의 칭찬에 나의 대답은 '아, 아니에요.'이거나 억지웃음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 그리고 쉬웠기에 기쁘지만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결과물을 하나하나 잘한 점을 말씀하시는데 고마움과 동시에 '나는 나에 대해 어찌하여 매번 과소평가하는가'라는 물음표를 떠올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칭찬을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얼마면 될까? 십만 원에 줄 수 있어요? 아니면.." 진짜 지갑을 꺼내실 분이라는 것을 알기에 급히 대답해 본다.
"제가 선물을 드리면 드렸죠. 그런데 완벽하지 않아요. 부끄럽고 제 처음이라 이건 간직할게요."
계속 값을 부르시니 끊어내야 했다. 기분 나쁘셨을지도 모르지만 나도 진심이었다.
"다음에는 꼭 정성을 다해 멋진 선물드리겠습니다." 충성을 외치 듯 기분 좋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엄마, 올해는 왜 크리스마스트리 안 해요?"
오팔이가 묻는다. 트리를 하기에는 이미 아이들이 만든 트리가 군데군데 전시되어 있었다.
"아기 트리들을 다 모으자."
"유치원에 가져갈 거예요." 그렇다. 우리 오팔이는 유치원 수업 자료에 진심이었다. 수업 주제에 해당되는 책부터 사진, 만들기 등 다 가져갔다.
"얘들아, 올해는 밖에서 큰 트리들 많이 많이 보자."
트리를 꺼내자니 아이들 축구하고 농구하면 쓰러지고 세우고를 내 손으로 반복하고 옆에서 최애씨는 한 마디하고. 우리의 가까운 미래가 예상되었다. 그전에는 벽에 사진들로 트리 모양을 만들기도 했고, 아빠 몸을 트리 삼아 꾸몄던 적도 있다. 갑자기 페인팅이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어 깊이 잠든 11시 넘어 시작했다. 수많은 작은 숫자들을 보고 최애씨는 기한 내에 다 할 수 있냐며 다시 한번 얼마 남지 않음을 상기시켜 줬고, 눈치가 빠른 오복이를 피할 시간은 새벽녘뿐이었다. 트리에 전구를 붙일까 고민했지만 심플함을 좋아하는 최애씨를 위해 그냥 걸기로 했다.
"깔끔하다. 고생했어. 그런데 너는 테이프를 너무 좋아해." 잠시 고민한 것을 알아채고 말하는 최애씨. 테이프로 여기저기 6살 오팔이처럼 붙이는 어미는 차가운 남자의 한마디로 눈에 흰자의 범위가 넓어진다. 예쁘게 말하는 학원은 없나? 아니다. 일 대 일 과외가 필요할 것 같다.
아이들은 트리를 보고 아낌없이 칭찬을 했고 진짜 엄마가 했는지 확인했다. 본인들도 그리고 싶다며 종이를 들고 왔고, 몇 그루의 트리 그림은 금세 쌓였다. 최애씨는 어제 치운 전구를 찾았고, 무언가 생각해 놓은 다른 대안이 있는지 그림을 만지기 시작했다.
"삐지지 좀 마. 무슨 말을 못 해." 내 이마를 톡치며 말하는 최애씨. 그는 테두리에 전구를 두 바퀴 둘렀고, 오팔이는 시크릿쥬쥬 크라운 로드의 빛을 휘두르며 이브 저녁을 맞았다.
잠들기 전, 아이들의 선물을 포장하고 편지를 써 산타의 마음으로 세팅을 했다. 그림 아래에 놓인 산타에게 드릴 아이들의 편지를 읽고, 할아버지 대신 과자와 음료도 먹었다.
"올해도 잘 지나가는구나." 최애씨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2023 마지막 미션의 기쁨을 공유했다.
다음 날, 일찌감치 일어난 아이들이 달려와 차례로 배에 올라온다.
"엄마, 엄마도 산타가 선물 줬어요! 내가 갖고 싶다."오팔이의 귀여운 목소리에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