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자 : 자아와 자기의 관계성이 중요하다는 말을 예전부터 많이 들어왔습니다.
둘 사이의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에 대한 이해가 중요할 것
같은데, 무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어떤 분석가는 꿈 분석을 강조하던데요.
분석가 : 무의식을 이해한다는 것이 꿈의 세계뿐 아니라, 의식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의식을 확장한다고 무의식이 되는 것도 아니고, 프로이트의 주장처럼 무의식
을 의식화하는 것으로 그쳐서도 안 됩니다.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을 의식화시키는 작업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죠.
'자기(self)'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확장하는 것, 인간의 본성을 알아가는
것 외에도 궁극적인 관계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라는 것 자체가 관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위니캇을 공부하는 입장이라면,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인간 본성 탐구의 목적은 곧 '관계성'에 대한 이해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위니캇은 무의식 세계를 ‘관계성’ 차원에서 매우 구체적인 방법으
로 접근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니캇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온 선천적인 본성을 어머니와의 관계
경험을 통해 어떻게 발현하느냐, 그리고 선천적 본성이 발현의 정도에 따라서
인간의 본능과 충동이 그 인격에 얼마만큼 자발성과 창조성의 근원으로 자리
잡게 되느냐는 주제들을 다룹니다.
탐구자 : 그렇다면 무의식의 세계라고 해서 꼭 어떤 환상적인 세계, 환각, 꿈의 세계
등과 같이 현실의 반대 측면이라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그런 것이 아닐 수 있겠
네요.
인간의 본능과 충동이라고 말씀하시니까, 그렇게 무의식 세계를 접근하면 몸의
세계가 매우 중요해지는 거군요.
분석가 : 맞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몸은 곧 무의식이다’라고 선언
했습니다.
위니캇의 ‘아동 정서발달’ 이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몸’이죠.
몸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위니캇을 비롯한 대상관계 이론가들이나 칼 융 그리고 철학자 폴 리쾨르 등은
‘자기’를 자신의 이론 중 중심의 자리에 놓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 우주의 만물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자기’로
연결되어 있다고 전제합니다.
신학자 : ‘자기’라는 개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발명한 단어로서, 철학적으로 플라톤
이래 오늘날의 철학과 신학을 꿰뚫는 개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자기는 곧 하나님’입니다((Phillip Caryd의
[August. ine’s Invention of the Inner Self]).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런 명제는 플라톤 철학과 성경을 함께 연구하여 철학과
신학의 통합적 관점을 만들어낸 결과에서 나온 것입니다.
좀 오해가 있을 수 있는 표현이지만, 자기의 관점에서 볼 때, 우주 만물은 하나
님을 외화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주만물을 다 모아서 하나로 통합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외화(外化)된 만물,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통일(에베소
서 1장 11절) 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시며,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며, 만물을 발아
래 복종케 하시고(엡 1:22) 만물을 충만케 하신 분(엡 1:23)입니다.
만물과 그리스도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는 존재론적인 연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자기’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철학자 : 자기의 개념 밑바닥에는 일자(the One)와 자체성(idem) 개념이 있습니다.
([The Self], Richard Saraji, 5). 일자는 파르메니데스의 용어이고,
자체성은 플라톤의 용어인데, 같은 개념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
다.
현대 분석철학자 스트로슨이 ‘자기’에 대해 표현하기를 ‘관계 중의 관계’라
부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존재의 가장 낮은 단계는 ‘물질’입니다.
사물 중 물질이 아닌 것이 있나요?
그래서 자기의 가장 낮은 단계는 물질의 단계로서 공통된 ‘동일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때 동일성은 ‘sameness’입니다.
그리하여 우주는 물질적 존재로서 하나의 거대한 물질이 되는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는 그것을 ‘일자’라고 불렀습니다.
이 ‘일자’를 플라톤은 ‘자체성’이라는 개념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또 '자체성'과 '동일성'은 같은 의미로 보면 됩니다.
탐구자 : ‘일자’와 ‘자체성’이 같은 개념이라면 굳이 용어를 새롭게 만들어낼 필요가
있을까요?
