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I am과 위니캇의 I am의 차이

( 이 글은 앞의 글 <동일률(I am. A=A)과 모순율(A=-A) 사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데카르트 VS 위니캇


신학자 : 교황청의 충격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데카르트의 명제는 예수의 선언과 유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선언은 하나님이 ‘나’가 되심을 선언하는 명제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이미 ‘성령이 내 안에 계심’으로 이미 선포되어 있습니다.

탐구자 : 그렇다면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이 되신 것처럼 예수를 믿는 성도들도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인가요?

신학자 :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실 수 있고,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될 수 있으나, 내가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차이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본체이시고, 우리는 무로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분석가 : 위니캇도 ‘I am’ 선언을 합니다. 유아가 절대적 의존기인 생후 1년이 지나는 무렵, ‘나는 있다’의

존재로 자기 동일성을 확보하죠.

탐구자 : ‘I am’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존재와 사유의 일치가 일어나야 할 텐데, 생후 1년 된 아이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분석가 : 아이의 존재와 어머니의 사유가 통합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아이는 어머니와 융합된 상태에서 어머니의 사유를 받아들이면서 타자성을 확보하게 되고 그 결과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아이는 '나는 있다' 또는 '나야 나'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나'는 일평생 동일한 '나'입니다.

아이는 ‘I am’, 즉 독립적 정체성을 가진 존재를 확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I am이신 하나님이 들어와서 ‘나’가 되는 사건을 맞이하게 되면서 영적 존재의 차원

을 확실하게 확보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봐도 아기는 데카르트의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게 됩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신체는 일어나는 모든 작용이 자신의 자신 안에서 시작해서 자신 안에서

끝나는 신체입니다.

여기에는 타자성이 내면화되는 정신적 작용도 없고, 천상의 신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며,

어머니와의 관계성도 없이 그저 생물학적 작용이 내부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신체입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타자’는 그저 외부의 타자이자, ‘나’라는 주체가 가치를 부여하는 만큼만 존재

하는 타자일 뿐입니다.


천상의 이데아(Idea)와 나의 사고(idea)


탐구자 : 지금까지 논의되어 온 내용으로 볼 때, 신체가 타자성과 천상의 신이 배제된다는 것은 플라톤과

데카르트 사이에 큰 괴리가 발생한 것이군요.

데카르트의 신체가 왜 문제가 되는 것이죠?

매우 합리적인 개념인 것 같은데...

철학자 : 파르메니데스는 불변하는 진리를 찾는데 있어서 ‘존재(있음)’를 상정했습니다.

파르메니데스에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 존재는 사유와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은 그 불변하는 존재는 ‘천상’에 있는 ‘이데아’라고 생각했고요.

플라톤은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하늘에 있는 이데아를 본떠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을 했죠.

그런데 데카르트가 <천상>에 있는 ‘이데아’를 <나> 안에 있는 ‘사고’로 끌어내렸습니다.

플라톤은 불변하는 존재를 천상의 ‘이데아’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항상 하늘에 있었기 때문에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천상의 불변하는 이데아를 사유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그 <천상>에 있는 ‘이데아(Idea)’를 <나> 안으로 끌어들여서

나의 ‘사고(idea)’로 바꿔 버립니다.

‘나는 사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세우면서 존재와 사유가 일치하는 장소를 <천상>

에서 <나> 안으로 바꿔버린 것이죠.([자기의식과 존재사유]. 김상봉, 서울: 한길사,

1988, 117~119)

탐구자 : 말하자면, 천상이 땅에 의해 전복당하는 매우 파격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군요.

그런 전향적인 선언에 대해 지금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별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충격을 주는 발언일 수가 있었겠습니다.

당시 교황청의 입장에서 보면. 갈릴레이가 천동설 대신 지동설을 주장한 것보다 더 큰 전환일 수

있었겠습니다.

말하자면 진리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데카르트에 의하면, ‘나’가 진리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잖아요.

교황청에서 데카르트를 불러 들일 만도 한 일이었군요.

철학자 : 당시에는 ‘나’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진리의 담보자가 하나님이 아니라 ‘나’가 된다는 사실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이었을 겁니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계의 중심을 지구에서 태양으로 바꾼 정도이지만,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가

우주의 중심이 되는 사건입니다.

물론 데카르트는 그럴 목적을 가지고 그런 명제를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청의 입장에서는 데카르트가 하늘을 뒤집어 버리는 엄청난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분석가 : 데카르트의 ‘I am’은 천상을 전복, 신의 주권을 찬탈하여 ‘나’를 우주의 중심적 주체로 등극

시킨 듯했지만, 모두 편집증적인 의심이 꾸며낸 망상에 불과했습니다.

철학자 : 맞습니다. ‘나’는 천상의 이데아를 ‘나’ 안의 사고로 끌어내려서 ‘나’ 안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를

이루었지만, 천상, 그리고 신과의 관계를 끊어버렸기 때문에 이데아와 같은 존재의 보편적 지평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천상을 전복시켰지만 우주의 중심이 되기는커녕 존재로서의 보편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해 급기야

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했습니다.

