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속에서 쓰다
하늘이 낮게 깔렸다. 어두운 구름과 습기 가득한 공기가 곧 비가 내릴 것이라고 알린다.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비의 시작을 기다린다. 금방이라도 물방울이 맺힐 것 같지만 다음 날 저녁에야 온단다. 괜스레 답답하다. 숨이 턱 막히는 이 공기를 '쏴아-' 시원한 빗소리로 씻어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막막함'과 '압박감'이 동시에 들이닥친다. 자잘한 추억은 많지만, 누구에게 보여줄 만한 이야기는 없다. 특별한 에피소드를 뒤져보지만 막상 쓰려면 그리 재미있지도 않다. 무엇을 써야 할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머리만 분주하다. 모니터를 응시한 채 손 끝으로 내보내지 못한 어구들이 무겁게 쌓여간다.
'툭-'
놀이터에 있는 아이와 함께 첫 방울을 맞았다. 저녁에 오겠다던 녀석이 마음이 바꾼 걸까. 옅은 구름 사이로 해가 비치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 온다! 가자! 집에 가야 해!"
아이의 얼굴이 잠깐 찡그려지는가 싶더니, 달려가는 친구들을 보고는 서둘러 세발자전거에 올라탄다. 안전바를 채워주고, 햇빛 가리개를 우산 삼아 아이 머리를 덮는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엄마를 보여줄게."
아이가 탄 자전거를 밀며 전속력으로 달린다. 그는 두 팔을 뻗어 속도를 즐긴다.
'투두-둑-, 투-두둑-'
차갑게 부딪히는 빗방울이 답답했던 속을 두드린다. 빗소리에 맞춰 심장도 거세게 뛴다.
첫 문장이 터져 나왔다. 하고팠던 말들이 쏟아진다. 맞춤법도, 문장의 균형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단어만 나열해 두기도 하고, 감정을 두서없이 기록하기도 한다. 마른 흙바닥 같던 화면에 짙은 빗자국이 번지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빨리 달려야 한다.
'토도도독-도독'
타이핑 속도에 맞춰 심박수도 오른다.
장마는 제멋대로였다. 안개비처럼 흩뿌리다가 소나기처럼 쏟아지기도, 하루 종일 내리다 반나절은 쉬기도 했다. 내 글도 그랬다.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다 한 문장에 30분을 쏟다가, 일기를 쓰듯 쭉쭉 적어 내려가기도 했다. 하루 종일 써내리다가도, 어떤 날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퇴고는 배수 작업 같았다. 물길을 바꾸듯 단어를 바꾸고, 막힌 배수구에서 오물을 건져내듯 잘못 자리 잡은 단락도 들어냈다. 다음 날 읽으면 절반은 사라지고, 절반은 새로 생겨났다. 나만의 문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게 언제 생길지 알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것만 해낸다. 일단 한다. 침수되지 않도록 움직인다.
하늘이 열리면 빗물에 씻긴 거리 위로 햇빛이 번진다. 비에 젖은 글도 모니터 밖으로 나와 마른다. 장마가 빨리 끝나 미처 글을 완성하지 못하고 내놓을 때도 있고, 길게 이어져 오래 붙잡은 글도 있었다. 기간이 길 수록 완성도가 높을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미완성이라 여긴 글이 누군가에겐 기쁨이 되기도 했고, 오래 다듬은 글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그래도 하나의 글이 남는 건 분명했다.
장마가 지날 때마다, 글자 사이에 물길이 깊어진다. 언젠가는 소나기 한 번에 종이를 적시게 되리라 믿으며, 오늘도 장마 속에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