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을 위한 안녕.
발령을 받고 처음으로 '마음'으로 출근하는 날이었다.
소문에 비해 생각보다 작은 외형에 실망할 뻔했지만, 건물에 들어서니 역시는 역시였다. 위로 20층이 솟아 있지만 아래로는 30층이 더 있었다.
정신없이 열고 닫히는 수십대의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곧장 안내데스크로 향한다.
"안녕하세요. 오늘 첫 출근인데요. '인간관계 장례식장'은 몇 층인가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그분은 내 얼굴을 한번 힐끗 보더니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지하 30층 정도겠거니 싶어,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급히 잡았지만 그는 그냥 지나쳤다.
"이쪽입니다. 이 건물이 지금은 총 50층 정도인데, 계속해서 위아래로 증축하고 있어서 정확히 몇 층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또 층마다 얼마나 넓은지... 잘못하면 길 잃습니다. 허허. 그런데 그쪽은 출근지가 1층이라 다행이겠어요. 이리로 따라오세요."
그의 뒤를 따르니 곧 비상구 같이 보이는 쪽문과 작은 현판이 보였다.
'인간관계 장례식장'
나의 첫 직장이다.
문에 들어서자 누군가 날 향해 다가왔다. 그는 나의 직속 선배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후임을 처음 맞는다는 그는 해맑게 웃다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죠?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면, 그 관계를 정리하는 곳이에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울지 말고, 절차대로 해야 한다는 것 명심하세요."
‘어떤 상황? 울지 말고?‘ 놓으려 했던 긴장의 끈을 다시 고쳐 잡는다.
내 첫 업무는 '영정 사진실'에서 주어졌다. 오늘 마침 한 건이 접수됐다고 했다.
사망 관계 : 오랜 친구 '김오랜'
사망 원인 : 잦아든 대화, 서로의 근황 모름
"영정 사진으로 쓸 것 하나 골라봐요!"
'김오랜' 이름이 적힌 기억 상자 속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첫 장부터 눈에 띄었다.
3년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카페에서의 장면이다.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듯 보이지만 둘의 눈빛이 어긋나 있었다.
그래도 가장 최근의 모습이 헤어지기 좋겠다 싶어 고르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 돌아온다.
선배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혼잣말을 하더니 깊숙한 곳에서 사진 한 장을 끄집어냈다.
"이미 눈빛은 기억 속에서 사라졌지만, 이 웃음이 가장 오래 남아야지..."
초등학교 교실을 배경으로 짝꿍이었던 그녀와 긴 책상에 앉아 서로 마주 보고 웃고 있는, 흑백에 가까운 사진이었다.
맞다. 저런 시절이 있었다. 계속 간직하고 추억하면 안 되는 걸까? 왜 끝내야 하는 걸까?
선배는 그것을 액자 속에 넣더니 반짝이게 닦아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고, 심지어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메인홀은 생각보다 밝았다. 선배에게 넘겨받은 사진을 자리에 올리니 사회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김오랜씨와의 관계가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잦아든 대화와 무뎌진 궁금함입니다. 아쉽게도 이 관계는 오늘 여기서 작별을 고합니다. 다음 여정에선 SNS에서 '좋아요'라도 서로 주고받길…"
뒤이어 조향사가 다가와 향을 올려야 할 것 같은 곳에 국화꽃 모양 스틱을 꽂았다. 곧 낡은 책상과 연필가루 냄새가 퍼졌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서 맡았던 교실 냄새다. 책상에 햇살이 내리쬐면 이 냄새가 났었다.
"이 향이 지속되는 사흘동안, 기억에서 잊혀갈 관계를 충분히 애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꿈’이 와주려나… 마지막으로 꿈속에서 인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이번에도 선배는 슬쩍 웃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사진 속 그녀는 초등학교에서 만난 친구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가끔 만났고, 유지하고 싶어 애썼던 관계였다.
그러나 3년 전 마지막 메시지 이후, 다시 연락하지 못했다.
'건강 잘 챙기고, 조만간 또 보자!'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이제는 미안함도, 아쉬움도 없었다. 무섭게도, 잠시 잊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의 매정함에 화가 난다. 이렇게 사람과의 관계를 쉽게 잊는다고? 말도 안 된다.
그 순간 커피 코너의 '마음 위로 매니저'가 다가와 머그컵을 건넸다.
"기분이 묘하죠? 하지만 이곳은 끝내는 곳이 아니라 정리하는 곳이에요. 언제든 관계는 다시 시작될 수 있답니다."
커피 향이 퍼진다. 그제야 알았다. 이 장례는 잊기 위한 게 아니라, 아름답게 기억하기 위한 의식이었다.
창 밖에는 허리까지 자란 풀들이 무성한 들판이 보였다. 선배가 입을 열었다.
"저것들이 뭔지 알아요? 마음에 들어오지 못해서 장례조차 없이 묻힌 관계들이에요. 그런데, 저것들 조차 나름의 의미가 있어요. 가끔 들꽃이 피어 기억의 저장소로 옮겨가기도 하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을 이었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도 절대 이곳에 오지 못하죠. 지하 30층에서 올라오려면 한참 걸리거든요. 여기에 왔다는 건, 후회 없이 충분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기쁘게 잘 보내줘야 해요."
사실 이런 날이 오리란 걸 알고 있었다. 감정 문제가 아니다. 시간이 그렇게 만든 것뿐이다.
앞으로도 아는 얼굴들이 이곳에 들어올 것이다.
나는 그때마다 웃으며 이별을 치러줄 것이다. 끝이 아닌 다음을 위한 작별로.
“안녕, 오랜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