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9일의 기록
지금 글을 쓰는 이곳은 제주도에 있는 펜션입니다. 작년 11월에 결혼한 아내와 함께 조금씩 돈을 모아 3박 4일 여정으로 놀러 왔지요. 둘만 온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가진 가장 비싼 소모품인 자차와 네 마리의 반려견도 함께 지요. 목포의 삼학 부두에서 큰 배를 타고서야 같이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다수의 개를 키우는 여행객은 첫발을 때기가 참 어렵답니다.
교수님께서 기말고사로 시험이 아닌 수필을 써서 제출하라고 하셨습니다. 수필이라…. 사실 이 강의를 신청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수필 쓰기를 할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기말고사를 대신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네요. 내일부터 기말고사 기간입니다. 빨리 써서 제출하고 편한 마음으로 제주도의 멋들어진 풍경을 즐기고 싶은데 뭘 써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안 씁니다. 한글 문서의 커서가 깜빡이는 것 길어질 때마다 왠지 모를 부담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일단 적어보려고 합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사실 이미 그렇게 적고 있답니다.
제 아내는 제주도에 와서 밤에 다음 날 일정을 짜고 있습니다. 지금 펜션 2층에 올라가 내일 일정을 짜는데 고심 중이죠. 본인 말로는 MBTI가 P라고 합니다. 그런가 보다 하고 웃을 때 가정에 행복이 깃든다는 것을 몇 번의 이벤트를 경험하며 깨달았습니다. 값진 교훈이라 생각합니다.
몰티즈 견종인 두 반려견은 아내를 따라 2층에 올라갔습니다. 이름이 쫑이와 솜이인데, 승질을 참지 않는다는 몰티즈답지 않게 순하고 귀엽답니다. 아 참, 쫑이 친구는 조금 입질이 있긴 한데 저에겐 순해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대형견인 두 친구는 켄넬에서 취침 중입니다. 한 친구는 벨지언 말리노이즈라는 견종이고 다른 친구는 보더콜리 종입니다. 둘 다 체력이 참 좋아서 말썽이지요. 이들과 함께 하는 하루하루가 참 주옥같습니다. 개 친구들은 머나먼 제주도에 와서도 추억거리를 만들기 위해 분주하답니다. 뒤처리는 항상 저와 아내의 몫이지요.
노트북 타자를 두드리는 와중에 코 고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람 아이를 낳고 기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개인데도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면 기분이 좋습니다. 사고뭉치들이라 시도 때도 없이 화딱지가 나고 열불이 터지지만 그래도 이 맛에 키우는 것 같습니다. 아직 명확한 2세 계획은 없습니다만, 가끔 아내와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아이를 낳으면 어떨지, 우리의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은 또 얼마나 파란만장할지 미래를 그려보곤 한답니다. 항상 결론은 내년에 생각하자로 마무리됩니다. 아직은 한 아이를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져요. 언제쯤 내 손에 닿는 만큼은 아울러서 포용하는 굳건한 어른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점점 밤이 깊어집니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캔을 하나 꺼내어 목을 축입니다. 알딸딸한 기운이 돌면, 어쩌면 글이 더 잘 써질까 싶습니다. 개들의 코 고는 소리, 뒤척이는 소리를 들으니 저도 잠이 오네요. 술기운이 오르나 봅니다. 얼른 글을 쓰고 자야겠어요.
쓸 것이 없으니 시장에 간 얘기를 좀 적어볼까요? 제주도에 왔으니 시장에 들러야 합니다. 아무래도 선물을 사야 하거든요. 시장엔 이미 내륙에 있을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사러 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합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시동을 켜놓은 채 내립니다. 차엔 반려견들이 있어서 에어컨을 끌 수가 없어요. 이젠 그늘이 있는 주차장에 세워도 후덥지근한 날씨가 됐습니다. 제주도에 있으니 정말 동남아의 아열대 기후 같습니다. 사계절 뚜렷한 날씨가 우리나라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참 아쉬워요. 저는 가을을 참 좋아하는데 봄, 가을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안타깝습니다.
부모님에겐 카라향과 황금향을, 처형네 식구들에겐 미니 애플망고를 택배로 보냈습니다. 과일 이름들이 점점 다양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름이 화려할수록 비쌉니다. 오늘 저녁에 먹으려고 애플망고 2개를 집었더니 3만 원이랍니다. 가격을 듣고 부끄럽게도 표정관리를 못했어요. 사긴 샀는데 다신 내 돈 주고는 안 사 먹겠다 다짐합니다. 이 값이면 사과와 망고를 여러 개 사서 먹거나 애플망고 맛 젤리를 먹는 게 났겠어요. 실제로 맛도 그 값어치는 못 합니다. 쓰잘데기 없는 자존심에 사치를 부렸지요. 펜션에 돌아와서 반성했답니다.
그리고 야시장에 들러 닭꼬치를 하나 먹은 후 저녁에 먹을 고기와 숯, 불판 등을 사고 펜션에 돌아왔습니다. 희한하게도 여행을 하면 조금만 움직여도 배가 고픕니다. 도착해서 좀 쉬려고 했더니 어느새 그릴에 숯을 올리고 불을 붙입니다.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내는데 아내가 야식 얘기를 꺼냅니다. 애플망고론 안 되나 봅니다. 역시 값어치를 못하네요. 치킨이나 족발을 살 걸 그랬습니다.
그렇게 계속 먹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음식이 가득하던 식탁에 노트북을 펴고 앉았습니다. 고기를 먹으면서 소주를 한잔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시간이 훌쩍 흐를 수가 없지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주어진 현실에 지친 여행자에겐 가혹합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 누우면 내일이 찾아오고, 내일도 오늘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겁니다. 어휴, 집에 가기 싫네요.
아내가 2층에서 내려옵니다. 잘 시간이라는 의미죠. 다다다다, 하는 작은 발소리와 함께 작은 두 친구도 내려옵니다. 개들은 보면 볼수록 신기합니다. 매일 같은 하루를 반복해도 행복한 것 같아요. 그들은 과거를 후회하지도, 미래를 계획하지도 않고, 오로지 현재만 산다고 합니다. 코골이 두 친구와 자기들에게 편한 잠자리를 찾아서 이 방 저 방을 유랑하는 두 친구를 보니 그 말이 꼭 맞는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에 머무르지 못하는 저는, 반려견 친구들이 참으로 부럽답니다.
아내가 밤이 늦었다고 얼른 씻고 자라고 합니다.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만 글을 줄입니다. 잠드는 모든 이가 좋은 꿈을 꾸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