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치기 전주 기행 上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저녁 늦게 돌아오는 일정으로 전주에 다녀왔다.
수원을 출발한 기차가 전주에 닿기까지는 대략 2시간 반쯤 걸린다. 전주역은 용산에서 출발해 익산을 거쳐 여수까지 가는 전라선 위에 있는데, 당일치기 일정이다 보니 여수까지 가는 남도관광열차를 상하행 모두 이용하게 되었다. 전날 밤 생각보다 늦게 잠들어서 '내려가는 기차에서 자야지'하는 생각으로 출발했는데, 관광열차의 알찬 프로그램(경품 추첨이라든지)과 경쾌한 배경음악 덕분에 내내 깨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건넛자리 아주머니들의 '우리 아들 군대 보낸 얘기'를 엿듣다 보니 어느새 전주역에 도착. 군대 동기들과 '우리 엄마 우쿨렐레 배우는 얘기' 같은 건 안 해봤다는 점을 생각해보니 역시 내리사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주역에서 한옥마을까지는 버스 노선이 많아서 굳이 택시를 이용하지 않아도 쉽게 갈 수 있다.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이런저런 핑계로 맨날 택시 타고 다녔는데, 2800원 기본요금이 아무리 서울보다 저렴하더라도 웬만하면 시내버스를 타는 편이 이롭다. 만약 자신이 너무나 길치라고 생각된다면 셀카봉을 들고 다닌다거나 들뜬 모습으로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보통 커플이나 여성 2~3인조)을 따라가면 그들 중 9할은 한옥마을에 간다.
한옥마을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가장 먼저 전동성당이 보인다. 명동성당은 한 번도 안 가봤지만, 명동성당의 축소판 같다는 얘기가 많다. 전동성당은 전라도 최초의 천주교 순교지이자 최초의 성당인데, 그런 역사는 둘째 치더라도 건물 자체가 예뻐서 인기가 많다. 아직 식사시간이 못 된 관계로 한옥마을부터 슬쩍 둘러보았다. 불과 4~5년 새에 눈에 띄게 모습이 바뀌었다. 바뀌어가는 한옥마을에 대한 (주로 부정적인) 감상과 평가는 긴 얘기가 될 것 같으므로 후편에 적도록 하겠다.
전동성당을 기준으로 한옥마을 반대편으로 향하면 풍남문과 남부시장이다. 이번에 전주를 방문하며 가장 크게 느낀 점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재생에 힘을 많이 썼구나'이다. 전주의 도시 재생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남부시장을 빼놓을 수 없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남부시장은 쇠락해가는 여느 전통시장과 다를 것이 없었다. 쓰러져 가던 남부시장을 다시 일으킨 건 바로 '청년몰'이다.
시장은 단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장이 활기차던 때에는 2층 옥상 공간에도 식당이나 점포가 성업 중이었다. 시장을 찾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자 가장 먼저 문을 닫게 된 것은 접근성이 떨어지는 2층 가게들이었다. 그렇게 남부시장의 2층 공간은 버려지게 되었는데, 이 공간을 전주시와 시민단체는 청년 사업가와 예술가를 위해 활용하기로 마음먹었고 그 결과 '청년몰'이 탄생하였다. 방앗간, 백반집, 죽세공품점, 전통가구점 등 오래된 점포만 가득하던 남부시장이 이제는 저녁밥으로 크림 브륄레(가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한 그릇 하고 후식으로 드립커피 한 잔 딱! 땡긴 다음에 독립영화 한 편 때리는 '힙한' '잇 플레이스'로 거듭난 것이다.
뭐 이렇게만 설명하면 경리단길이라든가 망원동, (이름부터 오그라드는) 샤로수길 등등과 뭐가 다르냐 생각할 수 있겠다. 서울 시내 곳곳의 소위 '핫한 동네'와 남부시장의 가장 큰 차이는 남부시장과 청년몰이 과거를 배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저기 등장한 '힙한 동네'에선 기존에 있던 상권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흐름이 크게 나타난다.
평범하던 동네에 어느 날부턴가 뜬금없이 '인스타 성지'가 등장하고, 외지인의 방문이 늘어나고, 이 틈을 타서 건물주들은 월세를 올리고, 그래서 기존의 동네 가게들은 폐업을 하거나 어디론가 밀려나고, 결국 힙한 가게들도 월세를 감당 못해 밀려나고, 그 자리엔 올리브영이 들어오고... (사회가 무너지고 국가가 무너지고...)
남부시장에 청년몰이 등장하여 유동인구가 늘어난 과정까지는 유사하다. 그러나 청년몰은 어디까지나 남부시장이라는 물리적 틀 안에 존재하며, 지방자치단체의 지원과 기존 상인들과의 집단적인 합의가 그 존재의 대전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대료가 갑자기 높아진다거나 기존 상권이 소외되는 일이 구조적으로 일어나기 힘들다. 오히려 청년몰의 등장은 남부시장 상인들에게 시장의 활성화라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였다.
최근 몇 년간 남부시장에는 이런 변화가 있었지만, 이러쿵저러쿵 주변 사정에 개의치 않고 꾸준히 사랑받는 전설의 맛집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남부시장의 자존심, '조점례 피순대'다. 고등학생 때도 몇 번 갔었는데 소문난 맛집이다 보니 항상 손님이 많고, 그래서 친절함은 기대하기 힘들다. (이번엔 평일 낮이라 사람이 적었는데 여전히 불친절하다.)
하지만 맛 하나는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피순대라는 게 생소할 수도 있겠다. 쉽게 설명하면 순대 속에 돼지 피를 넣어서 고기의 질감이 극대화된 순대다. 식용 비닐에 당면 넣은 분식집 순대도 나름의 맛이지만, 돼지 창자로 만든 정통 순대를 맛보고 싶다면 이 피순대를 추천한다. 통통한 피순대에 새우젓 조금 올리고 초장에 딱! 찍어먹으면 '아 지금까지 먹었던 순대는 순대가 아니었구나' 정도는 아니어도 '존x 맛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원래는 둘, 셋이 가서 각자 순대국밥 한 그릇에 피순대 중자 하나 먹어야 되는데, 이번엔 혼자 간 관계로 순대국밥만 먹고 나왔다. 가격도 7천 원으로 착하니 전주 여행을 간다면 꼭 먹어보자. 예전보다 국밥에 들어가는 순대 개수가 줄어든 건 아쉽다.
그리고 조점례 피순대에서 결제한 영수증을 옆 커피숍에 보여주면 커피 메뉴를 30% 할인해준다.(아이스 아메리카노 2800원) 10cm 노랫말대로 '순댓국 먹고 후식으로 아메리카노' 한 잔 하기 좋은 할인. 시장 한가운데에서 느닷없이 모던한 인테리어를 뽐내는 카페다.
새 것이 주목받고 새 것이 사랑받는 시대에 오래된 것을 지켜가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남부시장은 옛 모습을 지키면서도 새로움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았고, 조점례 피순대는 전통과 자존심을 지키며 오늘도 순댓국을 내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니 인공지능이니 사회가 빠르게 변해가지만, 우리는 10년 뒤에도 여전히 기차여행을 할 것이고 그 기차에 탄 어머니는 아들 딸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를 것이다. (나는 여행 전날엔 꼭 일찍 잘 것이다.) 겉모습은 변해도 우리 속엔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에 그때도 여전히 남부시장을 찾을 것이고 순댓국 한 그릇에 감탄할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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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 곤 : Seunggon LEE
―가늘고 길게 여행과 사진,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든 배우는 사람"이라는 은사님 말씀이 아깝지 않도록 살고 싶습니다.
rupert1128@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