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률(I am. A=A)과 모순율(A=-A) 사이

나는 ~이다(I am A.)

동일률과 모순율


탐구자 : 최초의 철학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으로 시작한다고 들었습니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는 너무 비인간적인 느낌이 들어요.

왜냐하면 마치 신의 동어 반복(I am who I am) 같은 느낌이 든다 말이죠.

철학자: 그렇습니다. 매우 비인간적이죠. 나는 그것을 절대적 동일성이라고 부릅니다.

신적인 동일성이죠.

신학자 : 신의 일이 동일률이라면, 피조물의 일은 모순율입니다.

철학자 : 맞습니다. 신의 일이 동일률이라 함은 <A=A>이기 때문이죠.

이 동일률만큼 명확한 진리가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수학(당시의 수학은 기하학이다)만이 하늘의 이데아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봤죠.

그것은 오늘날 수학(대수 + 기하)이 동일률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 거의 예외 없이 제시되는 형식이 동일률이죠.

예를 들면, a=2, b=-3일 때, 2a + 3b의 해를 구하는 문제일 때,

2a + 3b = 2 x a + 3 x b

= 2 x 2 + 3 x (-3)

= - 5

라고 할 때, 계속 '='로 풀어가는 과정은 바로 동일률임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수학은 바로 = 없이는 해답을 풀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수학은 곧 신의 진리, 우주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탐구자 : 그렇군요. 그런데 신의 세계가 동일률이라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사람의 세계 물질의 세계는

왜 모순율인가요?

철학자 : 아리스토텔레스는 모순율을 최초로 언급한 철학자입니다. 그의 저서 [형이상학]에서 네 가지 형태의

모순율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관계입니다. 두 배와 절반은 모순이죠.

두 번째는 반대입니다. 선과 악은 정반대의 모순입니다.

세 번째는 결여와 소유입니다. 실명한 상태는 결여이지만, 시력을 가지고 있으면 소유입니다.

네 번째는 긍정과 부정입니다. 앉아 있거나 앉아 있지 않음은 서로 모순입니다.

이런 모순은 뉴턴의 고전물리학에서 필두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형식 논리학에서도 참과 거짓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눕니다.

사물은 있거나 없거나 이며, 택배로 보낸 상자 안의 고양이는 산 상태이거나 죽은 상태 둘 중 하나

일 뿐입니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으로 건너오면, 사물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며, 택배상자에 보내진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아있는 두 가지 가능성이 중첩된 상태입니다.(슈뢰딩거의 고양이)

탐구자 : 알듯 모를 듯한 이야기이네요.

요즘 양자 컴퓨터가 나오면 지금의 슈퍼컴퓨터보다 1억 배 빨라진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철학자 : 지금의 컴퓨터는 0과 1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라면, 양자컴퓨터는 0과 1 외에 0과 1이 중첩된

상태를 도입하였습니다.

중첩상태를 산정함으로써 속도가 1억 배 빨라진다고 합니다.

1억 배를 1억 분으로 보면 3년이거든요. 그 말은 슈퍼 컴퓨터로 3년 걸리는 일을 양자컴퓨터에서는

1분이면 된다는 말이죠.

바로 모순율을 받아들인 결과 그렇게 되는 겁니다.

놀랍지 않나요?

탐구자 : 저는 양자물리학에 관한 여러 강의를 들어보면서 느낀 한 가지 결론은, '아하~ 중첩이다'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입자와 파동의 상태가 중첩되어 있죠.

이게 논리학에서는 모순율에 해당되는 것 같아요.

우리 인간관계, 세계와 우주에는 있는 이런 모순율을 받아들이면 인간관계가 훨씬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지지 않을까요?

철학자 :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분법적인 사고가 주류를 이루고 있죠.

세상에는 그런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사람과 세계는 갈수록 경직되고, 완고해집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 사회가 아직도 파르메니데스('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주창자)의 영향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양자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어떤 여성 옷의 색깔이 배경색에 따라 75%의 사람은 청색이라고

판단하고, 25%의 사람은 황금색이라고 본다는 사실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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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유튜버 <금요일금요일밤에> 과학은 못 참지 에서)

파르메니데스 추종자들은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보고, '나는 항상 옳다'는 고집을 버리지 못합니다.

