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다는 것 1.
달력을 한 장 넘겨 7월이 되자 날씨도 한 장 넘겨 ‘폭염’이 되었다.
참고 참아왔던 에어컨이건만 이 꿉꿉한 더위 앞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틀었다. 왠지 모를 의문의 1패.
아침 일찍 테라스에 나가도 시원함이라고는 전혀 없지만 꼬박꼬박 나가봐야 한다.
- 밤 사이 안녕들 하셨는지요.
요 근래, 여름에 개화한다는 백합이 다섯 개의 꽃봉오리를 올려둔 상태였다.
깜짝 놀랄 순간을 놓쳐서는 안되니 매일매일 기대감 가득 안고 문안 인사 나간다.
7월의 두번 째 날, 꽃봉오리가 제법 많이 자라 노르스름한 꽃잎의 색이 내비쳤다.
- 조만간 피겠군.
‘테라스 둘러보기 의식’를 마치면 그제야 일상의 하루다.
세수를 하다 문득 거울을 빤히 바라 본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정수리에 희끗희끗 흰 머리카락이 제법 많이 보인다.
조금 덜 보이게 오른쪽 가르마를 타서 머리를 질끈 동여맨다.
오늘은 아들 유치원으로 도서 자원 봉사를 가는 날이라 흰머리가 유난히 눈에 띄는 기분이랄까?
사실 '고잉 그레이‘가 나의 모토라서, 가끔 동네에 회색빛 머리카락을 한 어르신들이 보이면 나의 미래라며 남편을 쿡쿡 찔러 쳐다보게 만든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눈살을 찌푸리며 노인 같아보인다고 싫은 내색을 감추지 않는다.
할머니가 할머니같이 머리가 하얀 게 당연하지 뭘 그렇게 유난이냐 해도 자기는 싫단다.
- 나는 염색 안 하고 우아하게 회색 머리 해야지.
하며 기대를 하곤 하는데 당장 오늘은 좀 시기상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들 유치원에 회색 머리카락으로 등장하면 아이들이 조금 의아해하지 않을까하는 괜한 상상력.
그렇다면 몇 살 정도가 회색 머리카락을 하기 적당한 나이일까?
회색 머리카락은 39금인가, 49금인가, 아니면 59금인가.
일단 아들 유치원은 졸업하고 나서라고 생각을 매듭지어 버린다.
무튼 그런 내적 갈등은 뒤로 하고 이 더위에 화장도 안 할거니 귀걸이라도 해서 ’성의표시‘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출근 때나 하던 진주 귀걸이를 하고 유치원으로 향했다.
유치원 도서 봉사는 도서실에 방문한 어린이들에게 그림책을 몇 권 읽어주고 대출, 반납을 도와주고나면 그 뒤에 '진짜' 봉사활동이 남는다.
그건 바로 책정리.
이게 진짜 핵심이라고 할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고 녹록하지가 않다.
한창 책정리 중인데 오글오글 아이들이 떠들며 도서실 화장실 쪽으로 오는 소리가 났다.
가끔 특별실 수업하던 아이들이 급하면 도서실 화장실을 쓰기도 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쓰윽 쳐다봤는데
- 엄마!
집에서 보던 아들이 여기에 있네!
아들과 친구들 몇 명이 화장실을 쓰려고 왔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귀여워 잠깐 인사 나누고 나는 다시 책정리를 했다.
아이들이 나가면서 하는 말소리가 들렸는데,
- 너희 엄마 좀 예쁘다.
누군가 하는 말이 똑똑히 들렸다.
잠시 후 아들 반 개구쟁이 남자 아이가 누가 봐도 이 ‘친구 엄마 등장’ 사건을 구경하려고 화장실로 쫓아온 게 뻔한 제스처로 나를 찾아와 인사하고 갔다.
아이들에게 ‘예쁘다’는 게 뭘까? 아마 그 아이는 내 흰머리는 못보고 하얀 진주 귀걸이를 눈에 담고는 예쁘다고 말했을거다. 비싯비싯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남은 책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두 번째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4월 27일의 백합. 심은지 12일이 지났을 때.
5월 10일의 백합.앞에 있는 흰 화분은 글라디올러스.같은 날 심었어요.
짠. 5월 15일의 백합. 쑥쑥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잎이 더벅머리 소년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