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저'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그저 그랬다.
태어났으니까 살긴 살아야겠고 무의식 중에 인정받고 싶은 맘은 큰데 그게 좀처럼 되질 않으니 그림자 속에 숨어 귀찮음으로 포장하고 고슴도치처럼 굴었다. 폼 나고 잘난 맛에 살아본 적 없고 평범하고 일반적인 그저 그런 삶을 살아왔다.
초등학교는 재밌었다. 그저 즐거웠다. 그냥 웃고 뛰놀면 끝이었다. 중학교에 들어와서 남자의 서열이 뭔 줄 알았다. 나는 어정쩡한 가해자 포지션에 섰다. 내 필요에 의해서 도왔고 내 필요에 의해서 빼앗았다. 선악의 개념이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제일 쓰레기였다.
부모님을 따라 이사를 하고 옮긴 학교에선 쌈박질도 하고 일진 노선을 탔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쪽 무리에서 빠져나와 다른 부류의 친구들을 사귀었다. 왜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만화책과, 판타지 소설, 일본 애니메이션에 미친 듯이 빠져들었다. 답답하고 억눌린 상태에서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해방구였다.
고등학교 때는 오타쿠로 불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소년만화 주인공은 항상 굳센 마음으로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며 쓰러져도 일어났고, 나는 공상 속에서 대리만족하는 걸로 만족했다. 누가 뭐래도 난 좋았고 지금도 그때의 내 모습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만화 속 주인공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얼마나 삐뚤어져야만 했을지 상상이 가질 않으니까.
그러다가 대학을 갔고 술을 겁나게 퍼마시다가 정신 차리고 군대를 갔다. 운동이라곤 제대로 해본 적도 없으면서 특수부대 영화를 잔뜩 보고 뽕에 차서 특전사에 지원했다.
특수전학교 첫날, 진흙 밭에서 구르다가 포기했다면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싶다. 무슨 맘으로 버텼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감정만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나는 그렇게 4년을 악에 찬 오기로 버텼다. 특전사에서 버텨냈다는 자부심, 그 안에서 뼈저리게 느낀 나라는 인간의 비굴함, 그리고 여기저기 비명을 지르는 몸뚱이를 가지고 전역했다.
전역 후 동기 따라 소방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내 주관은 딱히 없었다. 반려견 훈련사가 되고 싶었는데 어느새 주변의 말에 휩쓸려 공부하고 있었다. 월급이 끊겨 불안해진 것도 한 몫했다. 그러다 보니 왠지 모를 반항심도 생겨서 처음엔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나마 소방에 인명구조견 핸들러가 눈에 띄긴 해서 마지막 3개월은 열심히 공부했다. 떨어지면 바로 애견 훈련소에 입소하리라 마음먹었다. 결과는 놀랍게도 붙어버렸다. 필기 합격을 확인했을 때의 그 복잡 미묘한 기분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소방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변곡점인 반려견 알파와 함께 하게 되면서 삶이 방향성이 바뀌었다. 알파로 인연이 된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며 조금씩 성장할 수 있었다.
이게 다다. 내 근간을 이루는 정체성이라고 부를 만한 것.
가끔 특전사 다녀왔다고, 소방관이라고 특별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일반 성인 남자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단지 직업적 '선택'을 하지 않았을 뿐.
특전사라고 모두가 운동을 잘하는 것도, 소방관이라고 모두가 사명감 투철해서 불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은 아니다. 직업이니까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나는 그저 '선택'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 선택이 정말 주체적이었던가에 대해선 솔직히 부정적이다. 나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사회의 시선, 타인의 말에 휘둘려 여기까지 왔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안다고 해서 실제 행동이 바뀌는 것도 아니더라.
소방관을 그만두고 반려견 훈련사가 되지 못한 것도 결국 타인의 말과 시선 때문이었다. 나는 중요한 선택지가 있을 때마다 내 주관보다 타인의 의견에 따라 선택한 경우가 많았고 그게 나중에 후회와 미련으로 남았다. 물론 내 주관대로 했어도 후회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그거야 내가 책임지는 거고...
직업적 정체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나는 군인 및 공무원만 십여 년을 해왔고, 내 인생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월급이 찍히지 않는 나, 국가에 속하지 않은 나에 대해선 아직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날 보수적으로 만든다.
자기 줏대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보면, 그게 옳든 그르든(불법 X) 정말 멋있고 이쁘다. 남녀노소 나이 불문하고 반짝반짝 빛이 난다.
내가 경험해 보지 않은 삶에 대한 선망과 존경의 마음이 있다. 나도 미친 듯이 몰입해서 무언가를 하고,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주어진 대로 살기보다 내 줏대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그런 멋있는 삶을 살고 싶다.
나는 그저 그런 어른이 되어 늙어 죽고 싶지 않다. 나의 정체성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드러내려고 애쓰기보다 은은히 배어 나오는, 타인보다 나에게 더 인정받는 어른으로 죽고 싶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하자!
아 참,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방영했던 포켓몬스터의 주인공 지우가 태초마을을 떠난 지 25년 만에 챔피언이 됐다고 한다. 나는 현실에 치여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는데 이 캐릭터는 한 걸음 한 걸음 정진하여 진짜 마스터가 된 것이다. 체념인지 감동인지 모를,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고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
이젠 애니메이션을 보진 않지만, 오타쿠였던 추억이 있어 인생 뭐 같아도 사는 것 같다. 그저 그런 인생에 특별함을 부여하는 동심?? 어쩌면 내가 가진 유일한 초심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