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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베티 Nov 17. 2019

[1] 어쩌다 만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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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의가 되는 법은 간단하다고한다. 환자에게 '꼭 운동하라'고 처방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아주 틀린 말이 아닌 것이 “운동을 좀 해보세요.”라는 의사와 “꼭 하셔야합니다. 안 하면 큰일납니다.”라고 강조해주는 의사를 만나는 것은 환장입장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하다못해 정신과 의사들이 쓴 불안을 다룬 자기계발서 서적을 읽다보면 중간 중간 꼭 ‘이 책을 덮고 당장 산책을 나가시오’ 라는 구절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데 책을 더 읽고 싶어서, 귀찮아서,  산책을 미루게 되는 아이러니가 꼭 발생한다. 


사실,  운동좋은걸 누가 모르나.  의사도 할말없어서 저리 말하나보다. 내가 운동할 시간이 어디있나. 애보고 살림하고, 내평생 지금처럼 열심히 산 적이 없는데 무슨 운동까지 하냐. 사실 운동을 안해도 여태껏 잘 버텨왔으니까 앞으로도 그럴것이고 내 병은 다른데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귀찮다. 만보를 걸을만한 의지도 바닥이 나있다. 


운동은 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옵션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몰랐다. 그냥, 의사들도 원인을 모르고 약도 없으니 스스로 근본적인 것을 하나하나 고쳐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공황장애’카페, ‘척추질환’카페, ‘어지러움질환’카페 등 나와 비슷한 질병이 걸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입해서 완치되었다는 환우들의 수기를 찾았다. 대부분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었다. 발병원인도 이석증, 메니에르, 목디스크, 공황처럼 나와는 달랐다. ‘마그네슘과 코큐텐은 꼭 복용해야한다’. ‘밀가루와 당을 끊어라’. ‘전정재활운동을 해라’와 처럼 메아리 없는 아우성마냥 절박하고 가지각색이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이 각종 카페의 완치 환우들의 공통점이 한가지 있었다. 바로 걸었다는 거다. 물론 걷기를 포함한 다양한 운동을 했다지만 운동의 효과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일테면 요가의 어떤 동작들은 척추에 치명적이고 심지어 어지러움을 촉발하기도 한다는 것.  헬스장의 러닝머신은 어지러움 질환자에게 위험할 수 있다, 수영은 오히려 어깨에 더 안 좋다. 등등 여러 갈래로 의견이 갈리었지만 걷기는 부작용이 거의 없는 운동으로 손꼽혔다. 무엇보다 시간과 돈을 들이지 않고 바로 시작하기 좋다는 것이 걷기의 최고 미덕이었다.      


“불행한 가정의 모습은 제각각 다르지만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다 똑같다”라고 톨스토이가 말했던가. 건강도 그러하다. 각각의 질병과 발병이유는 다 다르지만 그것을 바로잡는 것은 바로 걷기였다. 결국 나도 어쩔수없이 걷기 시작했다. 자세를 빠른시간안에 고치는게 가장 큰 문제였는데 어차피 앉아있는것도 너무 힘들고 누워있으면 심장이 뛰어서 잠도 안 오니 라도 해야했다. 발병원으로 의심되는 거북목도 걷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척추가 곧추세워진다 했다. 하다못해 살이라도 빠지겠지싶어 막무가내로 시작했다.


사실 우리집은 한강나들목이 1분 거리다. 화려한 강남의 한강쪽이 아니라 몇십년째 재개발 논란만 일다가 사그라지는 동네다. 나는 철 들고나서부터 재개발지역인 우리동네를 좋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강변을 걷게 된 것도 근처에 마땅히 걸을만한 공원이나 녹지가 없기때문이었다. 애시당초 한강이란 곳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비릿하게 물내음이 밀려오는 한강변에 비둘기떼들이 서식하고 있고 사이클이 정신없이 휙휙 지나가는 곳이었 때문에 아이랑 걷기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특히나 비둘기 공포증이 있는 나는 비둘기들을 보면 돌아갈 수도 없는 한강이 공포스럽기까지했다. 


 그런데 걷기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순간 의외로 비둘기떼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여전히 조류공포는 남아있지만 돌아가면 되는 문제였다. 더구나 내가 걷던 저녁무렵에 비둘기들은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또 지루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던 한강의 모습도 상당히 다채롭다는 걸 알게되었다.  항상 숲의 냄새를 맡으며 걷는 것을 힐링이라고 생각했는데 곧게 뻗은 어디까지라도 이어지는 서울의 강을 따라 걷는 것 역시 대단한 치유의 능력이 있었다.  


