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자 이야기. 1화 백합

예쁘다는 것 2.

by 다락방지기

‘예쁘다는 것’을 생각하다보니 떠오르는 에피소드 하나.


초등 교사에게 가장 힘든 학년을 꼽으라면 단연코 1학년이다.

이건 매뉴얼이 A부터 Z까지 총망라되어 있어야 하는데 A는 다시 A1,A2...로 A1은 다시 A1-1,A1-2...로.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화장실에 가는 것까지 모든 것을 다 매뉴얼화해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무한 반복되어야 한다.

1년 동안 이걸 친절하게 무한반복 하다보면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는 날이 수도 없다.



선배님들은 내 자식 낳아 키우기 전에 1학년 하지 말라고들 했는데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나.

학교를 옮기자 새 학교에서 남는 자리에 꽂히게 된 이십대의 나는 1학년 담임을 덜컥 맡게 된다.

그 때 나를 측은하고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시던 교감선생님의 눈빛이 아직도 떠오른다.

나의 고생길을 예감하셨구나.

나도 '대체로' 꼼꼼한 편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는데 1학년 담임은 일반 상식 선에서의 ‘꼼꼼하다'는 걸로는 구멍난 그릇으로 물을 퍼담는 격이었다.

매일매일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 아, 이걸 못하는구나. 가르쳐야지.

- 아, 이것도.

- 이것도?

- 아니, 이런 것까지?

열정이 넘치던 때라 그런 1학년을 데리고 참으로 많은 시도를 하고 참으로 많이 망쳤다.



하루는 ‘내가 좋아하는 우리 반 친구’에 대해 이야기 나눌 기회가 생겼다.

여러 친구들이 두루 언급될 수 있게 남학생은 여학생을, 여학생은 남학생을 한 명씩 골라 좋은 점을 찾아보고 발표하는 수업이었다.

잠시 자기 생각을 학습지에 적고 돌아가면서 발표하게 되었는데!


- 저는 현빈이가 좋습니다. 왜냐하면 공부를 잘해요.

- 저는 유리가 좋아요. 왜냐하면 예쁩니다.

- 저는 정우가 좋습니다. 착하게 대해줘서입니다.

- 저는...유리요. 예뻐요.

- 나는 진호가 좋습니다. 왜냐면 발표를 잘해요.

- 저는 유리가 좋습니다. 왜냐하면 예쁩니다.

(이상한 점을 발견하셨나요?)


발표를 하는 중간 너무 의아하고 우스운데 어서 종이 쳐서 이걸 멈춰야겠다는 마음밖에 안 들었다.

다행히 발표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학습지를 거둬서 읽어보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남학생은 참으로 다양하게 나왔다. 이유도 가지가지다.

친절해서, 똑똑해서, 종이접기 잘해서, 내 짝이라서 등등.


그런데 남자 아이들은, 몇 명 제외하고는 모조리 다 우리 반에서 눈에 띄게 예쁜-예쁘게 꾸미고 오는-아이를 적어 냈던 것이다!

몰표였다.

심지어 그 해 우리 반에서 가장 꼬마 신사같던 현빈이 너마저!


1학년 아이들에게 '예쁘다‘는 건 사실 춥파춥스 사탕과도 같은 거다. 어른들의 다양한 취향이 반영되는 그런 아름다움과는 좀 거리가 있다. 아이들이 알고있는 익숙한 도식에 잘 부합하는 것. 눈에 띄는 것. 화려한 것. 색이 감각적인 것. 형태가 도드라진 것. 그게 예쁜 거다.

마흔 넘어도 예쁜 것을 보는 눈이 초등 1학년과 똑같은 '유치한' 우리 집 남자가 떠올랐다.




아들 유치원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 생겼다고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을 열자마자 ‘예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실 창문 너머로 백합 세 송이가 활짝 피어있는 게 보였다.

커스터드 크림색이 섞인 노랗고 큰 백합. 눈에 띄는 암술과 수술. 꽃잎 안 쪽의 적갈색 반점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활짝 피어난 것에 한 번 놀라고, 그간 우리 집 테라스에서는 보지 못했던 엄청난 화려함에 또 놀라고, 근처에 가지 않아도 맡을 수 있는 향기에 또 놀랐다.


뭐랄까 식물한테 압도 당했달까.

길가다 갑자기 연예인을 본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이 현실세계에는 왠지 부조화스러울 정도의 ‘예쁨’.

백합은 사진으로 보거나, 결혼식장이나 행사장에 아름답게 꽂꽂이 되어 있는 걸 봐야 오히려 현실감있게 느껴진다.

-백합님께서 어찌 이리 누추한 곳까지.

저절로 이런 대사가 떠오른다.


예쁘다는 것.

백합의 ‘예쁨’ 앞에서 나는 그저 '유치한' 1학년 남자 아이들같은 마음이 되어 버렸다.


- 저는 백합이 좋아요. 왜냐하면 예쁘기 때문입니다.



(대화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의 이름은 각색한 것입니다.)


KakaoTalk_20250704_121256623_14 (1).jpg
KakaoTalk_20250704_121256623_13.jpg
백합을 심자는 아이디어도 우리 집 초등생이 떠올린 겁니다. 사진보고 예쁘다고 하더군요. 저는 좀...
25.05.25.jpg

5월 25일의 백합. 큰 화분에 심은 플라비아는 키가 좀 더 크고 꽃은 늦게 피려나봅니다.

25.6.27.jpg

6월 27일의 백합. 화분에 심은 젤미라.

25.7.2오전8시반.jpg
25.7.2.오후3시.jpg
7월 2일의 백합. 왼쪽은 오전 8시 오른쪽은 오후 3시. 아들 유치원 다녀온 사이 무슨 일이! 깜짝 놀랄만하죠?
25.7.3.jpg

7월 3일.

KakaoTalk_20250707_140424855.jpg

7월 7일. 플라비아도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쁘다는 건 이런 것.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오늘 자 이야기. 1화 백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