신의 존재 증명을 통해 ‘나’ 의사고의 가치를 확보하였지만, 문제는 기껏 존재와 사유의 일치를

‘나’ 안에 이루어 놓고는 다시 존재와 사유가 분리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즉 사고는 ‘나’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존재는 사고 너머에 있는 신에게 귀속시켜야 했습니다.

데카르트의 성찰이 계속되어 가면서, 신의 전능성은 과학의 전능성으로 대체하게 됩니다.

신의 자리에 과학이 대신 들어서게 된 것이죠.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에서 신을 배제시킴으로써 무신론 철학으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신체와 몸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신체관: 죽음과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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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 데카르트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그의 ‘신체’ 개념 때문입니다.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데카르트는

해부학을 바탕으로 기계론적 신체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체는 영혼과 정신의 고유한

작용이 고려되지 못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신체는 상처가 나면 치료하면 되고, 고장이 나도 되는, 한갓 기계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이러한 상태에 빠지면, 그는 <이인증>에 걸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심장 기능이 멈추면 신체의 기능이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죠.

탐구자 : 그건 당연한 것이 아닌가요?

철학자 : 그렇게 질문한다는 것은 탐구자도 데카르트의 신체관에 물들어 있는 겁니다.

그런 신체관의 문제는 생명이 하늘에서 오는 것임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유명한 명제(cogito ergo sum)를 통해 ‘개인’의 개념을 가져오기는

하였지만, 19세기까지 그 개인의 개념은 보편적인 ‘나’인 것이지, 여전히 고유한 ‘나’라고 볼 수는

없어요.

데카르트의 ‘나’는 몸이 배제되어 있다는 문제를 낳게 됩니다.

탐구자 : ‘나’라는 것은 당연히 몸을 전제로 한 ‘나’가 아닌가요? ‘나’가 있는데 몸이 없다면, 그것은

‘이상한 나라 엘리스’에 나오는 고양이 몸체가 없는 ‘고양이웃음’ 과도 같은 것인데, 그건 마치

유령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요?

철학자 : 신체와 몸의 개념의 차이 때문에 그런 오해가 발생합니다.

‘신체’는 보편적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 개념의 것이라면, ‘몸’은 개인의 정체성을 가진 주체가

소유하고 있는 고유한 영혼과 개별적 정신을 담고 있는 그릇이자 살아있는 인격체입니다.

위니캇은 신체를 지양하고 고유한 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아마도 분석가의 ‘신체’에 대한 언급은 데카르트적 신체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신체’는 해부학적 관점이자 기계론적 관점에서 규정된 개념입니다.

근대 의학이 데카르트적 신체관의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의학은 거대한 발전을 이룩하였고 그 발달

에 힘입어 오늘날의 현대 의학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체관의 문제점은 죽은 사람을 해부하면서 발전된 ‘해부학’을 근간으로 해 왔기 때문에

이미 ‘죽음’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현대의학의 접근방식은 기계론적 신체관에 근거하기 때문에 신체의 어느 부분이 고장 나면

고치면 되고, 그래도 안 되면 갈아 끼우면 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공적실재 개념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신체관에서 사람의 ‘고유한 몸’이라는 개념은 부정

됩니다.

정신과 신체는 완전히 분리된다고 보는 이러한 관점을 ‘심신이원론’이라고 부르죠.

탐구자 : 유발 하라리가 쓴 ‘호모데우스’의 신체 개념은 ‘고유한 몸’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군요.

철학자 : ‘호모 데우스’는 고장 난 장기나 신체 부위는 갈아 끼우면 사람의 수명을 500년까지 연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지한 ‘심신환원주의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늙은 영혼과 정신을 젊은 신체에서 영혼과

정신을 구입해서 다운로드시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신환원주의자들은 자기 신체에 대한 고유한 소유권을 포기하고 상호 공유하는 것은 이기심을

극복하는 현대판 이타주의의 표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탐구자 : 그것이 어떻게 이타주의가 될 수 있을까요?

냉동인간 보관소에 수많은 머리들만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의문이 많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저 머리를 누구 몸에다 갖다 붙이는 거지?’라고요.

이렇게 냉동된 머리를 위해 자기 몸을 기꺼이 내어 줄 이타주의자가 있을까요?

철학자 : 그래서 내가 근대적 ‘신체관’은 죽음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한 겁니다.

그 죽음의 개념에는 ‘이타주의’라는 미명하에 폭력과 착취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기 머리를 잘라서 냉동해 놓았다가 의학이 발달한 시대가 오면 다시 해동하여 다른 사람의

신체에 갖다 붙이겠다는 발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0.01%에 해당되는 부자나 특권층에 속하는

사람들이겠죠.

거기에는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돈의 폭력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폭력은 데카르트의 ‘나는 사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로 시작된 근대적 이성에서 비롯되었고, 근대적 폭력은 제국주의로

나타났습니다.

