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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저 사람이 아니었으면...
버스에서 내리려고 뒷문에서 기다리던 순간 창밖에 서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를 처음 본 순간이다. 어른들이 전화번호를 주셨지만, 자유였던 만남은 잠깐의 엇갈린 전화 통화로 한 달이 미뤄졌다. 한 달 뒤 어른들의 성의를 생각해 그도 나도 억지로 한번 만나 밥만 먹고 해치우자 싶은 떨떠름한 만남. 우리는 그날의 추억을 서로 다르게 기억한다. 난 15분이나 늦었고 그는 10분을 일찍 나왔다. "밥 먹으러 갈까요?" 상대방을 확인하고 목적지로 가는 어색하고 뻘쭘한 순간. 그는 나를 보자마자 차갑게 '휙' 돌아 앞섰고 나는 '뭐 저런 사람이.'라는 황당함과 함께 머릿속의 많은 동물을 빗댄 우리나라 고유의 인간을 지칭한 표현들을 떠올리며 그를 뒤따랐다. (세종대왕님도 언어를 사랑하시어 희로애락이 담긴 다양한 표현을 즐겨하셨다. 굳이 육두문자라 말하지 않겠다.) 내 소중한 주말을 이리 보낼 수 없다 싶어 밥만 먹고 헤어진 후 나 혼자만의 다음 일정을 이리저리 짜 본다. 그날의 강남역 사거리는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스물여섯 나는 절대로 그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의 시점. 첫 만남부터 늦다니. 늦겠다는 문자의 공손한 표현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녁이 없는 삶을 사는 요즘, 내 소중한 주말에 낸 귀한 시간. 어른들이 주신 숙제나 빨리 끝내고 기타 연습이나 하러 가자. 전화가 걸려온다. 버스 안의 그녀. 혹시?! 활짝 웃으며 내린다. 역시 나한테 반했군. 생각했던 메뉴를 좀 바꿔볼까? 오늘 강남역엔 사람이 너무 많다.
나의 시점. 우리의 메뉴는 서로에게 부담 없는 가벼운 퓨전 한식. 가격 부담도 먹기에도 부담 덜한 적절한 메뉴 선정. 첫 만남에 간장게장 다리를 쭉쭉 훑어 빨아야 하거나 고기 구워 한 쌈 입에 넣어야 하는 위험한 도전은 굳이 하지 않는다. 어쨌든 각자의 부모님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 만남 자체는 최선을 다한다. 의외로 말이 잘 통하고 이야기 소재가 다양하다. 서로를 향한 질문보다는 요즘 이슈들에 관한 서로의 생각들이다. 별 큰 호감 없는 부담 없는 솔직한 자리, 서로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다는 편안한 마음에서였는지 난 어느새 길거리에서 산 오천 원짜리 팔찌 겸 시계 자랑에 여념이 없다.
그의 시점. 생긴 건 파스탄데 의외로 된장이다? 메뉴 선정에 굳이 밥을 좋아한다는 그녀의 말에 은근 마음이 놓인다. 어제저녁 혼을 갈아 넣은 힘든 업무 후 거나한 회식. 오늘 메뉴 파스타면 반은 먹고 토했으리라. 완전 한식 백반집은 눈에 보이지 않고 대충 퓨전 정도면 국물에 오케이겠다. 의외로 소탈하다. 유행의 최전선에 있는 직업치곤 5천 원짜리 팔찌의 아름다움에 감동할 줄 안다. 무엇보다 내가 던진 소재에 적절하게 받아치는 다양한 호기심이 어느 정도 매력 있다. 그래도 내 말에 잘 웃어준다. 역시 그녀는 나에게 반했다.
나의 시점. 생긴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누구보다 예쁜 얼굴선에 피부 또한 매끄럽다. 무엇보다 내가 그리는 남성상과는 거리가 멀다. 집안 남자 어른들은 평균 키가 180cm다. 나 또한 169cm의 키에 웬만한 남자는 어깨를 나란히 한다. 소박한 어깨와 아담한 키(물론 내 기준이다.) 큰 눈과 깊은 쌍꺼풀은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나 싶은 부담스러움에 종지부를 찍는다. 다행인 건 나에게 큰 관심이 없다. 형식적인 대화 없이 시류에 대한 냉소적이며 다양한 관점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이없는 농담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도 나도 결혼엔 관심 없다.
그의 시점. 밥을 샀더니 차를 사겠단다. 숫자 다루는 일을 하지만 음악은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대학 시절 밴드부였던 나는 얼마 후 친구 녀석 신문사에서 열리는 행사 공연이 잡혀있다. 그녀도 음악에 관심이 많다. 호기심 면에서는 나와 비슷하나 진짜가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좀 궁금하다. 어느새 술이 다 깼다.
나의 시점. 더치페이하자는 것을 굳이 그가 내겠단다. 오늘의 만남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려면 금전적인 부분부터 빚진 마음이 없어야 한다. 그가 그럼 차를 사라 한다.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으니 비싼 차로 마음의 부담을 덜자. 그는 음악과 영화에 진심이다. 대학 시절 밴드 활동을 했던 친구들의 이야기가 생각나 호기심이 발동했다.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가 그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의 시점. 내가 쌍둥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한 번 더 나를 쳐다보게 하는 포인트다. 나에게는 대수롭지 않으나 사람들은 쌍둥이인 나에게 궁금한 점이 많다. 내가 굳이 형, 동생은 나와 전혀 닮지 않은 이란성 쌍둥이다. 우리에겐 과연 쌍둥이만이 통하는 무언가 있나 싶지만, 전혀 생각해 본 적 없음이다. 먼저 결혼한 동생으로 인한 어머니의 성화가 나를 이 자리로 이끌었다. 그녀는 맏이며 동생들과 주변 이야기에 꾀나 열심이다. 의외로 보기 좋다. 그녀의 주변인이 은근히 부럽다. 다음엔 영화나 같이 보자고 할까….
나의 시점. 시간이 빨리 간다. 본인을 내세우지도 나의 배경에 대해 궁금함도 없다. 그저 편하게 이야기하다 보니 내가 던지는 이야기마다 배경지식이 가득하다. 집까지 같이 온 뒤 조심스러운 문자도 아닌 대번에 전화다. 샌님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용감하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가만 보자. 그 많은 사람 중에 서로를 한눈에 알아봤다는 건 그가 혹 늘 꿈꿔 왔던 영혼의 단짝, 소울메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