사람은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은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사람, 물질,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바로 존재의 중첩상태를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철학자 : 그 <중첩 상태>가 바로 <모순율>입니다.


나는 ~ 이다(I am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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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 다행히도 신의 동일률(A=A. 나는 있다. 영어문장 1 형식)과 인간 및 세계의 모순율(A= -A) 사이에는 영어 문장 2 형식 '이다'(A=B)가 있습니다.

'이다'는 인간사회를 풍요롭게 만드는 상상력의 결과입니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절대적 동일성은 신의 영역에서만 가능한 일이고, 이것은 인간화되어야 합니다.

'나는 있다'이 인간화되면, '나는 ~이다'가 되는 것입니다.

신의 이러한 인간화 과정이 요한복음에서 일어납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 (I am~) 선언이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6:35, 48)

"나는 세상의 빛이다" (8:12; 9:5)

"나는 양의 문이다" (10:7,9)

"나는 선한 목자이다" (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4:6)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15: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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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에고 에이미(I am ~)는 보어를 갖춤으로써 신적 동일률(동어반복)에서 벗어납니다.

그래서 이것은 신의 인간화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자기 비하, 즉 인간화가 되심입니다.

이미 성육신 사건으로 하나님은 1차적으로 <자기 비하>가 일어났고, 2차적 <자기 비하>는 바로 '에고 에이미'를 통해 인간화가 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과 율법사,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에고 에이미(I am)' 사용을 두고 감히 하나님의 이름(I am)을 사용한다고 <참람죄>를 걸어 십자가형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탐구자 : 그렇군요. I am이라 하면, 우리 시대에는 누구나 사용하는 언어잖아요?

그럼, 우리 안에 신이 있다는 말이 되겠네요.

철학자 :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흔히 사용하는 용어이지만, 예수께서 에고 에이미를 사용하신 후,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다가 데카르트가 이 'I am'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 당시의 종교 사회적 환경으로 볼 때, 데카르트는 매우 위험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탐구자 : 바로 이 명제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I think therefore I a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명제가 왜 문제가 되죠?

철학자 : 이 문장 안에는 당시에 용납되지 않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I>라는 제1인칭입니다. 중세시대에는 '나'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생각>을 내가 하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생각>이 나는 것'이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이 주어이지, '나'가 주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대였습니다.

탐구자 : 오늘날에도 그런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아! 생각났다.' 이것도 생각이 주어네요.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생각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네요.

신학자 : 맞아요. 중세시대에는 생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떠올려 주는 것이지, 내가 주체적으로 생각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탐구자 : 그럼, 또 다른 한 가지 문제는 무엇인가요?

철학자 : 그건 바로 'I am.'입니다. 아시다시피, 'I am'은 하나님의 이름이거든요.

제일 눈이 옆으로 돌아가면서 노려보기 시작한 곳은 바로 '교황청'이었습니다.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쓰다니...'

그래서 교황청에서 데카르트를 소환했습니다.

탐구자 : 아마도 종교재판에 회부하려고 했겠네요.

철학자 : 그렇죠.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의심의 대가답게 교황청의 의도를 꿰뚫고 있었어요.

그래서 교황청이 던질 질문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 갔죠.

교황청에서 ' I think therefor I am'이라는 명제를 만든 의도를 묻자, 데카르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제가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이 계시더군요"

데카르트는 이런 답변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탐구자 : <I am A>가 신의 '인간화'를 가져왔다면, 그것이 인간사회에는 어떤 효과를 가져 오게 되었을까요?

신학자 : 엄청난 변천과 발달이 일어나죠.

개인적인 '나'는 끊임없는 자기 확장이 일어나죠.

I am a boy.

I am a student.

I am a professor.

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이 가능해지고 문화발달을 가져 옵니다.

대표적인 것이 화폐사용입니다.

종이조각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백화점에서 전시하는 물건을 다 살수 있잖아요?

이것이 바로 A = B 라는 은유를 발생케 합니다.

A가 B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C,D,E,F,G... 로 확장되면서 일종의 '상징' 사용을 가능케 합니다.

상상력의 환장으로 문화를 만들고, 예술을 만들고, 과학을 만들어내게 되죠.

이런 다양한 변화 및 발달이 바로 사람이 인간의 차원에서 신이 되고자 하는 전능감 표현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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