미개한 국가들을 문명화시켜준다는 미명하에 정복과 착취와 폭력으로 제3 국가들을 식민지화

했습니다.


우주 탄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우리의 몸

분석가 : 위니캇의 ‘몸’ 개념은 그렇지 않습니다.

‘몸’은 단순한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탄생 후부터 어머니의 사랑과 공감으로 자기애를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주체는 바로 몸으로 자기애를 채우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몸에 자기애를 온전히 채울 때, 그때야 비로소 이타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몸은 절대 남과 공유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고유한 몸’입니다.

신학자 : 천체물리학자인 이석영 박사는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무거운 원소들이 태양계 탄생 이전의 한 초신성에서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실제로 우리 몸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물의 주원료인 수소는 거의 전부가 빅뱅 우주 초기 3분간 만들어졌다. 우리 몸이야말로 우주 탄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최후의 증인인 것이다. 여기까지 알게 되면 여러분의 우주는 수백억 광년 크기에 달하게 된다”([빅뱅 우주론 강의], 19)


고 말합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직접 물려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태초의 1초에서 3분 사이에

만들어진 물질을 가지고 와서 몸을 구성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신학적으로 바꾸면, 하나님의 창조가 6일 만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모태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생명뿐만 아니라, 질병도 사망도 모두 하늘에서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은 후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믿는 것이 올바른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신체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물리적 차원 이상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듭니다.


분석가 : 위니캇의 몸을 구성하는 것으로 먼저 인격의 핵으로서 자기 동일성을 이루는 I am을 획득한

몸이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환경으로 삼는 정서적 관계를 담고 있습니다.

<몸>은 신체의 개념과 확연히 다릅니다.

<몸의 형성>은 신체 접촉이라는 물리적인 관계로부터 시작하여 촉각, 시각, 청각, 후각 등 감각을

통합해 가는 것으로 비롯되지만, 그 과정은 물리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의 관계적․정서

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감각의 통합이 잘 일어날 때 유아는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고 피부를 기준으로 하여 몸의

경계를 세우게 되면서 정신적 영적 존재로 성장해 가게 됩니다.


물질의 정신작용 : 스토아 철학과 현대 정신의학

탐구자 : 그렇다면 오늘날 정신의학은 몸의 개념보다는 신체 개념으로 정립된 의학이라고 봐야 되는

것이군요.

철학자 : 현대정신의학은 근대의학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정신의 영역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다만 정신은

물질의 작용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현대정신의학에서는 정신을 정신 자체로 다루지 못하고, 정신은 단지 호르몬의 작용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정신의학에서는 약물투여를 통해 정신의 문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겁니다.

탐구자 : 그것은 바로 데카르트가 천상에 있는 이데아를 부정한 결과, 내 신체 안에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

하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부작용이겠군요.

철학자 : 그렇습니다. 플라톤의 천상의 이데아를 부정한 철학이 고대에도 있었습니다. 바로 스토아 철학

이죠.

플라톤은 신체(물질)에서 해방된 영혼이나 정신을 가지고 천상의 이데아 세계, 즉 형상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물질을 제거한 본질, 또는 실체를 찾고자 했습니다.( 이정우,

[시물라크르의 시대], 89)

그러나 스토아주의자들은 물질 안에서 지상의 세계를 사유했습니다. 즉 물질을 통해 발생하는

정신적 현상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분석가 : 오늘날 정신의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약물치료가 바로 스토아 철학의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사고하는 것 자체가 바로 물질의 운동, 또는 원자의 운동’이라고 보듯이,

정신의학에서도 기쁨, 슬픔, 분노, 즐거움 등의 인간의 다양한 감정뿐 아니라 우울증, 분열증, 불안

등 심리적 증상들도 호르몬의 작용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의학은 약물을 가지고 심리적 증상들을 조절하면서 치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철학자 : 그렇다면 정신의학은 각종 정신적 작용, 심리적 작용 등의 실체를 물질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뇌과학에서도 정신적 작용을 뇌파의 작용이라고 보고 있죠. 이런 사상들이 모두 스토아

철학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탐구자 : 그렇다면 심리적 증상을 놓고 너무 다른 관점이 공존하는 셈이군요. 어느 쪽이 옳은가요?

분석가 :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차이일 뿐입니다. 각자의 분야가 서로 다른 분야

를 인정함으로써 상호 보완적 관계가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판단은 각자의 몫인 셈이죠. 신체와 정신의 통합적인 지점을 찾으면 몸의 개념으로 개진될 수도

있으니까요.

탐구자 : 정신의학이 정신이나 영혼을 배제한 신체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정신과 의사들은 신앙을 가질 수

없는 것인가요?

철학자 : 그 답은 데카르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위에서 데카르트는 신앙과 학문을 분리

시켰다고 말한 적이 있죠.

그래서 데카르트는 신앙적으로는 유신론자이지만, 학문적으로는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신의학자들도 임상적으로는 정신의 고유성을 인정할 수 없지만, 개별적으로는

정신활동과 영적 현상들을 신앙 속에서 받아들이는 데에 문제가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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