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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2)

한국인이 덴마크 호이스콜레를 만났을 때

by 이한나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덴마크 사람들이 유독 사랑하는 작가가 있다. 덴마크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작가. Halfdan Rassmussen. 이 놀라운 작가와의 만남을 소개하려 한다.

인상 좋은 Halfdans Rassmussen 아저씨


내가 덴마크에 체류하던 2015년은 마침 1915년 1월에 태어난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더군다나, 그는 내가 학생으로 있던 International People's College에 다녔던 학생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해 학교는 그를 기억하는 문화행사를 여러 차례 주관했다. 교사들은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와, 어린이, 자연을 지극히 사랑해 줄곧 그것들에 대한 글을 쓰곤 했던' 그의 세계를 소개하며 이 학교에서의 생활이 그에게 적잖은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짐작을 하곤 했다. 세계 각지에서 온 학생들에게 그를 소개하던 Gertrud 선생님의 입가에 은은히 떠오르던 흐뭇한 미소를 나는 기억한다.


그는 난센스와 말장난으로 가득한 유머러스한 문체로 유명하다. 그의 익살스러운 작품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여러 세대에 걸쳐 읽혀 왔을 만큼 덴마크인들은 그의 작품을 그야말로 사랑한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그가 여러 편의 어린이 책을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읽힌 책이 바로 'Halfdans ABC'인데, 독특하게도 이 책은 노래로도 만들어져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퍼졌다.


책의 표지 이미지. 그의 오랜 파트너 Ib Spang Olsen이 그린 그림이다.

책을 펼쳐보면 알파벳 A에 관한 작은 이야기, B에 관한 작은 이야기, C에 관한 작은 이야기... 가 순차적으로 이어지는데, 1950년대부터 줄곧 함께 일해온 Ib Spang Olsen의 정감 있는 일러스트가 이야기를 더욱 재미있게 부풀리며 동행한다. - 나는 이 작가의 왕 팬이기도 한데, 언젠가 제대로 소개하고 싶다 - 덴마크인 친구들은 아주 어릴 적 읽었던 이 책의 내용을 통째로 기억하고 있었다. 'A'에 관한 이야기에 어떤 사람이 등장했는지, 어떤 언어유희가 포함되어 있었는지, 어릴 적 자신이 어떤 이야기에 가장 매료되었고, 어떤 이야기를 가장 아끼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의 멜로디는 무엇이었는지 기어코 기억해냈다.

알파벳 'B'의 세상

책의 내용과 구성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B는 'B'enny(등장인물 중 왼편 아래쪽 엉덩이에 불붙은 사람의 이름)의 'B'ukser(Pants-바지라는 뜻)가 'B'rændte(Burned-불타고 있다는 뜻) 하고 있어서. 'B'ørge(또 다른 등장인물)가 소리쳤다는 내용이다. 내용을 궁금해하곤 했던 내게 덴마크인 친구들은 문장 하나에 깨알같이 박혀 있는 '언어유희'를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워 답답해하곤 했다. "아, 이거 진짜 어이없이 웃긴 건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가사가 어린이들이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멜로디와 함께 노래로 만들어졌다. 지금도 어느 페이지를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흥얼흥얼 멜로디가 흘러나온다는 못 말리는 사람들...

https://www.youtube.com/watch?v=eBAQDUWvaU0

영상을 누르면 노래를 들을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어린이 책 외에도 인간사회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애정으로 세상사를 풍자하여 작품에 꾸준히 담아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활동가로 활약하기도 했는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엔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고, 반핵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작업에 반영되었고, 그의 작품세계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으며 다른 장르의 작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좋은 작가는 '다시' 읽히고 '다시' 불려지기도 한다. 학교에서 그를 기억하기 위해 개최한 행사 중 하나가 아주 인상 깊었다. 바로, Halfdan Rassmussen의 작품을 노래로 지어 부르는 대회. 그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작곡된 창작곡을 경연하는 대회가 학교의 강당에서 열렸다.

강당을 빼곡히 매운 청중들. 앞쪽으로는 연주자들이 자리했다.

