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와 자아를 구별하기

자기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 우주와 연결된 심급이다

자기(self)와 자아(ego)


탐구자 : 요즘 심리학책을 보면 어떤 책에서는 ‘자기’라고 하고 어떤 책에서는

‘자아’라고 하는데 이 둘이 같은 것인가요 아니면 다른 것인가요.


분석가 : ‘자기’와 ‘자아’는. 구별해서 사용해야합니다.

우선 용어의 개념부터 구별해 보죠.

영어로 '자기'는 self이고, '자아'는 ego 입니다.

철학, 심리학 관련 번역서적에서 원저자는 self와 ego를 구분해서 사용

하는데 번역자가 구분하지 않고 번역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번역자들이나 심리학, 상담학을 공부하신 분들도 '자기'의 개념을 잘 모르

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먼저 '자아'라 함은 내가 알고 있는 '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데카르트가 말한 '생각하는 나', '현실과 가장 밀접하게 접해 있는 나', 보통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나'는 '자아'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기는 포괄적으로 보면 자아를 포함한 전(全)인격적인 심급입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입장에서 보면 자아는 타락한 자아입니다.


신학자 ; 성경에서 그 둘 사이의 구별은 보다 명확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구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6~18)

철학자 : 철학에서나 심리학에서 지금까지 ‘자아’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들이 있어

왔습니다.

인격에 ‘자아’만 있고 ‘자기’가 없다면, 인간은 타락한 인간으로서 회복의

가능성이 희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분석가 : ‘자아’의 개념은 프로이트가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우리가 가진 인격의

구조 중에 가장 현실에 맞닿아 있는 심급이지요.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기'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정신분석학에서 '자기'의 등장은 프로이트의 후계 그룹인 <대상관계

이론>의 멜라니 클라인, 도널드 위니캇, 하인즈 코헛의 <자기심리학>

에서 가능했습니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개념은 크게 확대 됩니다.

대상관계이론가들에게 있어서 자기의 self 개념은 oneself의 개념이라

면, 칼 융에게 있어 '자기'의 개념은 전우주적 개념으로 확장됩니다.


철학자 : 철학에서는 '자기'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플라톤의 이데아 분여

이론이 일종의 '자기'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플라톤이 말한 천상의 이데아를 각자 안에, 각 사물

안으로 끌어들였다고 볼 때 '자기'의 내면화를 이룩한 철학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2500년의 철학의 역사는 이 두 철학자의 계보를 잇는것이라

고 보면, '자기'의 개념은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근대철학자 중에는 존 로크(John Locke)는 'self'라는 용어를 명시적

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기의 개념을 정립하는 것을 자신의 철학적 과제로 생각하고

자신의 철학을 전개해 나간 현대 철학자가 바로 폴 리쾨르(Paul

Ricoeur)입니다.



탐구자 : 제가 알기로는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그리고 일상적

으로 가장 중요한 개념이 '자기'라고 생각하는데, 지금까지 '자기'는

그 중요성에 비해 너무 도외시 당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자아와 자기의 관계를 정립해 본다면, '자아'는 '나의 주체'라면

'자기'는 '나의 주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신학자 : 맞습니다. 사람들은 자아가 나에 대해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주체는 될 수는 있어도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만일 어떤 과학자가 로봇을 만들었다 칩시다.

과학자는 로봇이 스스로 작동할 수 있도롤 프로그램화시킬 것입니다.

로봇은 자신의 프로그램대로 작동될 수 있을 뿐입니다.

만일 그 로봇이 기계적으로 고장이 나거나 운용 프로그램에 이상이 발생

했다면, 그 제작자가 고칠 수 있습니다.

로봇은 자신의 오류나 고장을 스스로 고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체와 주인의 차이, 또는 자아와 자기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아’의 회복을 위한 ‘자기'


탐구자 : 신학적 문제로 자아 타락에 대한 이슈,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자아가 낳은

증상 회복을 위해서는 자기의 역할이 중요하겠네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정신적인 증상이나 마음의 병을 얻으면 일반적으로 자아를

잘 고쳐보려고 노력하지요. 프로이트가그랬습니다.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를 건강하게 세워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아를 치료한다고 해도 그 목적을 '자아를 '자기화'하는 데에 두면 됩니다.


철학자 : 자아를 자기화하는 것은 철학에서도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

다.


socrates-5650230_1280.png

많은 철학자들이 '나'를 '자아'로 한정했거든요. 플라톤의 대화편의 초기

저작에 나오는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 그 '너'

는 '자아'입니다.

그런데 플라톤의 중기저작부터는 이데아론이 결합되면서 '자아'는 '자기'

개념으로 바뀌거든요.

그때의 '자기'는 더 이상 무지한 '나'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철학에서는 '자기'의 개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아'로

제한하여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만일 우리 안에 있는 인격이 자아이기만 하다면,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 도덕심과 이기심 사이, 감정과 이성 사이

를 오가면서 중심점을 찾지 못한 채,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확립.

하지 못한 채 늘 혼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분석가 : 자아가.인격의 전부라면 우리는 현실에 찌들어 증상을 반복하는 현대인들

은 건강한 정서를 회복하기는 매우 힘들 것입니다.

