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이에게 보내는 편지
빈 도화지는 자꾸 나를 불러 세우고
나는 그를 만난다.
흰 면에 검은색이 묻는다.
사라졌다, 다시 다른 곳에 머문다.
알록달록한 다른 것들도 번진다.
그것을 바라본다.
아주 정성스럽게.
나의 육이에게(육이 : 다육식물)
미술선생님이 되리라 다짐한 그날, 나는 미술임용 재수생이었다. 초수시험에서 과락이란 결과를 마주한 뒤였다.
조용한 여백의 시간.
쭈그려 앉아 찬찬히 내가 키우는 육이를 바라본다. 데려온 지 9년이 흐른 육이는 참 많이 변했다. 고작 내 엄지손톱만한 크기의 너는 위로 쭉 뻗었다가, 옆으로 기울었다가, 지금은 키를 줄여 동그랗게 통통해진 모양새다. 내가 본 너는 여전히 육이지만, 오랜만에 본 이들은 아마 다른 것이라 생각하겠지.
너를 보고 있는 나는 왜 그것을 하려 했을까.
‘빈 도화지 같아서 ‘
너는 내게 대답한다.
만날 수 있는 것들은 다 빈 도화지 같다. 그것은 그림 그리는 이에게 두근대는 호기심과 같다.
빈 도화지를 좋아했다.
네모난 것도, 동그란 것도, 찢어진 모양도 모두 다.
한 반에 삼십 장, 전체는 몇 백장. 펼쳐질 것들을 머릿속으로 곰곰이 그려보았다. 마음이 꽤나 설레었다.
육이를 처음 데려온 날, 미묘하게 더 말랑하고 투명했던 연두색 잎을 마주했다. 어릴 적 아끼던 잡초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크기는 훨씬 작았다. 작지만 멋진 네모난 집도 가지고 있었다. 반만 묻은 갈색 유약이 밑으로 유유히 떨어진 화분이었다.
나는 너를 소중히 돌보았다.
가끔 다가가 들여다보고, 겉이 말라 보이면 물을 듬뿍 주었다. 물이 통통하게 차있을 땐 살짝 쓰다듬고 뒤돌았다. 햇빛 쬐는 널 기분 좋은 웃음으로 바라보다가, 너무 뜨거워 보이면 그늘로 슬쩍 옮겨주었다. 흙이 많이 내려앉으면 다른 자갈과 흙을 섞어 덮어주었다. 그렇게 너를 9년 동안 정성스레 돌보았다.
빈 도화지였던 육이는 9년을 가득 채웠다. 나와 함께 그림을 그렸다. 더 이상 비어있지 않은 육이가 건넨 말에, 또다시 빈 도화지를 기다렸다.
그들을 만나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나는 기대하고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