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베티 Nov 05. 2019

[Prologue] 46, 디폴트: 어쩌다 생활 개조

Prologue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여수까지 출장 다녀오실 수 있겠어요? 맛집 두 곳을 촬영해서 원고를 써주시면 출장비도 챙겨드리겠습니다. ”      

기다리던 일이었다. 프리랜서로 출장비를 지원받아 전국을 돌면서, 먹고싶은대로 먹고, 돈을 버는 꿈같은 일!!!  노트북을 들고 카페를 작업실 삼아 원고를 쓰고 사진을 추리는 일~! 내 로망이 아니던가!! 당장 여수행 KTX티켓을 끊었다. 그날은 마침 딸, 써니의 현장학습이 있던 날이라 전날 아이가 입고 갈 옷 등을 미리 체크해놓고 남편에게도 자잘한 일들을 당부해두었다.  

 전업주부였던 내게 7살 딸의 등원을 봐주지 못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제 나도 엄마로서가 아니라 일하는 나로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가는구나 싶어 가슴이 설레이는 한편 기차시간에 맞춰 새벽에 일어날 생각과 동선 등을 생각하느라 잠을 설쳤다. 나오기 전에 남편과 딸에게 고마움을 담은 메모를 써두고 냉장고에 붙이고 나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이날의 메모를 나는 오래도록 떼지 못했고 지금도 일기장에 넣어 간직하고 있다. 이 메모를 볼때마다 내가 왜 거길 갔을까. 계속해서 후회하고 이 메모를 쓰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간절히 생각했었다.     


 


 

당일치기였던지라 움직이는 일정이 빠듯했다. 도착하자마자 문 열기 직전의 식당부터 찾았다. 식당주인이 성심껏 차려준 음식들을 골고루 찍으면서 섬세하게 맛을 보며 노트를 했다. 상이 푸짐해서 한젓갈씩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서울에 두고 온 가족들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이 산해진미를 나혼자 먹다니 다 싸가고 싶었다. 빠듯한 일정에 동백으로 유명하다는 오동도도 다녀왔다. 동백은 이미 물러간 4월 말, 바다로 둘러싸인 기암절벽과 꽃길로 이뤄진 섬은 신성해 보이기까지했다. 8시에 서울에 도착하고 나니 남편과 아이가 용산역에 마중 나와 있었다. ‘엄마~!’ 소리를 내며 달려와 폭 안기는 딸은 하루사이에 부쩍 커보였다. 더없이 행복했고 모든게 완벽했다. 이제 내 로망이 다 실현되는구나! 이제 시작이야!      


그렇다. 그날이 정말로 시작이었다.      


여행 다음날은 우쿨렐레 레슨이 있는날이었다. 이상하게 코드가 잘 안 집히고 식은 땀이 났다. 등뒤에서 누가 계속 찍어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간신히 1시간의 레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역시나 무리했구나 싶었지만 전날 다녀온 여수의 사진 정리, 원고도 마무리해야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남편이 퇴근하자마자 아이를 맡겨놓고 카페로 달려가서 헬카페의 고카페인 커피를 흡입하며 노트북 작업을 했다.  그런데 모니터를 보는 게 무척 힘들게 느껴졌다. 눈을 돌릴 때마다 아슬아슬한 어지러움이 스쳐간 달까. 뭐라 설명할 수 없이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너무 잠을 못자고 피로해서 그런가보다. 두들겨 맞은 것 같은 피로감마저도 감미로웠다.      


