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소동

이 정도면 첫사랑이지, 오늘의 첫사랑

by 공담소

“이거 오빠 책상에서 나왔어.”

아가씨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 손에 딱지처럼 접힌 종이를 건넸다. 시댁에서 점심을 먹은 후 다 함께 티타임을 즐기던 한가로운 오후, 재밌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의 손에 있는 건 연애편지가 분명했다.

‘다른 여인의 편지여라…!’

남편을 놀리는 일만큼 재밌는 일이 또 있을까. 그의 옛 애인의 흔적이라면 1년은 족히 우려먹을 수 있을 터였다. 이 속에서 가장 기름진 문장을 골라 외울 것이다. 그리고 불리한 순간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그를 향해 그 구절을 읊조릴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가 조용하다. 아가씨의 목소리에 조금 동요하는 듯했던 남편이 손바닥을 보더니 미소를 띠었다. 아뿔싸. 설마...


긴 종이를 반으로 접어 띠를 만든 뒤, 세 번 지그재그로 꺾어 잠그면 그만이었다. 편지 봉투가 있는 편지지는 공식 기념일에만 종종 사용했다. 필기용 노트면 마음을 담기에 충분했다. 공부나 일을 하다가 언제든 그를 떠올리며 사랑을 외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낭만적이라며, 양식을 갖추지 않았었다. 프린트된 하트 대신 깨알 같은 글자로 승부하던 바로 그 시절의 나. 그때의 내가 쓴 편지가 나타났다. 마음은 꼭꼭 담아 안쪽에 숨겨 두었건만 왜 자꾸 튀어나오는 것인지, 검정 잉크들이 뒷면까지 아슬아슬 비쳐 보였다.

“서랍 안쪽에서 나왔대”

시어머니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내 얼굴 근육은 굳어 버렸다. 그때의 나를 들킨 것이 분명하다. 겉면에는 ‘to’와 ’from’이 없었다. 당연히 ‘내’가 ‘너’에게 보내는 서신이었기 때문에 적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열어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가씨는 수신인이 ‘오빠’라는 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도 '읽음'을 강요당한 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글쓴이가 나이기에 모든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이것이 전달될 수 있었으리라. 남편 놀리기에 심취했던 마음을 뒤늦게라도 반성해 보지만 이미 늦었다. 내 속셈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고 괜스레 시댁 식구들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날 저녁, 그 쪽지는 결국 우리 집 책꽂이 선반까지 따라왔다. 아가씨의 ‘오빠’는 편지를 받은 후 그것을 가방 위에 툭 던져놓고는 다른 이야깃거리로 넘어갔다. 내가 민망해할까 봐 배려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어느 쪽이든 고마운 일이었다. 일단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던 나의 바람이 통했다. 하지만 저 녀석이 선반 위에서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드러누운 채 힐끗거릴 때마다 민망함이 두 배로 튀어 올랐다. 과거에 쓴 연애편지가 뭐라고 이토록 낯이 뜨거울까. 마치 애인에게 보낼 달콤한 메시지를 회사 단체 채팅방에 올려버린 듯이 민망하다.


‘사랑에 빠진 과거의 내가 부끄러워서일까? 진지하게 쓴 마음이 우습게 읽힐 것 같아 피하고 싶은 걸까?’

생각만 불어나 피곤해질 즈음, 결국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로 했다.

꼬깃꼬깃한 종이를 펼치니 주름이 제법 깊었다. 접힌 선의 반대로 힘을 주어 펼치니 오랜만의 기지개인지 '우두둑-' 소리가 나는 듯했다. 마지막 주름을 펼치려 하니 그 틈새로 하단에 적힌 날짜가 보인다.


‘2016.12.31.’

순간 시간이 거꾸로 가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편지 속 그와는 2015년부터 교제를 하고 있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1년 동안은 불꽃같이 다투며 서로 모난 부분을 깎아갔던 것 같다. 얼마나 치열했는지, 이런 게 연애라면 이걸 마지막으로 하겠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했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연애는 하지 못하고 6년의 만남 끝에 결혼했다. 좋은 결실을 맺었기에 이 편지가 살아남았겠다 싶으니 꼬깃꼬깃한 녀석이 애잔해 보였다.


예상보다 짧은 내용이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떠오르는 당신에게 미안함과 감사, 그리고 사랑을 전하고 있었다. 선한 영향력을 주어 고맙고, 나도 당신께 그런 사람이기를 바란다고 적혀있다. 그리고는 또 잘 만나보자는 다짐으로 마무리되었다. 지금은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는 ‘미안해’와 ‘고마워’가 그때는 이렇게도 자연스러웠나 보다. 펼쳐 보기 전엔 사랑 고백이 부끄러울 줄 알았는데, 막상 읽고 나니 오히려 감사 인사를 잊고 산 요즘이 부끄럽다. 이건 다른 여인의 편지가 맞았다. 지금과는 다른 그때의 나. 훌륭했던 여인이었나 보다.


접힌 자국을 따라 쪽지를 다시 포개며 편지의 주인에게 다가갔다.

“여보, 이거 읽어 봤어?”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응? 그게 뭔데?”

정말 뭔지 모르는 눈치다. 자신의 물건을 받아서 온 것일 뿐,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나 보다. 남자친구이던 시절에도 그랬다. 자신의 물건이든, 내 마음이든, 궁금해하지 않는 그 무심함 때문에 많이도 다퉜었다. 그런데 지금은 안다. 그 속에 나를 향한 묵묵한 신뢰가 있다는 것을.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제는 그런 저가 웃기기만 하다. 그도, 나도, 그저 허허 웃었다.


다시 접힌 종이의 골마다 우리 시간이 겹겹이 쌓였나 보다. 그리고 그 위에 또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를 새기며 우리는 내일로 접어 간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