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하루
새벽 4시. 창밖은 어둡지만 정신이 밝아온다. 이쯤 무거운 몸이 정신을 다시 눕혀야 하는데, 오늘따라 가볍다. 아프던 허리도, 저리던 다리도 멀쩡하다. 내 몸이 맞나 믿기질 않아 한 번 둘러본다. 카페인 수혈을 한 듯 온몸에 활력이 도는 것이 느껴진다.
'어?! 그럼 움직여 볼까?'
서둘러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혹시 어제 치우지 못한 장난감을 밝을까 봐 발을 더듬거렸다. 설레는 마음에 쓱- 슥- 발을 끌면서 춤을 추듯 리듬을 탄다.
"탁"
거실을 지나 주방의 불을 켰다. 어제 거실을 치우지 못하고 아기와 함께 잠든 것 같은데, 웬일인지 깨끗한 거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건 분명 이 시간을 누리라는 그 어떤 계시이자 어제자 남편의 수고로움이었다. 모든 가족들과 상황들이 협력해주고 있다. 이 시간을 누려도 된다.
세수와 양치로 새벽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 어린이집 가방에 수저와 물통을 넣고, 아이가 갈아입을 옷을 미리 꺼내두었다. 어제 미리 끓여둔 소고기뭇국과 몇 가지 기본찬이면 아침은 충분할 것이다. 이제 식탁에 앉아 책을 펼쳐든다. 습관적으로 커피 생각이 났지만, 포트기의 소리가 시간을 방해할까 봐 마시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카페인을 섭취하기엔 너무나 정신이 맑다. 펼친 페이지에서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나오면 낙서를 하듯 노트에 적었다. 그런 날이 있다. 책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문장 문장마다 상상과 생각이 더해진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연필을 쥔 손이 바쁘다. 마인드맵을 그리듯 적고, 또 읽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게 '필+독'을 즐겼다.
"엄마~ 뭐 하고 있었어요?"
애교 섞인 아들의 인사소리가 들린다. 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아이다. 부은 눈을 비비며 품에 파고든다. 우리 집 알람, 6시 30분이다.
"우리 싸우기 놀이할까요?"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도전장을 내민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아이를 다시 껴안는 척 옆구리를 찔러 간지럽혀 선제공격을 날린다.
"피융~"
곧 둘째도 깨 방 밖으로 나온다. 이 녀석은 아들과 한 패다.
"밥 먹자."
남편이 아침상을 차리면 싸우기 놀이를 멈추고 식탁으로 달려간다. 오늘따라 아들의 컨디션이 좋다. 원래 반찬만 먼저 다 먹어버리는데, 소고기뭇국에 밥을 한껏 말아먹고는 또 달라고 한다. 이유식을 거부하는 딸은 희한하게 쌀밥을 잘 먹는다. 이유식 말고 밥을 내놓으라는 녀석에게 밥을 몇 톨 건넨다.
등원 준비가 수월했다. 시간이 남아서 '딩동댕'도 볼 수 있었다. 아이는 등원도 즐거워하며 손뽀뽀를 날리고 쿨하게 집을 나섰다. 금세 집이 조용해졌다. 이제는 둘째와 놀아줄 차례다. 1교시는 음악시간이다. 장난감을 손에 쥐어주고 타요버스 장난감 노래를 틀어주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장난감끼리 부딪혀 악기소리를 낸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다 뒤로 발라당 넘어지면 재빨리 잡아준다. 아이가 개발한 이 놀이에 함께 꺄르르 웃는다.
효녀가 5분 만에 낮잠에 들었다. 눈을 비빌 때 눕혀 팔다리 마사지를 해주니 스르르 눈이 감겼다. 두 번째 자유시간이다. 글쓰기 시간이다. 먼저 퇴고 중인 글을 다시 읽고 고친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가다듬다 보니 조금 읽을만해진 것 같아 예약 발행을 했다. 그리고 새로운 글감이 떠올라 두서없이 떠오르는 대로 기록을 한다. 이번 주제는 왠지 금방 완성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점심에는 가볍게 삶은 계란 두 개에 완숙 토마토 하나를 먹었다. 요즘은 속이 편한 음식이 맛있다. 이렇게 먹으면 시간도 여유롭다. 아기가 깨 분유를 먹이고 점심 산책을 나선다. 딸은 내가 모자만 눌러써도 달려 기어 온다. 좋아하는 아기띠를 타고 둥둥 떠다닐 생각에 녀석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지질 않는다. 날씨가 좋다. 괜히 집에서 먼 카페에 가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고 싶어졌다. 햇살을 따뜻하지만 바람은 시원한, 지금의 날씨를 즐겨야 한다.
집에 와서는 아이와 2교시를 진행한다. 촉감놀이다. 손바닥 발바닥에 여러 장난감으로 자극을 주니 꺄르르 좋아한다. 비닐로 바스락 소리도 내주고, 얼음도 만질 수 있게 해 준다. 녀석은 재밌게 놀다가 또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다.
오후 3시 30분.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고 첫째를 조금 일찍 하원시키러 간다.
"엄마, 아빠는 동생이랑만 놀고... 치"
어제 혼잣말을 하는 걸 들어버렸다. 볼일을 본다기에 자리를 비켜준 것뿐인데 저를 빼고 셋이 논다고 생각했나 보다. 동생이 생기고 나름대로 섭섭한 일이 많을 것이다. 착한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동생을 때리지도 않았고, 동생이 싫다거나 미워한다는 말을 한 적도 없었다. 그와 단둘이 데이트를 할 때도 되었다. 오랜만에 소금빵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소금빵 위의 소금을 서로에게 양보하며 우리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속삭였다.
데이트를 마치고, 일부러 길을 빙빙 돌아 집에 늦게 왔다.
"아빠! 다녀왔습니다!"
씩씩한 녀석의 목소리가 다시 우리 집을 채운다. 둘째는 이런 오빠를 향해 달려온다.
"오바바-"
옹알이지만 오빠처럼 들리는 그 소리가 오늘 저녁을 평화롭게 인도할 것만 같다. 두 녀석은 제법 잘 논다. 저녁은 소고기다. 남편이 고기를 구우며 맛있을 때 바로바로 입에 넣어준다. 오늘따라 자상한 그다.
책을 다섯 권 읽어주고, 잘 준비를 하는데 아직 힘이 넘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커피를 한 잔도 안 했는데, 에너지가 넘친다. 아이들이 잠들면 오랜만에 러닝을 하러 가야겠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상하리만큼 이상적인 하루.
진짜였을까? 허상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