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 와 '이다'의 밑바닥 존재철학

be 동사의 두 가지 용법


I am.


“신에게 부여된 ‘나는 있다(I am)’라는 이름은 사람들이 하나의 개체로서의 인간이 되는 것에 따르는 위기감을 표현하는 이름이었다."(도널드 위니캇)



탐구자: 이 글의 제목만 봐서는 영어 문장의 5형식 중 1형식과 2형식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이미 ‘있다’와 ‘이다’의 차이를 논하는 것은 뭔가 존재의 기원을 따지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신학자 : 그렇습니다. 이미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이 세상에

던져진 질문 중 가장 위대한 질문을 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I am that I am)”라고 자신을 계시하셨죠.

자신의 이름을 하나의 문장으로 제시하셨던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 안에 이미 완벽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유일한 진리는 동일률이거든요.

즉 동일률이라함은 ‘A=A’을 말합니다.

신은 완전한 존재이기에 자신을 확장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은 주어와 보어가 동일률을 이루는 겁니다.

우리 유한한 인간은 '내가 누구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이름이 필요하고,

각종 보어가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확장해 나가거든요.

‘I am a teacher’ 라고 하면, 주어보다 보어의 범주가 더 큽니다.

나보다 더 큰 범주로 자기를 설명해야 하는 것은 사람은 자기 안에 갇히지 않고.

보다 큰 범주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확장시키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

니다.


분석가 : 그렇습니다. 나중에도 나올 이야기이지만, 아기가 어머니를 처음 대할 때

한동안 어머니를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본다고 생각하거

든요.

나중에 아이가 3세가 넘어가면서 아버지를 보게 되면, 아버지의 존재는 엄청

나게 커 보이는데, 나도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철학자 : 지금 분석가가 말한 것은 바로 오늘의 주제인 ‘I am’과 ‘I am A’ 의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에요.

아기가 어머니를 보면서 자기 자신이라 생각하는 것이 바로 ‘동일률’이거든요.

이 단계에서 아기와 어머니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3세가 되어 아버지가 거대한 모습을 보게 된다면, 아이는 압도되는 것

이 아니라, 나도 저렇게 거대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때 아기는 ‘I am 아버지같은 존재.’라는 문장으로 표현하고 싶어 하겠죠.

그렇게 아기는 아버지를 통해 자기개념을 확장할 수 있게 됩니다.


분석가 : 위니캇의 아동정서 발달이론 안에서도 I am(나는 있다)에서 I am A(나는 A

이다)로 발달해 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위니캇은 I am에 집중합니다.


위니캇은


우리는 자주 이 ‘개인’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현대적인 개념인지를 잊고 산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옛 히브리어의 이름은 어쩌면 그 관념에 도달하기 위해서 벌였던 투쟁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유일신론은 ‘나는 나다(I am)’라는 신의 이름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66, 2017)


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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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파르메니데스 :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철학자 : 내가 보기에는 위니캇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는 ‘이미 철학자’라는 이름을

붙여도 손색이 없습니다.

I am 을 철학적으로 검토하자면, 그 역사가 매우 깊습니다.

그리스 철학 중에서도 최초의 철학자, 즉 철학이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하던

시점, BC 5~6세기경에 헤라클레이토스와 쌍벽을 이루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

입니다.

전자는 생성의 철학이고 후자는 존재의 철학입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철학의 역사는 이 두 철학자의 사상이 서로 충돌하고 교류하는

역사이죠. 파르메니데스는 매우 완고한 사람이었죠.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깁니다.


탐구자 : 너무 쉬운 말을 매우 어렵게 표현하는 느낌이 드네요.


철학자 : 그 반대입니다. 그가 한 말을 파악해 보면, 매우 어려운 내용인데 너무 쉽게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있음’과 ‘없음’의 문제를 ‘존재’와 ‘현상’으로 나누어서 풀어가게 되면 매우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현상’이라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 사물들, 사람들, 우주의 별들, 하늘, 땅 모두가

현상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모두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주장

입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은 ‘절대적 동일성’의 개념을 형성하게 됩니다.

절대적 동일성이란 ‘A=A’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신의 존재로만 가능한 동어반복이거든요.

파르메니데스는 진리만 찾다가 현실을 놓쳐버린 철학자입니다.

현실은 모두 환상이기 때문에 진리 밖에 있어 쳐다도 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소피스트가 판을 치고 사람들을 그들의 궤변에 꼬임을 당해 사기

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이 현실을 구제하기 위해 현실 등판을 합니다.

파르메니데스가 오직 'I am.' 만 주장했다면, 플라톤은 'I am A.'를 주장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Be 동사의 두 가지 용법을 말하라 하면, 중학생 정도만 되어도

너무나도 당연하게 '있다'와 '이다'로 답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나 라틴어 같은 서구의 언어에서는 이 둘의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I am a boy.'를 파르메니데스 식으로 해석을 하자면, '나는 한 소년으로

있다'와 같은 답답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를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나는 소년이다'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있다'(파르메니데스)에서 '이다'(플라

톤)로 분화되는 데에는 100년이 걸립니다.