다음날부터 걷고 있을 때면 뒤에서 누가 휙 잡아당기는 느낌이 나면서 어지러웠다. 마치 잔잔한 강 위를 달리는 유람선을 탄 것처럼, 엘리베이터를 탄 것처럼 순간 순간 어!하는 느낌이었다. 마구 요동치는 어지러움은 아니지만 휘청거릴 것처럼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앉아있으면 한쪽으로 쏠리는 느낌도 났다. 나중에야 이런걸 비회전성 어지러움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지러움과 별도로 머리는 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처럼 계속 무겁고 집중이 잘 안되었다. 두통의 파고도 심해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했다. 거대한 인형뽑기 집게가 내 머리를 통째로 내 머리를 잡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뭔가 비현실적이었다. 눈도 잘 안보이고 침침했다. 흐린날은 모든 사물이 배경이 2D로 보였다. 여수 여행 중에 크로스백을 매고 다녔는데 크로스백 끈이 걸려있던 오른쪽 목 부분도 심하게 뻐근했고 오른손이 저려왔다. 자려고 누우면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월요일, 바로 동네 병원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대번에 나보고 자세가 너무 이상한 걸 본인은 모르냐고 하셨다. 당장 침을 맞든 정형외과를 가든 목부터 풀어야한다고, 신경이 눌린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이 분의 처방이 맞았다. 모든 것은 자세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바로 정형외과를 찾아가서 도수치료와 물리치료를 받았다.      


문제는 그 주에 발생했다. 자다가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깜짝놀라 일어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악몽을 꾸고 난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잘 자고 있는데 마치 누가 두들겨 깨운것처럼 심장이 놀란 듯 반응하며 너무 무섭게 뛰어서 이거 왜 이러지 싶었다. 두 번이나 그러고나니 응급실생각이 절실했다. 나, 이러다가 죽겠구나...

혹시 몰라 금식까지 하고 달려갔다. 각종기본적인 검사와 심장 초음파를 검사했다. 혈압이 140-150으로 널을 뛰었다. 6시간을 넘게 기다려서 만난 전문의는 별것 아니라는 듯 심장에는 아무 이상도 없으니 심장이 뛸 땐 안정을 취하라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지금 자다가 심장이 뛰는데 자는 것보다 더 안정을 취하는 방법이 있나요? 라고 따지고 들었다. 결국 의무기록을 떼어서 집 근처의 대학병원으로 옮겨왔다.      

어지러운 것이 시급한 문제였지만 자다가 급작스럽게 깨는 상황 때문에 눕는게 두려웠다. 자려고 누우면 머리의 피가 급격하게 쏠리면서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뇌압이 쭉 올라가는 느낌.  바로 눕는 것은 당연히 힘들었고 옆으로 누우면 옆으로 피가 쏠리는 기분이었다. 3살이후부터 아이에게 꼭 해주던 잠자리 책읽기도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어 더는 해줄 수 없었다.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읽는 것마저도 힘들었다.      

자려고 누우면 어깨가 한없이 움추려져있고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자고 있었다. 어서 잠들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수록 잠은 더욱 오지 않았다. 아무리 피곤하게 하루를 보내도 운동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잠을 자도 잔 것같지 않았지만 그나마라도 누워있지 않으면 다음날 격한 어지러움에 시달려서 수면량을 줄일 수 없었다.      


설상가상 그 주에는 제주도로 맛집 촬영을 가게 되어 있었다. 근사한 호텔도 예약하고 엄마도 모시고 다 함께 이른 호캉스를 가기로 했지만 나의 마음은 무겁기만했다. 이렇게 뇌압이 올라가는 데 과연 비행기를 타도 될까. 제주도 가서 응급실에나 가는 것은 아닌가. 오만 걱정이 먼저 앞섰고 로망이었던 일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한편으로 이제 막 시작인데 참으로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편은 제주도에서 잘 쉬다오면 좋아질꺼라고 토닥였다. 나 역시도 이것이 심인성 어지러움이 아닌가, 푹 쉬다 오자 하는 생각으로 제주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한 일이었다. 더 이상의 과로로 번지지 않은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제주도에서도 여전히 어지러움은 계속되었다. 식사를 하려  앉으면 식은땀이 나면서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 멘탈붕괴의 시간이 밀려왔다. 순간 순간 힘들었고 제주도에서의 시간의 사이 사이가 ‘아. 또 어지럽다. 머리가 무겁다. 힘들다’라는 고통의 각인들로 채워져있다. 여행의 피로로 지쳐 곯아떨어질만도 한데 첫날 숙면한 것 외에는 다음날에도 잠을 자지 못해서 멀뚱 멀뚱 자다가 깨어나 호텔방 천장만 쳐다보다 이러다 또 심장이 뛰면 어쩌지란 생각으로 날밤을 세운 기억만 남아있다.      


