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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베티 May 14. 2020

심리치료를 시작하다

It's not your fault. 

첫 날, 심리치료실에 들어서서 선생님이 그려보라고 하는 것들을 그렸다. 집도 그리고, 나무도 그리고, 개울에 산풍경, 그리고 선도 그려보았다. 남자와 여자의 그림도 그렸다. 선생님은 내 안에 불안과 공포가 굉장히 많다고 하셨다. 본래의 나라는 사람은 에너지도 많고 사회성도 넘치는데 그 공포와 불안으로 인해 모든것이 위축되어 있고 삶에도 지장이 있을꺼라고 했다. 한편으로 애정결핍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 열등감도 심하다고 했다. 


 두번째 심리치료에서는 알에서 깨어나는 어떤 것을 그리는 과정이었는데 나는 아이를 그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는무표정했다. 행복해보이지도 그렇다고 불행해보이지도 않았다. 나왔으니 살아야지. 그런 느낌? 선생님이 일일이 그림에 대해 코멘트를 해주시는 것은 아니기때문에 그 그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철썩같이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이 신기했다. 


음악USB를 받아오면서 선생님이 여러 주의사항을 일러주셨다. 음악CD는 일주일에 두번 정해진 시간에 들을것, 그리고 남이 들어서는 안되며, 순서가 뒤바뀌어서도 안된다는 주의사항이었다. 혹여 순서가 뒤바뀌거나 한곡을 반복해서 듣거나하면 안된다고 주의사항을 알려주셨다. 마치 차이나타운 뒷골목의 어느 도인에게서 받아오는 물건마냥 매우 미스테리했다. 


선생님이 피라미드를 그려서 보여주셨다. 피라미드의 1/10정도 되는 작은 부분이 의식이고 나머지 거대한 부분은 무의식이라고 하셨다. 무의식이 공포와 불안으로 꽉 차 있어서 자꾸 의식을 뚫고 나온다고 했다. 늘 느꼈던 것이다. 불안은 본능의 언어로 말을 거는데 나는 이성의 언어로 불안을 다스리고 잠재우려했다는걸. 


이런 점을 깨달은 것은 <편안함의 배신>이라는 책을 읽으면서부터였다. 명상이나 인지치료의 한계가 있는 점은 인지적인 치료는 대뇌피질에서 일어나는 이성적인 부분이고 미쳐 날뛰는 생존본능은 번연계의 부분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대뇌가 잔소리를 해도 번연계에는 통하지 않는다. 둘은 서로 쓰는 언어가 다르다는것이 핵심이다. 

나는 내 무의식의 영역이 저정도로 넓으리라고 생각해본적이 없다. 그동안 불안이 밀어올라올때마다 "또!","대체 왜 그러는거야, 불안할 것도 아닌데!" "넌 정말 미친것 아니야?"하면서 스스로를 미워하고 혼내고 욕하고 다그치고 자괴감에 빠졌더랬다.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나의 뇌 회로는 왜 이렇게 최악의 시나리오를 향해 달려가도록 만들어진걸까. 나는 왜 남들처럼 쿨하게 살 수 없는걸까. 왜 무엇을 시작하기도전에 그렇게 겁이나고 해서는 안 될 이유를 조목 조목 늘어놓을 수 있는걸까. 


애시당초 승산이 없는 게임이었다. 내 안의 불안을 나의 의지로 다스릴수 없었다. 지쳐 떨어졌을 나의 의식에 깊은 감사와 사죄를 보낸다. 차라리 모든걸 내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네 잘못이 아니야. 


