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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나몽 Aug 10. 2017

애월의 소나기

처녀 제주의 소나기가 써버린 벅찬 기억.


뜨거운 팔월 첫 주의 이 년 전 한국.

스물아홉.


충동적으로 결정한 여행.

극 성수기를 무시한 채 출발하기 바로 전날 게스트하우스를 알아보느라

한적하고 작은 조용한 숙소는 나를 위한 자리 따윈 없었고,

하는 수 없이 그나마 한적해 보이는 마을에 있는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잡아

하늘까지 붕 뜬 마음을 안고 제주에 도착했다.


같이 가기로 한 언니는 일이 바빠 주말에만 시간을 낼 수 있었고,

짧은 방학의 인턴 기간을 마치고 빈둥거리던 나는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고자 먼저 제주로 갔다.


[ 느지막이 일어나 차 한잔을 마시고, 조용한 바닷길을 걷다가

그늘이 있으면 잠깐 앉아 머리를 비워야지.

한여름의 덥고 부드러운 바닷바람을 잔잔히 느끼다가 배고프면 아무 곳이나 들어가

'아무거나 주세요' 해봐야지.

사진으로 본 게스트하우스의 테라스에 혼자 앉아서 책을 읽다가, 멍을 때리다가, 맥주를 마시고

낮잠을 자야지. ]

는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계획이었다.


출발 전 급히 예약된 나의 자리는

작은 거실 한구석에 얇은 커튼으로 가려진 침대였고,

규모에 비해 정말 많은 손님들이 묵었던 그 숙소는

나중에 듣고 보니 '만남과 친목도모'를 하기 위한 아주 유명한 숙소였다.


실수였다.

게스트하우스에는 처음 갔던 터라 미리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내 실수였다.

그곳은 정글이었고, 제주를 여행하러 온 것인지 만남을 목적으로 온 것인지 모를 만큼

정신없는 곳이었다.


되도록 혼자 있고 싶었던 나는 절대 혼자일 수 없었고,

내 성격상 누가 말을 걸면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나는 면허도 없고, 동네를 돌아다니기엔 생각보다 산책길도 애매해서 그냥 섞이기로 했다.

물론 좋은 사람들이었고, 재미도 있었다.

다양한 연령의 다양한 인생 이야기.


하지만 그때의 나는 몇 년간의 외국생활과 여러 가지 일들로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도 간절했다.

하 이게 뭐지? 하며 내 여행의 목적과는 너무 멀어져 갔기에 점점 지쳐갈 때쯤

같이 여행하기로 한 언니가 도착했다.

구세주!


그시간 숙소에 있던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언니가 예약해둔 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우리는 바로 애월로 향했다.

이 여행이 나의 처녀 제주여행이라는 걸 듣고는 이런 부담이! 하며

 '어제 술 마셨지? 아주 맛있는 해물라면을 먹자.'

언니는 혼자 머릿속으로 열심히 루트를 짜고는 택시를 잡고 애월로 갔다.


애월 해변의 입구 옆에는 아주 유명한 라면가게가 있었고,

흥성한 가게의 줄은 점점 길어졌다.

우리도 그 대열에 합류하여 치열하게 라면을 먹고, 쫓기듯 가게를 나왔다.


뜨거운 태양 아래

가게 근처의 해변은 이른 시간부터 맛집을 가고, 수영을 하고, 유명한 커피집을 가기 위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고, 우리는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뚜벅이인 우리는 그들이 있는 곳을 등지고 천천히 해안을 따라 걸었다.


두어 개의 코너를 돌아 그만큼의 해변을 지나니

내 앞에 마치 무릉도원 같은 깨끗하고 아-무도 없는 작은 해변이 펼쳐졌다.

코너 하나를 지나온 것뿐인데.

그 해변부터 눈앞에 보이는 저 멀리까지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해변은 마치 나를 위한 프라이빗 비치처럼 특별해지는 느낌을 받게했고,

덕분에 찌는 태양 아래를 걸었지만 기분만은 시원해졌다.


얕고 조용하게 밀려오는 투명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바람과 바닷소리를 들었다.

'너무 신기해, 코너 하나 돈 것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아무도 없을 수 있지? 여기 너무 좋다'는 소리를

연신 내뱉으면서 해변가를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다 다시 해안가를 걷기 시작했다.


투둑

투둑 툭 투툭


그 해변을 벗어나 해안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한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쏴 - 아 -

--


하고 따갑도록 굵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당황한 우리는 그늘도 없는 그 길을 미친년처럼 웃으며 해안산책로를 따라 뛰었고,


거짓말처럼 우리 눈앞에는 아무도 없는 짙은 고동색 정자 하나가 바다에 발을 담근 채 턱 하니

세워져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정자로 뛰었다.

누가 물이라도 튼 듯 펑펑 쏟아지는 소나기가 어처구니가 없어

정자 한켠에 엉덩이를 반쯤 걸친채 나란히 앉아 잠깐 넋을 놓고 있다가

서로 마주 보며 깔깔대며 웃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엄청나게 찌는 더위에 그 소나기는 선물이었지만

뚜벅이인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한 채 그 정자 아래에서 멍하니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잠잠해지지 않았지만,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 앞의 바다가 비에 섞여 뿌연 필터를 입은 채 선명해졌다.

애매랄드 색 바다와,

비에 젖은 현무암들은 바다색을 더 청명하게 보여주려는 듯 더 진해져 있었고,

정자는 그 순간을 마치 액자처럼 여러 개의 기둥에 담아

숨막히게 아름다운 그림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있었다.


그때 그 순간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흐르고 있는지 모른 채 넋을 놓고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 같다....'


얼마나 지났을 까

정신 차려지지 않는 그 아름다움에 아무 말도 없었던 우리는 순간 마주 봤고

언니는 나에게


'네가 남자였으면 나는 지금 너에게 고백했을 거야. 이렇게 로맨틱한 순간에 우리는 왜 또 여자들끼리 있는 걸까.?'


라며 한숨과 함께 동시에 또 웃었다.


'낭만적이다.. 낭만이야..'


제주로 가기 한 달 전만 해도 나는 지중해가 있는 니스에 있었다.

외국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제주도에 대한 큰 기대가 없었다.

관광객이 많이 가는 좀 예쁘고 유명한 한국의 섬. 정도.


이탈리아 남부의 환상적인 풍경도, 니스가 있는 프랑스 꼬뜨 다쥐르 지방의 예쁜 도시들도

이 소나기가 한방에 싹 - 지운 채

내 눈에는 제주만 있었다.


지금도 제주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때를 이야기하면 똑같이 설레어온다.


나의 처녀 제주여행은 그 소나기가 써준 기억으로 앞 뒤가 삭제된 채 낭만적이기만 하다.

예쁘다 나의 애월의 바다.

그립다 그 제주의 소나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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