결국 서울에 올라와서 심장 초음파/ 24시간 심장의 박동수를 재는 홀터검사 등을 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지리한 병원투어가 시작되었다. 뇌 MRI/ MRA 등을 거쳐 이비인후과의 전정기능검사를 했다. 이상이 발견되대, 약으로 가볍게 고칠 수 있는 정도의 맞춤형 진단명을 기대한 나에게는 실망의 연속인 검사들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엄마가 다니고 있던 동네 한의원을 찾아가 침을 맞았다. 그런데 침을 맞기 전에 따끈한 찜팩을 등에 놓아주는데 그게 어찌나 시원한지 정말 며칠만에 제대로 누웠구나 싶었다. 여전히 똑바로 누워서 침을 맞는 것은 식은땀 날 정도로 힘든 일이었지만 침을 맞고 나니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발병 후 처음 숙면을 취한 날이었다. 침의 효과는 드라마틱했고 급한 불을 끄기에는 좋았다. 하지만 역시 근본적인 것은 고쳐주지 못했다. 정말 너무 심하게 아픈 날 가서 침을 맞고 오면 더 나아지는 날도 있었지만, 효과는 반나절 정도 밖에 가지 않았다. 뇌압이 높아지는 느낌이라서 높은 베개를 목에 받치고 자면 조금 나아진 듯 했다. 천만다행으로 그 날 이후 자다가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은 사라졌다. 물론 조금만 걸어도 100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는 빈맥은 계속되었다. 누군가 뒤에서 계속 몸을 누르는 것 같은 느낌도 여전했다. 침을 놔주시는 선생님도 너무 여러곳이 아프다보니 어디서부터 침을 놔야할지 난감하다 하셨다.      


 근본적인 것을 찾아내야 했다. 병명이라도 알고 싶었다. 이러다가 죽는 것은 아닌가. 내가 죽으면 아직 어린 딸 아이는 누가 어떻게 돌보나. 남편은 재혼을 하게 될까. 이제 막 행복의 가도에 제대로 들어섰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내가 원하던 것을 다 이뤄가던 첫 날이었는데 하필 그때 이병이 찾아온 이유가 뭘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 살아온 것일까. 오만 생각들이 오가면서 억울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 눈물이 나기도 했다. 병명을 모를수록 인터넷검색에 의지하고, 비슷한 병명을 가진 환우들이 모인 카페에 가입했다. 인터넷의 병명들은 신기하게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모든 병이 나에게 해당되는 것만 같았다. 뇌졸중, 뇌종양, 중추성두통, 근막통증증후군, 이석증, 메니에르, 공황 등등 어지러움은 모든 분야에 걸쳐있었다. 어지러움의 대부분의 원인은 귀와 뇌에 있지만 그 외의 어지러움의 원인은 의사들도 밝혀내기 힘들다는 결론이었다.      


한편으로 병명을 밝혀내지 못한다는 것은 인류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질병, 요컨대 암과같은 중대한 질병이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기도했다. 한달동안 미친 듯이 병원투어를하면서 각종 검사를 통해 이상없음을 알아낸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었다.  인터넷 카페에 가입해서 검색해보니 의외로 나와 비슷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지럽고 심장이 뛰고 뇌압이높아지는 느낌이며 시야도 흐릿해진다. 계속 유람선이나 엘리베이터를 탄 기분이고 어깨와 등이 굳는다. 

나와 비슷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그들도 대책 없긴 마찬가지였지만 이 병이 내게만 존재하는 허구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었다.     