비릿한 물냄새도 싫지 않았고 한강을 서식지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생물들을 살펴보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 되었다. 저녁이 되면 돌고래마냥 뛰어오르는 물고기들과 저녁 식사를 하러 오는 이름 모를 새들. 특히 우리가 펭귄이라고 부르는  아파치 스타일의 긴 꽁지머리를 한 새 (아직까지 이름을 모른다) , 긴목을 꾸르럭 거리며 잠수교 한가운데 있는 다리 어드매에서  그 녀석을 마주치는 날은 아이와 함께 즐거워했다.  강의 얼굴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그날의 구름, 그날의 하늘, 그날의 냄새, 그날의 물색, 물의 흐름등도 늘 변화롭다는 것을 40평생에 처음으로 알았다. 


한강을 끼고 있는 우리동네에 난생 처음으로 애정을 느끼게 된 한해였다.      


 만보걷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여름에는 집에서 입던 반바지와 늘어난 목티를 입고 운동화만 신고 나갔다. 의외로 모기도 별로 없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 걷는 게 힘들지 않았다. 꽤나 더웠던 지난 여름에도  너무 더워 숨이 막힌다 싶었던 날은 고작 2-3일정도였다. 두세시간을 걷고 나면 양동이로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땀이 났다. 집에 와 샤워를 한다. 온몸이 시원한 나른감으로 감싸인 기분은 정말 최고였다. 


비오는 날도 걸었다. 태풍이 와도 걸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비가 오다가도 우리가 산책을 나갈쯤이면 비도 태풍도 멈추었다.  다리밑이라서 어지간한 보슬비는 그냥 맞으면서 걷기도 했고 아이는 우비를 입혀서 데려나갔다. 어차피 여름이라 비가와도 몸이 스산하거나 하진 않고 폭우가 쏟아진날은 2일 정도밖에 없었던거같다. 오히려 맑게 씻긴 하늘을 보면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무지개를 발견한 날은 특별한 선물을 받은것처럼 기뻤다. 

 

조금만 걸어야지 하다보면 어느덧 잠수교까지 다다랐고, 온 김에 잠수교를 넘어볼까 하여 반포까지 다녀오면 만보가 거뜬히 넘어있었다. 킥보드를 탄 아이는 그 지점 끝에 있는 놀이터에서 친구들을 만나 놀다가 집에 오면 8시 9시가되어있었고 아이가 노는걸 지켜보거나 스트레칭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걸어서 돌아왔다. 그렇게 우리의 여름방학은 치열하게 지나갔다. 


 만보 걷기를 시작하면서 삶의 패턴도 바뀌었다. 무조건 외식 이나 체험위주의 외출이었던것이 어디에 가면 만보를 걸으면서 아이와 시간을 보낼수 있나를 찾게 되었다. 심지어 저녁에 한강을 걷기 위해 주말을 비워두거나 저녁 외출을 자제하게 되었다. 비슷한 일상이었지만 공기의 냄새와 흐름이 다른것처럼 날마다 특별했다.  호퍼의 그림처럼 명암이 분명한 가을 볕을 잔뜩 받으면서 오늘 하루 이렇게 걸을 수 있음을 감사해하게 되었다. 


여름이 지나가면서 아무래도 밤에 혼자 산책하는 것은 꺼려져서 낮시간으로 옮겼다. 무엇보다 밤이 되어 시야가 어두워지면 어지러움이 더하게 느껴졌다.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은 집에서 다섯정거장 정도 떨어져 있는 병설이다. 예전엔 차로 가도 꽤 멀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한강변을 따라 걸어가면 채 30분이 걸리지 않는다. 고작해야 3-4천보밖에 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이 거리를 걷는것도 체력소모였고 큰 각오를 해야하는 일이었다. 이제는 당연히 별 다른 스케쥴이 없으면 시간을 내어 걸어야하는 길이 되었다.걸으면서 영어그림책도 듣고 e-book도 듣고 영어도 외운다. 가끔 명상도 한다.   오히려 시간이 짧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날씨가 좋으면 아이도 걸려서 집으로 돌아온다. 여름내 열심히 걸었던지라 아이도 크게 힘들어하지 않는다. 다만 걷기 전에 편의점에서 좋아하는 과자 한봉지를 사주는 것은 관례가 되었다. 


겨울이 되니 예전만큼 걷기가 수월하지 않다. 얼마전에는 추운 오후에 나갔다가 어지러움이 더 심해지는 경험마저했다. 그래서 어쩔수없이 생활속 움직임으로 7천보 정도를 충당하고 집에서 가벼운 운동등으로 만보를 채우고 있다. 생활속 움직임만으로 만보를 채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만큼 열심히 움직이면 못할것도 아니다. 덕분에 왠만한 거리는 걸어다니고 엘리베이터는 타지 않게 되었으며 제자리에서서도 계속 움직이고 책을 읽을때도 서성대면서 읽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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