그렇게 확실한 구분 또는 분화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있다'라는 동일성 철학은

1900년대까지 이어집니다.

동일성 철학은 근대 제국주의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나와 같지 않은 자'는 정복의 대상이며, 그들은 나같은 자가 가치를 부여할 때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자연 개발 논리가 나오고 식민주의가 나옵니다.

동일성 철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비유되는 지점에서 종지부를 찍습니다.

'나와 같지 않는 자'는 버러지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러지 같은 유대인을 멸종시키려 했습니다.

플라톤은 '있다'와 '없다' 사이에 '이다'를 발명해 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이 사건이 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파격적이고

충격적이어서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를 죽였다는 의미에서 '부친살해'라는 용어

까지 사용하면서 스스로 죽을 각오를 하듯이 '존재'(being)을 분화시킨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가 얼마나 동일률을 절대화하였는가 하면, 영어 문장으로 예를 들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ere is no book on the desk'

라는 문장은 파르메니데스 철학에서는 모순률에 해당됩니다.

be 동사는 존재 동사인데, not이라는 '없음'의 단어와 공존할 수 없어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탐구자 :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결국 플라톤이 보기에 진리와 무관한 소피스트

들이 활개치며 다니면서 혹세무민하여 피해를 보는 현상이 현실적으로 나타나

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을 부정할 수 없어 '거짓도 현실에서는 있다'는 진실을

간과하지 않은 것이로군요.


철학자 ; 그렇습니다. 플라톤이 거짓된 현실의 존재를 구제하였지만, 그것을 논리적

현상을 넘어 물리적 진리로 확정되는 데에는 천년 이상이 걸립니다. 그것은 바로

인도에서의 '0(영)의 발견'입니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는 드디어 0의 발견으로

현상적으로 극복이 됩니다.

인도에서의 '0'의 발견은 오래되었지만, 서구로 전해진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

였습니다.

서구에서 0이 들어오자 중세의 연금술은 화학과 물리학으로 분화됩니다.

수학의 발달과 과학의 발달은 서구 유럽의 학문 세계의 중흥을 가져 옵니다.

0의 발견은, '없음'(nothing)이 '있다'(being)로 두 개념이 결합된 형태를 제시

하고 있습니다.

0이란 '없는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탁자 위에 사과를 하나, 둘, 셋 올려 놓으면, 처음에는 사과

가 없는 상태가 있어 '테이블 위에 사과가 없다'고 말하기 보다 '테이블 위에 사과

가 0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등으로 단위가 높아질 때마다

0이 하나씩 더 붙어야 된다는 사실에서 0은 그냥 없음이 아닌 겁니다. 가장 큰 숫자인 9보다 10이 더 큰 것으로 비춰보면, 0의 의미는 '없음'의 의미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있음'의 의미를 극대화시키는 효과까지 있는 것입니다.

아라비아 숫자로 '있음'을 표시할 때, 1에서 9까지 표현할 수 있습니다.

9 이상의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없음'의 기호인 0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래야 10이 나오고, 100, 1000, 10000, 100000이 표기와 계산이 가능합니다.

한없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없음'(0)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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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자 : 그렇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양자물리학 개념이 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컴퓨터는 0과 1이라는 이진법을 사용해서 그것이 몇개로 확장

되는가에 따라 8바이트, 16바이트, 32바인트 등으로 컴퓨터 성능을 개선시켜

왔잖아요.

그런데 최근 개발된 양자 콤퓨터는, 0과 1이라는 이진법을 극복한, 0과 1

그리고 이 두 숫자의 중첩상태를 포괄하게 되니까, 연산속도가 엄청나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슈퍼콤퓨터가 2년 동안 할 수 있는 작업을, 양자콤퓨터는 단 몇초

에 끝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철학자 ;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매우 편한 상태에서 입놀림으로 '있음'과 '없음'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바로 파르메니데스의 절대적 동일성 철학으로

인류는 수천년간 전쟁과 정쟁, 갈등으로 피로 물들이는 역사를 반복해 왔습니다.


신학자 : 맞아요. 플라톤이 현실을 구제하여 소피스트들의 현실적인 정체를 밝히 드러

내기는 했지만, 그들 소피스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활개

치며 다니고 있습니다.

이단 신흥종교나 속임수를 전제로 한 다단계 판매 시스템, 보이스 피싱 등의 형태로

소피스트들의 정체성은 지금까지도 그 맥을 놓치지 않고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답

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싱에, 이단종교에, 다단계에 잘 속아넘어가는 것을 보면, 플라톤의 현상구제가 극도로 필요한 때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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