5월 한달을 넘어 들면서 6월에는 나아지겠지 싶엇지만 이젠 내가 정상이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이가 반친구 엄마들과 앉아 이야기를 할때면 종종 옆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듣지 못하여 남들이 다 웃을 때 혼자 멋쩍게 웃은 적도 많다. 내가 이야기를 하다가도 핑 도는 느낌이 들면서 혼자서 다른 세상에 다녀오는 느낌도 들었다. 식은 땀이 나고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지만 드러누울 정도는 아니니 무조건 버텨야한다는 심정으로 버텼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이것이 목과 연결된 문제인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척추MRI를 찍고 결과지를 들고 이 분야의 명의라는 분을 찾아갔다. 6시간 기다린 선생님의 60초 진단은  “심각한 디스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였다.  재활의학과를 찾아가보라고 했다. 그것이 6월의 일이었다.      


 선생님 이야기 덕분이었나, 신기하게도 한 일주일은 정말 어지러움이 사라졌다. 마음의 병이었나 싶게 말끔했다. 그것은 잠시였다. 7월에 접어들면서 생리가 시작되고 아이가 원인미상의 두드러기가 올라오면서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자 어지러움이 슬며시 찾아오다 말다했다.  어지러움이 소강상태에 들어가나 했으나 이번에는 이명과 귀먹먹함이 찾아왔다. 자려고 누우면 귓속에서 냉장고가 굴러가는것같은 소음이 흘러나왔다.  오른쪽귀는 고산지대에 올라온듯  먹먹했다. 잠깐만 어깨에 무거운 것을 들어도 몸이 쏠리고 어지러웠다.      


그렇게 7월 14일 전야. 올게 왔다.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7월 14일에 점심은 시어머니 생신, 저녁은 친정엄마의 생신이 있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여느 때처럼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나는 자다가 새벽에 일어났는데 갑자기 다음날 행사 두건으로 이런저런 걱정이 밀려오더니 어느 순간 어!하는 느낌과 함께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또다시 뒷 통수에서 쏴한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밀려가는듯한 느낌. 누워있는데도 몸이 한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어, 안돼. 혹시 나 때문에 행사에 차질이 생기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식은 땀이 나면서 과호흡이 오기 시작했다. 엄마. 나 어떡해 하는 심정으로 불안감이 높아지면서 어쩔줄을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공황이란것이구나. 그동안 어지럼움, 심장 뜀이 공황이 아니냐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지만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은 어지러움을 촉발하는 어떠한 트리거가 없다 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패닉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것은 공황이었다. 결국 그 주에 공황은 두 번이나 왔고 결국 어떻게든 정신과약을 먹지 않고 버텨보러던 나의 노력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미 모든 자율신경이 놀랄대로 놀라 있는 상황이라 마치 온몸이 더듬이가 된 모양으로 작은 고통에도 민감해져 있었다. 하다못해 침을 맞는 것조차도 움찔거렸다.       

놀란 신경을 억누르는데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는 효과는 컸다. 실제로 이명과 귀충만감도 사라졋다. 자다가 깨는 것은 똑같았고 생리때가 되면 더욱 불안해지는 것도 똑같았지만 차츰 불안감이 잦아드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2달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약물치료보다는 인지치료를 강조하는 선생님을 찾아가 단약 하는데 성공했다. 실제로 약을 복용하면서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어지럽고 속이 불편하는 등의 부작용도 있었기에 빨리 약을 끊고 싶었다. 약을 끊고 나서 어지러움은 기존의 잔 어지러움으로 돌아와있었다. 이제부터 다시 원점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나는 나를 개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몸이 나를 살려달라고 이 아우성을 치는데 나는 여태까지 그 소리를 못 들은 척 했던건가 싶었다.      

그렇게 내 채무불이행에 대한 댓가로 디폴트가 시작되었다. 내 온몸을 내 온 인생을 여태까지 살아왔던것과는 정반대로 살아야겠다고. 내몸을 디폴트모드로 돌려놔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 인생개조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글은 완치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은 환자의 치열한 투병기록도 아니다. 다만 이 글은 나에 삶에 대한 반성문이자 내 몸에 대한 사과의 기록이다. 또 앞으로 남은인생을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작가의 이전글 Lesson3   0.5프로의 성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