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self)의 범주

물질과 그리스도

자기: 물질로부터 그리스도까지


탐구자 : '자기'라는 개념을 현실적인 관계성 안에서 어떻게 적용하며 이해할 수 있을까

요?


철학자 : 자기는 모든 것과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는 '나와 너', '나와 그

(녀)' '우리' '나와 사물' '나와 자연', '나와 우주'로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학자 : 그것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6장 19절과 에베소서 2장 21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라" (고후 6:19)


(** 여기서 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말은, 천체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우리는 별에서 왔다'는 말과 통한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자기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다"라고 선언한 바를 비추어 보자면, 자기는 곧 그리스도가 되겠습니다.


철학자 : 지금 자기의 관계성의 서론 부분을 다루고 있는데, 신학자께서 갑자기 본론과.

결론을 말씀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는 모든 것과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자체성은 자기의 한 측면인데, 물질적인 것을 바탕으로 하여 규정될 수 있습니다.

자체성은 가장 아랫 단계에서는 물질적인 공통점을 가지면서 동시에 윗 단계로 가면서 비물질성도 포함하게 됩니다.

자체성의 가장 높은 단계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는 자체성을 '관계 중의 관계'라고 부릅니다.


신학자 : 사실상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심으로 물질성을, 부활하심으로 비물질성을 함께

공유하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자기'가 될 수 있는 요건을 다 갖춘 셈입니다. 그래서 모든 물질적인 것과 온 우주, 영적세계까지 통합하신 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에베소서 4:6절에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철학자 : 모든 우주를 포괄하는 일자로서의 물질과 영적인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모든

만물이 존재합니다.

자기는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석가 : 자기의 관계성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즉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즉시성'을 칼 융은 '동시성'이라고 말하죠.

융의 '동시성 이론'은 '자기'이론의 확장판입니다.

융은 194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볼프강 파울리(Wolfgang Ernst Pauli)와 함께 '동시성 이론'을 공동 연구하였습니다.

파울리는 자신의 이혼과 어머니의 자살 사건으로 충격을 받던 중, 1932년 1월부터 칼 융을 만나 분석상담을 받았습니다.

파울리는 융의 최고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파울리는 원형적인 꿈을 수없이 꾸는데, 그에 대한 분석이 융의 저서 [심리학과 연금술]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융과 공동연구한 동시성 이론이 왜 중요한가 하면, 자기가 우주에서 작동할 때 동시성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전자를 분열시켜서 두 개의 전자로 만들어, 두 전자를 얽어 놓습니다.

하나가 오른 쪽으로 돌면, 다른 하나는 왼쪽으로 돌게 만듭니다.

이것을 '양자 얽힘'이라 부릅니다.

두 개의 전자를 분리시켜 100Km 떨어진 곳에서 한쪽 전자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100km떨어진 전자가 동시에 왼쪽으로 돕니다.

만일 이 두 전자를 우주 양쪽 끝에 놓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겁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빛보다 빠른 것이 없으니, 하나의 전자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다른 전자가 왼쪽으로 도는데에는 137억년이 걸린다는 겁니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에서는 다릅니다. 시간 차 없이 동시에 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융과 파울리가 연구한 '동시성 이론'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전자와 전자는 '자기(self)'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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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자 : 저도 사람과 식물이 정신적으로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1970년 대 미국의 어떤 형사 사건 담당 형사가 거짓말 탐지기를 집으로 가져올 일이 있었습니다.

거짓말 탐지기가 칼융의 콤플렉스 이론에서 발전된 것이잖아요?

이 형사가 장난삼아 정원에 있는 나무에 이 장치를 연결을 했답니다.

그가 톱을 들고 다른 물건을 잘랐습니다.

그때는 거짓말 탐지기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톱을 들고 속으로 '이 나무의 가지를 잘라봐야지'하고 마음 먹는 순간 거짓말 탐지기에서 격렬한 반응을 하더라는 겁니다.

그때 이 형사는 '아하! 사람과 식물 사이에도 뭔가 연결된 정신성이 있나보다' 고 생각했답니다.

지금 우리의 주제로 넘어와서 말하자면, '모든 것은 <자기>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탐구자 : 이번에는 자기 관련 주제를, 물질과 그리스도 관계성 안에서 말씀해 주시죠.


신학자 : 어거스틴이 '자기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했죠.

물질도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하나님으로 아는 사람이 있잖아요

또 어떤 사람은 권력을 하나님으로 알고요.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죠.

물론 이스람교는 마호메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보죠.

결국 불교도 부처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 보편적인 하나님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자신의 삶을 구체화해 주는 신의 모양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다른 종교에서의 하나님과는 많이 다르죠.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인격화된 하나님이며,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만

교통하는 분이라는 신앙고백적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탐구자 : 예수는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분인데,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오셨지만,

물질로서의 성육신의 관점으로 보자면 다른 의미들도 많이 있겠군요.


신학자 :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오셨지만, 피조된 인간이나 피조물로서의 물질과는

다릅니다.

피조물은 무(nothing)로부터 창조되어 물질 요소롤 꽉 채워져 있으나 존재론적으로는 늘 공허와 허무로 텅 비어 있습니다.

실제로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것이지만, 우리 세포의 원자는 그 안에 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나머지 공간은 텅 비어져 있습니다.

텅비어 있다는 의미는, 예를 들어 , 원자 하나가 잠실 축구 운동장이라면 전자는 축구공만한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60~100조개의 세포를 가지고 있지만, 세포 하나에 원자가 100조개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세포가 얼마나 빈 공간, 공허로 가득 차 있고, 그것을 심리적으로 표현하자면 허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로서의 물질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본체가 물질성을 띤 것입니다.

피조물의 물질성은 죄로 가득 차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의로 가득 차 있죠.


탐구자 : 그렇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다는 말은 구원을 위한 신앙고백이라는

의미 말고 또 다른 의미도 많을 것 같네요.


신학자 :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로서 인간의 형체를 입어 성육신

하신 이유는 공허와 허무로 가득 찬 피조물들에게 <존재>를 채워주기 위함입니다.

즉 텅 빈 공허와 허무에 <존재> 즉 <being, 있음>으로 가득 채우는 겁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이기면서 피조물의 허무를 채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일은 그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일어났고, 만물을 충만케 하는 일(엡 1:23)이 일어난 것입니다.


철학자 : 그렇다면 그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선포 이래 철학적 난제로 남아 있는

‘존재와 무’의 모순률을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한 사건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탐구자 : 갑자기 대화가 기독교 신앙 서적화 되어 가는 느낌인데, 이 대화의 목적이 그런 것인가요?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을 배제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책이 되는 겁니까?


분석가 : 그렇지 않습니다. 서구의 사상을 논할 때는 피할 수 없는 연결점이 있는데,

그것은 ‘아테네와 예루살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만남이 그것입니다.

‘자기’라는 것은 이 두 문화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를 다 포괄할 수 있는 포용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의 ‘자기’를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사상을 꿰뚫는 ‘자기’의 개념의 형성은 이 두 문화의 만남으로 가능할 수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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