철학자 : 같은 의미이지만, 일자의 개념으로 놔두면 거기서는 어떤 변화나 발달을 기대.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자체성’이라는 개념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자체성이란, 우주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일자로 놔둘 때는 그 용어가 분화 발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자체’라는 개념을 가져오면, 존재는 자체적인 것도 있지만, 자체적
이 아닌 것, 즉 자체적인 것에서 분리되어 나오게 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존재
의 분화가 가능해지는 겁니다.
'그 자체(per se)'라는 말이 어렵게 들릴 수 있지만, 아가페와 에로스의 차이를
보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아가페는 신적 사랑과 모성적 사랑으로서 그 속성으로 '그 자체'를 가지고 있습
니다.
그러나 에로스는 '그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가페는 줘도 줘도 끝없이 줄 수 있지만 에로스는 주는 만큼 받아야
합니다.
에로스는 풍요의 신과 가난의 신의 결합으로 탄생된 아들이라 결핍과 욕망이
있을 뿐입니다.
아가페는 어머니의 사랑처럼 아무리 줘도 아깝지 않지만, 에로스는 주는 만큼
받지 못하면 억울해지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에 '사랑 그 자체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참고 ; 아가페와 에로스의 차이에 관해서는 나의 Brunch 글 [에로스의 현실 적용적 의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탐구자 : 그렇게 되면 사물이든 존재이든 전체에서 분리된 하나의 존재물이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겠군요.
철학자 : 그렇습니다. 그것은 자기 동일성(sameness) 또는 자기 정체성(identity)
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최대한 쉽게 설명하고자 하니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경우에 따라서 ‘동일성’은 '정체성'과 동일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각 개체는 자기 동일성을 가질 수 있어야 독립된 존재로서 의미(정체성)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sameness부터 설명하면, 동일성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개가 개로서의 동일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다른 개들과 동일한 요소들을 가
지고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다른 개와의 유사성인 셈이죠.
둘째, 저 개가 철수 집에서 태어나서 '아름이'라는 이름을 받고, 잘 자라게 되어 성
견이 될 때까지 그 개는 시간의 변화에 관계없이 같은 개인 거죠.
말하자면 철수 집에서 '이름이'로서의 동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의 동일성은 '아름이'로서의 고유성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자체성을 가지고 있고, 개는 개로서 자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체성은 위의 첫 번째 동일성과 비슷하죠.
이러한 자체성이 위의 두 번째인 자기 동일성으로 분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자
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누구나 자기만의 고유한 정체성(identity)을 가지게 됩니다.
탐구자 : 매우 복잡한 내용으로 들립니다.
자기 동일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저는 어느 뇌과학자(박문호 박사)의 이야기를 떠 올렸습니다.
뇌세포의 형성에 관한 진화론적으로 박문호 박사의 설명입니다.
지구상에서 생물의 진화가 있게 된 것은 단세포가 다세포로 증식이 가능해지면
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단세포 균으로 있던 미토콘드리아가 단세포 안으로 들어가서 흡수
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하면 그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생명 발전소’
기능을 하게 되면서 진화가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미토콘드리아가 없으면 우리가 먹는 음식을 영양소로 분해하거나 에너지를
하나의 세포 안에는 수백 개 내지 수천 개의 미토콘드리아가 존재한다고 해요.
분석가 : 자체성이 동일성으로 분화해 가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자체성에서 독자적인 존재로서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개입
이 반드시 필요한 법입니다.
아기가 탄생하면 인간 존재로서 자체성을 얻었지만, 혼자서는 절대로 자기 동일
성을 획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라는 타자, 아버지라는 타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인이 되면, 한 개인 안에는 부모 외에도 동일시하여 내면화된 수많은 타자들
을 보유하게 됩니다.
그것은 꿈을 꿀 때 알 수 있습니다.
탐구자 : 꿈을 꾸다 보면, 매우 어릴 때 함께 놀았던 친구들이 나타나는데 제 기억 속에.
서는 이미 사라져 버렸던 이미지들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 타자
로서 남아 있는 것이군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그런 타자들이 내 인격의 부분 부분들을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라는 존재는 이미 수많은 타자들과의 관계성 속에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