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나와 티타임

대추차 그녀

by 공담소

잠에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니 어느 오래된 다방에 앉아 있다. 천장에는 누렇게 바랜 갓등이 낮게 드리워져 있고, 테이블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수증기처럼 흩어졌다. 잔이 부딪히는 소리, 가벼운 웃음소리가 겹겹이 쌓여 공기를 채웠다. 꿈인가 보다.


머리를 매만져 보니 미용실에 다녀온 듯 단정했고, 베이지색 재킷이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차분한 색감과 매끈한 결이 마음에 든다. 테이블 위에는 두꺼운 자기 찻잔에 담긴 대추차가 놓여 있었다. 내 앞이 아니라 건너편 자리였다. 누가 오려는 걸까. 나도 음료를 하나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손을 들자, 멀리서 한 청년이 바라본다. 그녀는 이미 내가 시키려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는 음료를 내 앞에 내려놓고는 싱긋 웃는다. 어라? 어디서 본 얼굴이다.


"안녕하세요. 놀라셨죠? 저는 10년 전 당신이랍니다. 제가 이곳으로 모셨어요!"

벙쪄 있으니 그녀가 말을 이어간다.

"저 근데... 선생님, 지금 나이가 서른다섯 살... 맞으시죠?"

선생님이랜다.

"음... 맞아, 맞아요."

당황했지만 이내 그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사회인으로 첫 발을 내딛고 있었고, 인사동 찻집을 누비며 대추차뿐 아니라 곶감 띄운 수정과나 이슬차에 심취해 있었다. 맛도 맛이지만 차가 주는 고즈넉함을 추구한다나.. 그런 멋에 빠져있었다.


그녀는 꿈에서 찻집을 발견하자마자 들어왔다고 했다. 카페 주인이 '10년 전 자신'과 '10년 후 자신' 중 누구와 만나고 싶은지 선택하라고 했단다. 대화 시간은 30분. 미래의 사람만 그 시간을 기억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왜 날 선택했어요? 그럼 본인은 기억도 못할 텐데?"

잘못 고른 것 같아 다그치자, 그녀가 웃었다.

"열다섯짜리 애는 절 봐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지나온 시간은... 솔직히 궁금하지 않아서요. 아시죠? 저 후회 잘 안 하잖아요. 순간이라도 미래의 나를 잠깐 아는 게 재밌으니까요. 꿈이잖아요. 꿈!"


꿈이라면서 호구조사를 철저히 하는 그녀다. 20분 넘게 쉬지 않고 질문을 던진다. 부모님은 건강하신지, 결혼은 했는지, 언제 누구랑 했는지, 아이는 몇인지, 직장은 어딜 다니고 있는지. 나는 웃으며 대답을 해주었다. 문득문득 그녀에게 닥칠 시련들도 떠오른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그리고 선배로서의 조언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여행 많이 다니고, 운동 규칙적으로 하고, 어차피 지금 남자친구가 남편이니까 좋은 추억 많이 쌓고...'

미래를 경험하고 있을 그녀에게 AI에 대해서도 설명해주고 싶지만, 그녀가 모르는 것을 설명할 시간은 없다. 궁금해하는 것에 답변해 주는 것으로 최선을 다한다.


남은 1분, 마지막 질문인 듯 호흡을 가다듬는다.

"요즘 마음은 어떠세요?"

그녀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난 이제 막 인생 2막에 들어섰다. 1살과 4살 아이의 우주가 되어 살아내야 했고, 그 속에서 본연의 나도 지켜야 했다. 바빴고, 그래서 모르겠다. 그런데 너의 마음은 안다. 불안할 때면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면서, ‘저 사람도 그렇겠지’ 하며 마음의 안녕을 묻곤 했었다. 스물다섯의 나는 직장 하나, 친구 하나, 말 한마디가 다 스트레스였다. 뭐가 그렇게 신경 쓸게 많고 복잡했는지 불안한 것 투성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무겁고, 불안하고, 두려운 것도 있지만 결코 그것들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걸 그냥 평안이라 하기로 했다. 너에게 그 평안을 선물하기로 한다.

“평안해요. 다 좋아요.”


그녀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의자 등받이에 툭 기대어 천장을 본다. 귀로 들은 10년간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듯하다.

"후… 저 잘 살고 있었네요!"

그리 내세울 것 없는 삶이다. 그걸 듣고 잘 살았다고 말해주었다. 잘 살고 있단다. 그런가 보다. 나는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정말 마지막이라며 인사를 전한다.

"멋지세요."

스물다섯의 내가 문밖으로 나가며 손을 흔든다. 문이 닫히자, 다시 시끌벅적한 소리가 돌아왔다. 왠지 모를 눈물이 볼을 타고 내린다.


'똑똑'

누군가 테이블을 두드리더니 조용히 계산서를 내려놓는다.

10년 전 자신 vs. 10년 후 자신
누구를 만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