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전국적으로 전기가 끊긴다면...
'피육-' 하는 소리와 함께 처음 전기가 나갔을 때는 별일 아니라고 여겼다. 순간적으로 사용 전력량이 많아서 전기가 차단되었으리라고만 생각하고, 두꺼비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스위치가 모두 위쪽을 향해 잘 올려져 있다. 이상하다. '사용 제한 구역' 휴대전화도 말썽이다. 금세 창문 밖에서도, 현관 바깥쪽도 어수선했다. 우리도 밖으로 나가보았다. 모든 집의 전기가 나간 듯했다. 그리고 잠시 뒤 민방위 훈련 때야 들리던 사이렌 소리 비슷한 것이 들렸다.
"뭐야! 전쟁난 거 아니야?"
누군가 외친 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직 어린이집에 있는 첫째 얼굴이 떠올랐다. 어디선가 웅웅 윙윙 거리는 확성기 소리가 나지만 우리 집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기긴 했나 보다. 하지만 티비 뉴스도, 인터넷 기사도 볼 수 없다.
"어? 라디오!"
티비 선반 한쪽에 놓인 라디오가 생각났다. 한 때 클래식을 틀어놓겠다며 장만해 둔 녀석인데, 아들 장난감이 된 지 오래였다. 이제 제 기능을 할 차례다. 안테나를 뽑고, AM, FM 할 것 없이 주파수를 돌려 뭐라도 들리는 채널을 맞추었다.
"치-직- 치-직-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전국적으로 발생한 단순 정전 사태로, 국가적 테러나 전쟁 상황이 아니라는 점..."
모든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일단 전쟁이 아니라는 말에 안심했다.
"전쟁, 테러 아니래요! 전국적인 정전이고, 원인을 찾고 있대요!"
이웃들에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창문밖으로, 현관문 밖으로 소식을 전파했다.
오후 2시, 구름이 좀 꼈지만 아직 밝다. 우리 부부는 함께 육아기를 보내고 있어 함께 집에서 정전을 맞았다. 어쩌면 가장 좋은 조건이다. 운이 좋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혹시 오래갈지도 모를 정전을 대비해야 했다. 남편은 불빛이 될만한 물건들은 모았다. 라이터, 랜턴, 향초 같은 것들이 모여졌다. 나는 찬장을 열어 음식이 될만한 걸 확인하고는, 집에 있는 통이란 모든 통에 물을 담기 시작했다. 곧 물이 끊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집 밖으로 향했다.
"여보, 건우 데려올게."
마음이 급하다. 아무 일 아니래지만 아이를 빨리 데려와야만 할 것 같다. 건물 밖을 나서니 사람들이 여기저기 나와 '카더라'를 주고받고 있었다. 지나치는 편의점마다 사람들이 많았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다들 '뭔지 모를 무언가'를 대비하는 것 같았다.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뭐라도 살까 하지만 금방 포기했다. 남편에게 전화해서 편의점에서 일단 뭐라도 사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도 못했다. 내가 가진 건 아무 쓸데없는 휴대전화뿐이었다.
그런데, 별일 아닌 듯 느긋하게 걷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내가 유난인 건가? 근데, 둘째 분유물은 어쩌지, 집에 햇반이 있나, 저녁에 춥지는 않겠지, 이 정전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사실 어디선가 테러당하거나 전쟁난 거 아니야? 아니라 하더라도 이 정전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 아니야?'
'요즘 같은 세상에?' 라지만, '요즘 같은 세상이라'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난 느긋하기보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는 편을 택하기로 했다.
"엄마!!!"
평상시보다 빨리 온 엄마가 그저 반가운 아이다. 아이를 들쳐 안았다. 그리고는 뛰듯이 집으로 향했다.
"으히히히~ 엄마, 왜 그래요? 그런데, 정전이 뭐예요?"
"으응, 전기가 없어지는 거야"
"전기가 뭐예요?"
"으응, 기계가 먹는 밥이야"
"아, 그렇구나!"
궁금함이 해결된 것인지, 엄마가 정신이 없어 보였는지 아이는 질문을 멈추었다. 그리고 내가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꼭 매달려주었다.
지하철역에서는 사람들이 재난 영화처럼 쏟아져 나왔다. 휴대폰 후레시를 켜고 올라오는 사람들은 질서 정연하게 차분히 올라온 듯 보였지만 다 올라와서는 긴장의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는 울고 있었다. 역과 역 사이에 정차한 지하철에서 모든 사람이 철로를 걸어 올라왔단다. 낮이지만 어두운 그곳은 사람들의 휴대폰 빛이 모여도 안심할 수 없었다 했다.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남편은 모든 전자기기도 한 곳에 모으고 있었다. 도움이 될만한 것들이 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왜 불을 안 켜요, 엄마?"
"으응, 전기가 사라졌대"
남편은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정말 사고로 인한 것이고, 빠르게 복구하고 있지만 전력이 다시 돌아오려면 하루가 더 소요된다고 했다.
'툭'
무거운 장바구니를 내려놓듯 가벼워졌다.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이제 우리 가족의 안녕만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길면 이틀이다. 이틀만 버티면 된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 라면, 과자, 빵 같은 것들은 충분히 있었다. 매주 축구를 가는 남편은 항상 생수를 트렁크에 채워두었다. 모든 게 '최소 수준'은 충족했다. 생존에 문제 될 만한 것은 없었다. 됐다.
집에 있다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나가보았다. 그런데 신기하게 1층에 임시 공동 육아방이 만들어져 있었다. 다들 서로 아는 '누구네 엄마'들이었다. 그들은 아기가 있는 우리는 어서 들어가라며 '훠이훠이' 손짓을 했다. 그들에게 생수 몇 병과 아이들이 먹을 과자를 전해주는 것으로 경의를 표했다. 남편은 혹시 모른다며 1층 보초를 서다 아이들이 모두 보호자에게 돌아가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스름하게 어둠이 퍼져 불빛을 밝히려 돌아서는데, 아이들이 꺄르르 웃는다. 거실의 그들은 불빛 나는 장난감을 용케 모아, 불빛 축제를 시작했다. 빨노초파 원색의 현란한 빛깔이 천장에서 춤을 추었다. 이틀이어서 다행일, 그래서 여유 있을 정전, 대혼란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