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lin Artbook Fair - 2024 Miss Read 후기
베를린에 다녀왔다. 10월 11일부터 13일 3일간 베를린 문화의 집(Haus der Kulturen der Welt, 이하 HKW)에서 열린 The Berlin Art Book Fair & Festival: Miss Read(이하 Miss Read) 참가를 위해서다. Miss Read는 탈식민화를 지향하며, 예술적, 정치적 실천으로서 예술가의 책을 소개하고 대화를 장을 제공하고자 2009년 시작된 아트북 페어다. Miss Read는 전 세계의 다양한 목소리를 포용하며 창의적인 출판 생태계의 지평을 넓히는 데 힘써 왔다. 올해는 아프리카 페미니스트와 퀴어 운동가들의 계보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50개국에서 온 340개 이상의 참여부스에서 수백 종의 책을 소개했다. 나는 <우정의 언어 예술>을 출간한 소장각 출판사와 함께 책에 실린 <벌새가 말했어> 아트북을 선보였다.
소장각 출판사는 "out of sight", "originality", "beautiful format"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디자인, 환경에 관련된 책을 주로 출판한다. 이번 Miss Read에서 소장각이 중점적으로 소개한 책들은 말레이시아와 태국 등 동남아시아 시각 문화에 관련된 것들이었지만, 나는 <우정의 언어 예술>에 대한 유럽인들의 시각을 엿보고 싶어 동행했다.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는 페어 첫날, HKW가 위치한 Tiergarten(티어가르텐)으로 향했다. 나와 소장각 소장님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HKW 행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가 지도와 달리 운행해 영문도 모른 채 되돌아가기를 두세 번 반복했다. 시작 전부터 지쳐 티어가르텐 초입에 내려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우리처럼 큰 짐을 들고 가는 무리 중 한 사람이 다가왔다. 공교롭게도 당일 외교행사로 진입로가 막혀서 한참 걸어 들어가야 한다며 우리를 행사장으로 안내해주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도착한 페어였다. 그런데, 고생과 기대가 무색하게 페어 첫 날 <우정의 언어 예술>은 한 권도 팔리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적잖이 놀랐다. 찾아온 손님들도 많았고, 호의적인 태도로 질문을 주고받았던 사람들도 많았다. 게다가 부스도 메인 층 중앙에 위치했기에 접근성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유가 궁금했다.
몇몇 부스에 방문해 이야기를 나눠보니 Miss Read는 다른 페어에 비해 판매율은 낮은 편이나, 깊이 있는 독자와 대화가 가능한 것이 특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 첫날을 되짚어보니 사람들의 관람 태도와 소비 성향이 보였다. 부스에 찾아온 이들은 소비에 굉장히 신중했다. 부스 전체를 둘러보고, 그중 마음에 드는 한 두 권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리고 셀러에게 '책을 만든 이유'나 '디자인의 의도', '주제를 선정한 계기' 등 책의 본질적인 부분을 질문했다. 정말 마음에 들 경우, 사진을 찍은 후 '생각해 보고 다시 오겠다.'라고 했다. 그제야 이 페어는 Festival 성격이 강하다는 걸 이해했다. 책을 소비하기보다 진중하게 감상하고, 저자 또는 출판사와 대화를 나누는 데 공들이는 나눔의 장인 것이다. 그래서 다음 날은 찾아오는 이들의 신중한 감상 태도와 질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둘째 날은 토요일이라 첫날보다 붐볐다. 소장각 부스에는 형태가 다양한 책이 많아 손님들은 형태의 의미를 많이 물어봤다. 그런데 한 손님이 <우정의 언어 예술>을 보며 책을 관통하는 콘셉트를 물어왔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하는 우정은 어떤 의미인가요?
깊이 있는 질문이 신선했다. 한국에서 경험했던 다양한 형태의 독자와의 만남에서도 잘 들어보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마음 속 깊이 생각해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 책은 예술교육실천가로서 저의 생태전환의 여정을 그린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쓰며 자연과 인간이 맺는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새롭게 맺는 관계의 지향점을 우정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손님은 내 답변을 듣고 진중하게 책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각 장은 손님의 관심의 무게에 따라 느리게 또는 빠르게 넘어갔다. 내 책의 핵심인 우정의 의미를 듣고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구매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손님이 던진 질문의 잔향이 마음에 남았다. 그 후로는 부스를 찾아오는 이들의 몸짓을 관찰했다. 책을 읽는 동안에 느려지는 손짓과 집중하는 미간, 한 장을 넘기며 번갈아 짚는 짝다리... 사려 깊은 독자들의 손을 카메라에 담으며 그들 내면에 퍼질 고요한 역동을 상상했다. 이렇게 나의 사유가 담긴 책 앞에서 공명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책을 보며 사람들이 웃는 모습, 내가 표현한 의도에 놀라고 감탄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뿌듯했다.
