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다 - 지구색 물감 클레이 컬러칩 워크숍
십 대부터 미술을 공부하며 수많은 물감, 색연필, 색종이, 잉크 등의 재료를 쓰고, 또 버렸다. 작업실에서 만나는 동료나 학생과 창작 후 쓰레기 더미를 만드는 일은 나의 일상의 한 부분이었고, 안료가 섞인 물을 모아 버리는 일 또한 특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이들과 수업을 하며 마음을 괴롭히는 질문이 생겼다. "이 물을 버리면 다 어디로 가는가?"였다. 천연안료에 대한 관심은 이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질문에 답을 찾으려 여행지 마다 천연 안료 워크숍을 찾았다. 한국에서는 민화에 쓰는 봉채와 분채로 내 물감을 만들고, 북극에서는 바닷가에 앉아 한참을 다채로운 색의 돌멩이를 모아 문질러보며 놀았다. 여러 차례의 놀이와 탐구로 '지구의 색이 물감이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탐구틔 여정을 나누기 위해 기후위기에 대안이 될 채색 도구에 관심이 있거나 동네 산책 중에 지구를 생각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분들과 세 번에 걸쳐 만났다.
우리는 어떤 색깔 땅에 살고 있을까?
매일 출근하는 동네에 핀 꽃들을 관찰해 보신 적이 있나요? 여행지의 희귀한 나뭇잎과 동물들이 살아가는 흙의 색깔은요?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땅을 딛고 삽니다. 물론 도시의 땅은 대체로 아 아스팔트로 덮여있지만, 그 아래에는 여전히 생명을 틔우기 위해 부지런히 유기물을 합성하고, 빗물을 빨아들이며 일하는 흙이 있지요. '지구색 물감 - 클레이 컬러칩 워크숍'은 현재 거주하는 지역을 산책하며 만나는 흙, 풀, 물, 꽃 등을 관찰하며 내가 사는 지구의 한 면을 ‘색’으로 숙고하는 시간입니다.
1차시(Online, 100분): OT 및 지구색 물감 여정 공유
2차시(Online, 100분): 우리 동네 색깔 탐구(꽃잎, 나뭇잎, 흙 등)
3차시(Offline, 180분): 우리 동네 흙으로 지구색 물감 만들기(실습)
우리의 첫 만남은 온라인에서였다. 온라인에서 첫 만남을 하는 만큼 특별한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고민 끝에 '현재 머문 공간의 색을 주제로 인사를 나눠보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각기 다른 공간에 앉아 주변에 어떤 색이 보이는지 관찰한 느낌을 공유하며 인사를 나눴다. 여행 중에 발견한 작은 카페에 앉아 문득 자신이 좋아하는 색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했다는 분의 인사가 기억에 남는다. 낯선 미지의 문 앞에 선 심정으로 수업에 오신 분도 계셨다. 다채로운 인사를 나눈 후, 자연의 색을 탐구해 온 나의 여정을 공유했다.
나의 지구색 물감 탐구의 첫 여정은 태국의 천연물감 아티스트 Sand Suwanya와의 만남이었다. Sand에게는 돌과 흙, 식물을 말려 빻은 가루에 산화철과 칼슘 등을 조합하면 명도에 차이가 생긴다는 걸 배웠다. 국제 종자 저장고가 있는 지구 최북단의 도시 스발바르에서는 빛의 힘을 배웠다. '백야(白夜, White Night)' 시기에 방문해 빛의 고도에 따라 하늘과 돌, 빙하 등의 채도가 변하는 모습이 극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런던의 윌리엄 모리스 갤러리에서는 모리스가 아르누보식 식물 패턴을 그릴 인디고(Indigo) 색깔을 만들기 위해 쪽풀 연구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쪽풀로 색을 내는 과정이 궁금했는데, 이듬해 라오스의 OCK POP TOK 염색 수업에서 쪽풀을 뜯어 직접 만드는 과정을 경험하며 궁금증을 해소했다. 특히, 쪽풀을 한소끔 끓인 후 항아리에 두고 묵은지처럼 오래 묵힐수록 짙은 쪽빛이 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호기심을 따라 몸으로 직접 익힌 경험을 나누어서 그런지, 스크린 너머로도 수강하신 분들의 반짝이는 표정이 보였다. 자연에서 색이 만들어지는 다양한 방식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황홀함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어 기뻤다.
기쁜 마음으로 다음 수업을 준비하며 수강생들께 풀과 흙의 색을 담은 도트 팔레트를 만들어 보냈다. 온라인으로는 다 나눌 수 없는 지구색 물감의 발색과 발림성, 질감과 냄새 등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물감뿐 아니라 포장도 지구에 해롭지 않도록 안 쓰는 쇼핑백을 재활용해 재봉하는 방식으로 도트 팔레트를 만들었다. 정성껏 식탁을 차리듯, 손수 물감을 만들어 지구색의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어 행복했다.