칼 융이나 위니캇, 하인즈 코헛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은 ‘자아’와 함께 작용

하면서 자아의 중심이 되기도 하고, 자아의 바탕이 되기도 하며, 자아의 존재

목적이 되기도 하는 ‘자기’라는 심급을 우리 내면인격의 실체로 제시합니다.

프로이트는 데카르트 이후의 의식 위주의 자아 개념을 깨뜨리고 무의식적

자아를 발견함으로써 주체의 영역을 크게 확대하였지만, ‘자기’의 개념을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신학자: 프로이트의 인간론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 분위기는 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존재’라 말할 수 있을 뿐이어서 매우 우울합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누구나 근친 상간적 욕망을 억압함으로써 도덕적 존재

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러한 죄책감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삶의) 구원의

도구를 갖지 못했습니다.

즉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영적인 차원을 배제하고 있어 자아에 갇혀 진정

한 자유를 꿈꿀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위니캇은 ‘자기’라는 구조를 제시하면서 삶의 구원의 희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니캇은 자기 안에 있는 ‘원선’을 보았기 때문에 그 희망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 ‘원선’이라는 것은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진 상태가

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선한 부분입니다.


탐구자 : 지금 그 말씀은 듣는 제게 큰 힘을 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아로만 살아갈 뿐, 자기로서 살아가는 법을

알기가 힘들잖아요.

말씀을 들어 보니까, 자기를 알고 자기로서 살아간다면 인간을 이해하고

삶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흔히 말하는 정신적인 증상과 같은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신학자 :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을 파악하는 데에는 자아의 심급만으로 충분하다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사는 인생을 살면서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라고 여기면

서 살다 생을 마감하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 아니겠어요?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이 구성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차원들을 이해면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천체물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아기가 태중에 잉태하면 몸을 가지게 되는

데, 그 몸은 천지가 창조되던 태초(물론 천체물리학자들은 태초라는 단어

대신에 빅뱅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의 3분 이내에 형성되는 산소, 탄

소, 수소, 질소 등 기본원소를 최초의 별에서 가져와 형성됩니다

말하자면, 천지창조가 엄마의 태중에서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입니

다.

이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것은

어부성설입니다.


탐구자 :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책들을 많이 읽어서 현실을 보는 다양한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겠군요.


분석가 : 책을 읽어서 정보나 지식의 양이 늘어난 결과 현실을 보는 다양한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것은 여전히 ‘자아’를 사용하는 방식에 불과합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는 것은 자아의 심급을 강화하는 데 그친다면 그 지식은

자신의 인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지식의 높이만큼 교만

의 탑을 쌓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적은 지식이라 할지라도 그 지식을 ‘전유(appropriation,

자기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아를 관장하고 있는 ‘자기’의 심급을 확보해야 합니다.


탐구자 : 그렇다면 ‘자기’라는 것은 내가 만들어내야 하는 그 무엇인가요?


분석가 : 아닙니다. 자기는 이미 내 안에, 마음의 보좌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자기’를 발견하고 그것을 발달시켜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

합니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자기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내면화하여 심리적

구조를 공고히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일 심리적 구조가 취약하거나 결핍, 또는 증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심각

성의 여부에 따라 그 구조의 필요를 채워줘야 합니다.


탐구자 :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은 어떤 일정한 패턴이 있는 것인가요?


분석가 : 아닙니다. 정신분석 이론가들마다 자기를 발견하고 발달시켜 나가는

내용과 방법이 다 다릅니다.

지금 독자들이 보고 있는 이 책은 ‘위니캇은 자기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밝히고자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탐구자 : 자아의 회복을 위해 자기가 필요하다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분석가 : 자아 중심으로만 살아가게 되면 자기와 너무 동떨어지게 됩니다.

자아와 자기의 거리만큼 병리 또는 증상을 가지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부인은 이런 항의를 합니다.


‘문제는 남편에게 있는데 왜 내가 증상을 앓아야 하는가?’


이 말은 자아의 측면만이 전부라면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자기의 측면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부인이 그런 증상을 자각하는 시점이 바로 자기 안에 있는 ‘자기’를 발견.

할 수 있는 기회인 셈이죠.

무엇보다 자아를 자기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자아와 자기를 별도의 심급이지만 자아가 자기와의 연결선상에 있으면서

자기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자아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철학자 : 칼 융이 분석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은 적이 있습

니다.

doll-1294206_1280.png

니체의 초인은 자기를 배제하고 초월적인 자아를 갖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칼 융은 이 초인이 자기를 만나지 못하고 옆으로 피해가는 순간을 포착합

니다.

초인은 자아를 계속 팽창해 가는 존재입니다.

그 초인과 동일시 되었던 니체는 실제로 자아 팽창의 문제로 식물인간이

됩니다. 니체는 식물인간 상태에서 10년 정도를 살다가 죽게 됩니다.


탐구자 : 결국 니체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자아로만 살고자 한 결과 비극을

맞이한 셈이군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인간의 본래적 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