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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나몽 Aug 16. 2017

고양이처럼 살고 있다

개 아니고 고양이

09시


움찔움찔하면서 미세하게 꿈틀대다가

한 오분 더 잔다

한 두어 번 반복한다


11시 45분


발끝부터 손끝까지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처럼

있는 힘껏 몸을 펴고

간밤에 굳었던 몸을 스르르 풀어준다


힐끔 시계를 본다


왼쪽 팔을 침대 아래로 내려

손끝으로 몇 번 땅을 짚고

떨어진 물병을 턱 하니 잡아

습관처럼 생수를 마신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깜깜히 닫힌 빛 막이 창을 삐걱거리며 여니

오랜만에 내리는 장대비에 기분이 좋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려

창문을 연다


침대 밑 아이보리색 러그 위에 앉아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잠깐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긴다 멍하니 있는다 멍을 때린다.


비스듬히 기댄 몸은 스르르 러그로 떨어지고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발끝에 손을 뻗어

디귿자 몸으로 근육을 풀어본다


12시 45분


촤르르르 떨어지는 비를 조용히 보며 온 우주를 헤매다

이길 수 없는 공복감에 현실로 돌아온다

귀찮은 마음에 조금 더 그렇게 있어보고

슬쩍 일어나 본다


13시


터벅터벅 주방으로 걸어가 냉장고를 연 채

냉장고 옆 선반 위에 있는 원두를 골라

대충 행군 모카포트에 원두를 넣고 커피를 내린다


냉장고!

냉장고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중얼


사과 네 개

복숭아 다섯 개

반쯤 비어있는 토마토소스 한병

뜯지 않은 그릭 요구르트 세 개와 먹다가 넣어놓은 그릭 요구르트 한 개

달걀 다섯 개

방울토마토 한팩

바닥이 보이는 커다란 딸기잼 한병

그리고 바게트 가루가 묻어있는 버터 반 덩이


사과 하나, 버터, 딸기잼, 남은 요구르트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고

달걀 하나를 마저 꺼낸 뒤 대충 스크램블 한다



푸드르드르르

불위에 올려놓은 모카포트에서 소리가 나고


다시 일어나 어제 마시던 찻잔을

휙휙 하고 대충 헹구어

커피를 붓는다


드디어 앉았다

노트북을 켜고 다시보기 사이트를 연 뒤 아무 예능을 틀어본다

식탁 한편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살짝 굳은 바게트를 집어

버터와 딸기잼을 발라 생각 없이 입에 넣는다


목이매여 스크램블을 조금 먹고 커피를 마신다

이상한 조합이지만 좋아한다


15시


주섬주섬 빈 그릇을 들고

싱크대 안에 툭 넣는다

바짝 마른 찻잎들이 널려있는 배수구를 보고

설거지는 미뤄둔 채

선반으로 가 차를 고르다 친구에게 전화가 온다


'Coucou ~ Il ne pleut plus! on va se promener à la rivière ?'

(앗뇽~ 비가 그쳤어! 우리 강에서 산책할래?)


잠깐 고민하다가

귀찮은 마음에 집에 있겠다고 말하니

나는 맨날 그런다며

온갖 짜증섞인 핀잔을 듣는다 들어준다

전화를 끊는다


다시 아무 홍차를 집어 차를 내리고

찻주전자를 들고 주방을 나와

낮은 테이블 위에 놓고

소파에 털썩 앉는다


몸이 기울어진다

일인용 소파 위에 더블유를 그리며 몸이 축 들어진다

창문을 힐끔 보며 그친 비를 원망한다

'좋았는데...'


홀짝홀짝 커피와 차를 번갈아 마시면서

무료함을 즐긴다

고양이처럼 조용히 늘어져있는다


17시


흠칫하며 눈을 뜨고 약간 다른 자세로 긴 소파에 늘어진다

후 우 -

천장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뱉고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돌아가면 무엇을 해야 하나

어디서 살려나


꺼내고 싶지 않은 무거운 고민들이

머릿속인지 마음속인지 모를 깊은 구덩이에서

용솟음치듯

내 생각을 지배한다


나는 그렇게

모른척 하고싶은 현실적인 근심에 지배당한 채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신다


19시 반


뜨겁던 해가 다시 온 비구름에

가려져

서서히 식는다

프랑스의 여름은 저녁 21시 반에서 열시는 되어야 노을이 지려고 한다


바삭

비스킷을 하나 집어 깨문다

소파에 누워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잠깐 바라고

시간이 흘러감의 두려움을

모른 척해본다


21시 10분


꾸덕하게 굳은 로제 소스를 뒤집어쓴 먹다 남은 짧은 파스타 위에

자잘하게 갈려진 치즈를 뿌린 뒤 전자레인지에 넣는다



삐이-

삐이-


후우 후우 거리며 파스타를 꺼내어

뜨거운 그릇을

던지듯 식탁에 놓는다


의자 위에 쭈그리고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파스타를 뒤적거리다 적당히 식혀 먹기 시작한다


22시 50분


빨간 히비스커스차가 담긴 머그잔을 가지고

아침에 앉았던 아이보리색 러그 위에 털썩 앉아 책을 펼쳐본다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글을 써본다


책을 보다가 글을 쓰다가를 반복하다

하늘을 보고 일어나 빛 막이 창을 닫고 창문을 아주 살짝 열어 놓는다


러그 위에 구부정하게 널브러진 나를 인식하고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자세를 바꿔본다

그렇게 또 몇 분 조용한 밤의 시작을 즐겨본다 즐긴다


01시 20분


창문을 닫을 때 틀어놓았던

잔잔한 음악을 조금 더 듣고

음악을 끈다

티브이를 보며 침대 위에 올라가

비정상적인 스트레칭을 조금 과격하게 한다


03시 50분


마지막으로

시간

얼마 후

노트북의 배터리가 방전되어

꺼진다

그전에

나는 이미 꺼져있다

.

.

.


09시


움찔움찔하면서 미세하게 꿈틀대다가

한 오분 더 잔다

한 두어 번 반복한다


11시 45분


발끝부터 손끝까지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처럼

있는 힘껏 몸을 펴고

간밤에 굳었던 몸을 스르르 풀어준다


힐끔 시계를 봐준다


왼쪽 팔을 아래로 내려 손끝으로 몇 번 땅을 짚고

떨어진 물병을 턱 하니 잡아 습관처럼 생수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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