선생님은 아마 이 불안과 공포때문에 사회적으로 많이 위축되었을꺼라고 하셨다. 우리가족은 한달에 한번 여행을 다녔고, 주일마다 아이와 체험을 하러 다녔으며, 주중에는 두 번 이상 외식을 했다. 한시반에 하원하는 아이와 반일반 친구들과 함께 공원으로 놀러 다녔다. 오히려 불안장애가 없는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버라이어티하게 살았다. 할 것은 다 했는데? 라고 의아했다. 불안과 공포가 걷히고 난 뒤 찾아올 삶을 생각해보라고 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차피 나는 계속 이대로 살아갈 것이었다. 한달에 한번 여행을 하고 아이와 체험을 하고 말이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런 활동을 하면서 내 삶에는 항상 불안이 깔려 있었다. 마치  살인마가 등장하기 직전까지 긴장된 상태로 낮게 흘러나오는 저음의 배경음악처럼 말이다. 정작 살인마가 튀어나오지 않아도 관객은 그 긴장감 속에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 생각해보니,  여행을 가기 전에는 몸이 늘 여기저기 아프기도 했고, 심지어는 가서  된통 앓은 적도 많다. 여행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집에 가는 순간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여행가기전에 괜시리 애가 열이 나는 것 같아서 온도계로 체크해보기도 했다. 해외여행은 너무 가고 싶은데 아이가 아플까봐 선뜻 엄두를 못 낸것은 부지기수다. 큰 맘 먹고 밀어부친 사이판 여행 전 날 아이가 고열이 나서 응급실을 들렀다가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서, 비행기를 타는 그 순간까지 이 여행을 물려야하나 계속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이런 한번의 경험은 일반화되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블로거가 직업이다보니 아이 관련 체험 문의가 많이 들어오는 편이다. 어린이 미술관 체험, 어린이 책관련 체험등 꼭 해보고 싶고 너무나 기대하는 체험일 수록 그 전날 무슨 일이 생겨서 취소되는건 아닐까 스트레스가 쌓였다. 실제로 그런일은 두어번밖에 없었다. 결국 가게 될거라는걸 나 자신도 잘 알게 되었다. 다만 기대와 비례하여 높아지는 불안감때문에 제풀에 지쳐 떨어지는 일이 많았다. 

 

아이 친구들과 노는 것도 그랬다. 오늘 바람이 차던데 감기 걸리면 어쩌지, 친구 **이가 기침이 심한던데 쟤한테 옮으면 어쩌지하는 자잘한 걱정들이 노는 내내 따라다녔다.  아이가 친구들과 잘 노는 모습이 너무 좋고 뿌듯했으면서도 그랬다. 그래서 에너지 넘치는 젊은 조리원동기들이 날 잡아서 애들을 놀리자!라고 하면 짜증부터 났다. 하루종일, 애들이 지쳐 떨어져나갈때까지 놀리는 그녀들의 체력은 둘째치고 그 시간동안 내가 스트레스 받으면서 애를 케어해야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내가 단순히 걱정이 많고 예민한 엄마여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아이가 불안의 매개가 된것일뿐 기본적인 불안회로는 늘 축적되어있었다. 


선생님과 첫 상담을 하면서 돌아오는 날, 아이를 가졌을때 느꼈던 극도의 불안감을 설명했다. 아마 직전의 유산과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을 겪으면서 더 심해진것 같다 하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셨다. 불안은 잠재해있다가 결국 어디서건 터질것이었다. 아마 아이도 그 불안감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임신했을때 임신성 당뇨가 와서 식단을 철저히 가려먹어야했고 유산의 공포때문에 대중교통은 아예 이용을 못했다. 그나마 안정기에 들어선 막달에 도서관에서 하는 독서지도사 자격증 과정을 들을때 교실이 2층에 있었는데 사서분에게 부탁해서 늘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녔다. 그때는 아이가 밖으로 나오기만하면 세상 무서울게 없을것만 같았다. 임신은 내게 끔찍한 폭력으로 다가왔다. 모든 사람들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과정이기에 복이 나갈까 두려워 함부로 입밖으로 내어 말할수 없다는 것이 더 공포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를 떠올렸다. 그간 내가 아이를 생각했던것은 지나친 모성애도 아니고 그저 불안의 결과물이었구나. 태중의 아이를 미처 돌볼 시간도 없었고 그저 나오기만을 바랐던 것 조차 아이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가 아니었고 빨리 내몸에서 덜어내고 싶은 마음때문이었구나. 

아이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미안했다. 집에 오자마자 아이의 등을 따뜻하게 쓸어주면서 마음속으로 사죄하고 또 사죄했다. 자식에게 죄책감이 없는 부모가 몇이나 되겠냐만은 초음파를 찍을때마다 얼굴을 가리던 그 연약한 태아가 힘없이 엄마의 공포를 이어받았을것을 생각하니 더욱 이 치료를 빨리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왜 항상 무표정해? 엄마의 햇살미소가 보고 싶어. 


라고 말하던 아이. 


미안해. 아가. 엄마가 노력해고 또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던 것이 있었어.


내 잘못이 아니야. 그렇게 되뇌어 본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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