몇몇 어린이 손님은 <벌새가 말했어> 아트북에 관심을 보였다. 자매인지 똑 닮은 아이 둘이 와서 아트북을 만지작 거렸다. 들고 봐도 된다고 하니 쑥스럽게 웃으며 펼쳐보았다. 고맙다는 눈인사를 하며 활짝 웃고는 한참을 서서 읽고 갔다. 그다음 아빠 손을 잡고 부스를 찾은 어린이의 눈길은 명함으로 향했다. 페어를 위해 <벌새가 말했어> 아트북 일부 장면을 실크 스크린 작품으로 만들었는데, 그때 나온 파지 뒷면에 도장을 찍어 명함을 제작했다. 아이들은 바로 그 명함을 또 다른 작품으로 여긴 것 같았다. '가져가도 괜찮아.'라는 눈길을 건네었더니, 기뻐하며 한 장을 집었다.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는 한 독일 손님은 어떤 계기로 <벌새가 말했어> 아트북을 만들게 되었는지 물었다. 이에 아트북 창작에 영감이 된 케냐의 환경운동가 왕가리 마타이의 벌새 우화를 소개하자 꼭 찾아보겠다며 눈을 빛냈다.
별다른 판매 없이 손님들의 움직임만 관찰하다 끝날 것 같았던 둘째 날 막바지에 <벌새가 말했어> 아트북을 구매한 독자들이 있었다. 구매자들은 그림과 형태를 요리조리 훑어보더니 말없이 사겠다고 했다. 내 생각과 의중이 담긴 책을 소장하려는 진심 어린 관심과 애정을 선명히 느꼈다.
페어 마지막 날, 드디어 <우정의 언어 예술>을 구매하겠다는 반가운 독자들을 만났다. 디자인과 기간시설(Infrastructure)을 공부하는 학생들이었다. 한 독자는 박사과정 연구에 참고하기 위해 책을 산다고 했다. 어쩐지 <우정의 언어 예술>이 학술적인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설렜다. 또 다른 독자는 베를린 시민들의 환경 감수성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급진적인 환경 정책을 내는 정치인과 그 정책을 잘 따르는 베를린 시민들의 합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분위기에 자신도 영향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시민들은 예술을 매개로 환경 운동을 하는 급진적인 시민 단체들에게도 저항감을 느끼기보다, 중요 어젠다를 사회로 확장하는 이들의 움직임에 지지를 보내는 경향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는 페어 전 베를린 시내를 관광하며 느낀 바와도 연결된다. 페어가 시작되기 며칠 전 베를린 시내의 작은 고서점에 들러 독일 옛 서적을 뒤적거리다 서점 주인에게 베를린 맛집 추천을 부탁했다. "어제 부어스트(Wurst, 독일식 소시지)와 슈바인스학세(Schweinshaxe, 독일식 돼지족발)는 먹었는데, 그 외에는 뭐가 있어요?"라고 말하자 눈이 커지며 "슈바인스학세를 먹었어요?"라고 말했다. 독일을 대표한다고 알려진 요리를 먹은 것인데, 오히려 놀란 그의 반응에 되물으니 "요즘 베를린 청년들은 육고기를 잘 먹지 않는 편이어서요."라고 답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베를린 시내에는 작은 식당에서도 다양한 비건 메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부어스트 가게에도 비건 소시지와 소스를 선택할 수 있었고, 동네 마트에서는 비건 치즈, 꿀, 요거트 등을 다채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일상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먹거리를 선택할 때에도 생태전환을 고려한 다양한 선택이 가능할 만큼 진보가 보였다. 진보란 더 이상 주장해 온 내용이 특별하지 않음을 의미하니까.
베를린에서의 크고 작은 만남은 <우정의 언어 예술>을 갈무리하며 던진 다음 질문의 실마리처럼 느껴졌다. '생태전환에 대한 대화가 임계점에 달하면 일상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새로운 질문이 꼬리를 문다. '독일의 생태전환의 역사, 즉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는 과정에서 교육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식품군을 다각화하기 위해 어떤 투쟁과 노력이 있었을까?, 현재 독일 예술계는 어떤 생태 이슈를 이야기하고 있을까?, 우리나라의 소비문화를 생태적으로 전환할 방법은 무엇일까?' 등... 책을 예술 작품처럼 대하는페어 방문객의 몸짓과 태도에서 저자에 대한 존중을 경험하기도 했다. 진심어린 관심과 존중에 힘입어 나는 이제 다음 질문으로 나아간다. (계속)
<우정의 언어 예술> 출간을 위해 힘써주신 출판사 소장각에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C) 2024. Yunji Gong. All Rights Reserved.
본 연재물은 저자 공윤지의 지적재산이므로, 무단 배포 및 전재를 금합니다.
Notice
본 연재는 탐구자의 시선으로 저자가 사유한 내용을 에세이 형태로 기술합니다. 다양한 공공기관 및 주최기관의 지원으로 진행된 프로젝트의 경우 관련 사업명과 기여도를 밝히고 공공에 공유된 자료를 중심으로 구성할 예정입니다. 각 교육에서 만난 참여자의 개인정보는 배제합니다. 교육 운영을 위해 저자가 개발한 다양한 교수법 및 구체적인 교육 방법론이 소개되므로 해당 내용을 활용할 경우 사전 협의 후 인용 문구를 기재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인용문구 예시 공윤지, 브런치북 - 예술로 맺은 우정, 02. 내가 사는 땅은 무슨 색일까?, 2024(링크: https://brunch.co.kr/@gong-yunji/33)
문의처 hello@yamjiyamj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