참가자 모두가 곡 하나하나를 매우 진지하게 경청하고 즐기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 행사를 돕는 스태프로 함께 했고, 청중들 뒤편에 앉아 함께 음악을 들었는데 진지하고 열띤 기운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총 10곡이 경연에 올랐다. 가사와 점수표가 청중에게 나누어졌다.
수상은 음악가이자, IPC의 교장선생님이신 쇠렌이 직접 :-)
전문가의 점수와 청중이 매긴 점수를 조합하여 최종 점수를 내었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작가의 작품을 단순히 기억하는 것뿐 아니라 새로운 노래로 만들어져 '새로운 숨결'로 사람들 사이에서 생생히 불릴 수 있도록 하는 시도였다. 꼭 전문가들로만 이루어진 작곡가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참가한 자리였기에 더욱 의미 있어 보였다. 행사의 말미에는 교장선생님이 '이 노래들을 각자의 커뮤니티에서 널리 부를 수 있도록 하자'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 행사뿐 아니라 젊은 아티스트들의 창작극도 열렸다. 내가 있었던 학기에는 다재다능한 재능으로 충만한 Marie라는 덴마크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이 모여 만든 작품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아주 젊은 아티스트들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여러 연극제에 참가한 대단한 친구들이었다.


나는 늘 그녀에게 반했다. 실제로 그녀의 즉흥연기와 설치작업을 엿볼 기회가 많았기에 그녀가 특별한 친구라는 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문학과 그림에 관심이 워낙 많아 Halfdan Rassmussen과 관련한 자료들을 내게 정말 많이 구해주었고, 코펜하겐에서 열린 그의 전시에도 함께 갔었더랬다.

공연 전 학교를 찾은 사람들로 붐비는 복도
드디어 시작. 공연 중 한 씬. 간단한 조명과 소품으로 다양한 연출을 했다.
학생들의 작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연출이 좋았다.
마지막은 다 같이 노래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모두가 아는 노래였는지, 자연스럽게 관객들도 동참했다.
기립하여 박수가 여러 차례 이어졌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마리 로젠버그 (Marie Rosenburg)

그녀와 친구들이 직접 만든 창작극을 보러 지역주민뿐 아니라 가족, 친지, 친구들이 모였고 연극이 끝날 때까지 그 누구도 자리를 뜨는 이 없이 끝까지 커튼콜까지 함께했다. 마지막은 모두가 다 아는 노래로 장식되었는데, 역시, 관객 모두가 함께 노래를 불렀다. 딱히 반주도 없었는데, (심지어 나는 노래 가사를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울림이 있었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나는 내 친구 Marie Rosenburg와 그녀의 친구들이 언젠가 한국의 연극제에 초청받아 오게 될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아마 그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는 예감도 든다.



나는 행사에 필요한 배너를 수제작 했다. 내가 좋아하는 'Halfdan ABC'에 나오는 요소들을 차용해 곳곳에 넣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잘 볼 수 있도록. 3일에 걸쳐 진행된 행사를 홍보하는 내용이다.

화면이 커서 복도에서 스케치를 했다.
바쁜 와중에도 묵묵히 열일해 주시던 멋진 분. Ove. 지금도 늘 감사한 마음이 가슴 한편에 있다
누가 찍어준 사진이더라.
썡뚱맞지만, 급, 내 그림 앞에서 단체사진 찍자고 해 만들어진 사진. 맨 왼쪽이 오베 아저씨다.
그리하여 완성이 된 배너
학교 앞 도로에 설치했다. 설치는 학교의 만능 맥가이버 아저씨, Ove가 적극 도와주셨다.

행사가 끝나고 역할을 다 한 배너는 학생들의 각종 아트웍을 전시 해 둔 지하 복도 한편에 설치되었다. 이번에도 Ove아저씨가 끝까지 고생을... 매 기수 학생들이 자신의 출신 국가와 이름 등등을 요새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복도에 핸드페인팅으로 남겨두는데, 2015년 Autumn term의 학생들은 내 그림 위 꽃에다 이름을 수놓았다.

다시 가서 본다면 눈물 날 거 같은... 친구들의 흔적.

일상 속에서 유독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덴마크인들의 모습을 소개하다 보니 Halfdan Rassmussen 이야기까지 흘러왔다. 다음 편엔 어떤 이야기를 풀어볼까나?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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