두 번째 만남은 온라인 산책이었다. 일전에 인도네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친구들과 시도했던 걷기 교육을 응용한 수업이었다. Zoom으로 연결된 열두 명이 각자 집 근처 산책로로 나갔다. 자녀와 동행해 근처 산을 오르거나, 마당을 거닐기도 하고, 자주 가던 시내 천변을 걸었다. 평소 혼자 걷던 산책길에 서로를 초대하니, 마치 마음 맞는 친구와 수다 떠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산책길에서 지구색을 탐색하기 위해 꽃과 풀잎을 짓이겨 색을 내는 활동을 했다. 각자가 머문 곳에서 꽃과 돌, 흙을 시간을 들여 관찰하며 고유의 색과 모양을 탐색했다. 몇몇 분들은 다채로운 색을 띠는 돌과 열매, 나뭇가지를 주워 나름의 모양을 만들었다. 자연미술작가처럼, 또는 아이처럼 각자 동네의 숲과 강가, 마당과 냇가에서 자연과 놀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수업을 위해 개설한 SNS에는 다채로운 사진이 올라왔다. 다들 서로가 만든 자연미술 작품에 감탄하고, 칭찬을 공유하며 새로운 경험에 대한 회고를 한동안 이어갔다. '색'이라는 주제로 되짚어본 동네 산책길은 색다른 아름다움을 뽐냈다. 모두 우리 일상에 이렇게 다채로운 지구색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다시금 일상 속 생태계와의 연결감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세 번째 회차에는 드디어 넓고 환한 스튜디오에서 대면했다. 물감을 만들기에 앞서 요리에 사용했을 법한 채반이나 아이들의 약을 먹일 때 썼을 스포이트, 병원에서 봤던 주사기, 봉숭아물들이기에 썼던 명반 등이 책상에 놓였다. 넓은 유리판과 그 위에 놓인 크고 작은 글라스 뮬러는 우리가 물감을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익숙한 도구들과 새로운 도구들이 서로 조합된 책상 위로 저마다 지난 온라인 산책 말미에 수집한 두 가지 색의 흙을 꺼내 올렸다. 누군가는 조금 붉은 흙을 가져왔고, 또 다른 누군가의 흙은 짙은 고동색이었다. 모두 '흙'이라 부르는 물질은 각자가 발견한 장소, 시간, 사연에 따라 다른 서사가 응축된 낭만적인 재료였다. 흙을 여러 번 채반에 걸러 할 수 있는 한 가장 고운 상태로 변신시켰다. 흙먼지로 콜록 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마스크를 챙겨주고 안부를 묻는 정이 오갔다. 곱게 걸러진 흙을 유리 판 위에 덜고 그 위에 고무나무 수액과 명반 녹인 물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흙과 액체들을 스페츌러로 착착 섞고 그 위로 반짝이는 글라스 뮬러를 얹어 돌리기 시작했다. 유리판 위 글라스 뮬러는 흙 알갱이 하나하나에 액체가 고루 묻도록 압착된 채로 원을 그렸다. 일정 시간 후 챡! 소리를 내며 떨어진 뮬러 바닥에는 어느새 프렉탈 나뭇가지 같은 모양의 물감이 묻어났다. 흙이 물감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느끼는 촉각, 시각 경험에 호기심이 묻어났다.
그렇게 만들어진 물감을 천연 펄프로 만든 종이에 칠하고, 이름을 정했다. 색의 이름은 각자의 흙에 대한 경험과 추억을 반영했다. '엄마 밭 흙 색, 우리 집 뒷마당 색, 어쩌다 만난 흙색, 때죽나무 아래 뿌리 곁색' 등 서정적인 이름의 흙 색이 열두 개 모였다. 뒷 면에는 각 색깔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모두 각 사람의 클레이 컬러칩에 담긴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화이트보드에 지도를 그리고 모두의 클레이 컬러칩을 붙였다. 각자의 지역에서 우연히 발견한 흙의 다채로운 색상이 지도 위에 펼쳐지자 이것이 지구색 물감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와닿았다. 산책길을 거닐며 색과 형태를 감상하고, 자연미술작품과 클레이 컬러칩 창작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지구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체득했다. 수강하신 분들은 '온라인으로 따로 또 함께한 산책과 지구색 물감을 찾아 칠했던 경험'이 특별했고, '시간을 두고 자연 앞에 멈추는 것의 힘'을 알 수 있었다는 후기를 남겨주셨다. 그리고 식물과 흙의 색을 탐색하는 방법을 통해 아이들과 색다른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물감을 '문방구에서 사는 물건'으로만 여기는 것은 마치 호박밭을 본 적 없는 아이가 '호박은 마트에서 열려요!'라고 답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지구색 물감 - 클레이 컬러칩 워크숍에서 우리는 자연에서 얻은 원료를 미술 재료로 가공하는 기술을 배우며 '물질의 순환'을 이해했다. 산업화로 블라인드 처리되었던 삶의 일부를 감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가지 물건의 생산과 소비의 과정을 아는 힘은 또 다른 곳에도 적용할 수 있다. 쓰레기 문제나 에너지 순환과 관련된 주제와도 통합할 수 있다.
강의를 운영하며 저마다 미세하게 다른 흙의 색이 너무 아름다워서 놀랐다. 이토록 다채로운 지구색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클레이 컬러칩으로 지도를 다시 그리는 과정은 더 놀라웠다. 마치 '지구가 색이 되고, 색깔들이 지구를 재구성'하는 것 같았다. 호기심을 나누며 시작한 워크숍 첫날보다 나는 훨씬 더 큰 상상력을 갖게 되었다. 나는 지구 곳곳의 색으로 지구를 다시 그리는 지구색 물감 - 클레이 컬러칩 글로벌 프로젝트를 꿈꾸고 있다. 그리고 다음 질문으로 나아간다. 문화예술교육으로 생태적인 아름다움을 경험하며 체득한 순환의 감각은 일상의 어떤 부분을 생태적으로 전환하는 기술로 응용될 수 있을까? (계속)
틈을 내는 사유와 실천 짓;다의 적극적인 강좌 기획 및 운영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실험적인 상상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강좌에 참여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주신 수강생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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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구 예시 공윤지, 브런치북 - 예술로 맺은 우정, 02. 내가 사는 땅은 무슨 색일까?, 2024(링크: https://brunch.co.kr/@gong-yunji/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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