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원선(Original Goodness)
탐구자 : 위니캇은 “삶은 힘들고 모든 인간에게, 즉 태초로부터 우리 모두에게 삶은 본래부터 어렵
다”라고 말했습니다.
분석가 : 위니캇이 그 말을 할 때는 여러 가지 내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위니캇은 ‘태초’를 언급하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말합니다.
위니캇이 아담의 인격에 관해 언급하면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였지만, 타락한 인격은
본래적 선함, 즉 타락 이전의 원선(original goodness)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저는 위니캇의 이런 관점은 신학적 인간, 철학적 인간을 규정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학자 : 맞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100% 악한 사람 없고, 100% 선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100% 선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신적인 존재이고, 100% 악하다면 그것은 사탄의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 선하고, 어느 정도 악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 그것을 철학에서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으로 설명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현대 과학기술에서 이르러 세탁기를 만들면서 퍼지(fuzy theory)로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급격한 발전이 일어나 지금 그 이론은 인공지능의 발달로 이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퍼지이론은 플라톤의 이데아 분여 이론 또는 분유 이론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격을 논할 때도 어느 정도 선하고 어느 정도 악하다, 또는 인격의 어느 부분에서는
선한데, 어느 부분에서는 악하다고 말할 수 있죠.
신학자 ;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존재이기 때문에,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처럼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한테 좋으면 선하고, 나쁘면 악하다고
생각하는 '자기애적 판단 기준'이 문제입니다.
분석가 : 그렇게 말씀하시는 부분에 대해서 저도 동의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 인격의 출발점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자기애적으로 사는 것이 내 운명이다' 고 주장하게 되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없어집니다.
그것이 맞다면, 법체계도 바뀌어야 되겠지요.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범죄는 '선악과를 먹은 존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고 해 버리면,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이 사라져 버립니다.
철학자 : 동의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자유함을 얻는 역사이며, 자유에 대한 높은 책임감을 가지는 존재로
발달해 가는 역사입니다.
그 결과 사람은 사회적으로 성숙해 가면서 도덕과 윤리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가 좀 다른데, 도덕은 그 사회의 구성원이 함께 공유하는 사회적 책임감이라면, 윤리는
매우 개별 존재로서 자기 책임의식입니다.
사회적 도덕적 기준이 높아지고 개인의 윤리의식이 발달하면 그만큼 사회는 조화롭게 분화되어 가면
서 사회 구성원을 성숙하게 만듭니다.
신학자 : 저는 위니캇의 <원선>에 대해 언급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원선이 내면에 있음으로 해서, 사람은 악을 가진 존재로서 선을 지향할 수 있는 확고
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거든요.
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먹도록 하나님은 왜 가만히 있었느냐 는 애꿎은 질문을
하죠.
어떤 신학자는 이 부분에 대해 예정론으로도 해명하기도 하고, 또 어떤 신학자는 인간은 하나님이 로봇
처럼 프로그램화된 존재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 교리들을 내어 놓습니다.
저는 좀 더 긴 안목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긴 안목이라는 것은 창조와 종말, 즉 시작과 끝을 한 축으로 볼 때 사람이 아담의 상태에 머물
러 있지 않고 성숙을 지향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타락을 허용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장차 종말론적으로 도래하는 세계는 에덴동산의 회복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아담과 하와의 원래 인격 상태 회복도 아닙니다.
에덴동산보다 훨씬 나은 하나님의 나라, 아담과 하와보다 훨씬 성숙한 인간을 지향할 수 있도록 계획
되어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 : 장차 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악이라는 것이 없고, 타락도 없는 세상일까요?
신학자 :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세계에서는 사람, 그는 바로 부활체로서 인간 입
니다.
그 상태는 아담보다 훨씬 성숙한 상태입니다..
그때는 세상이 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악이 있어도 사람이 그 악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능히 악을
이기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분석가 : 제가 제지하지 않으면 두 분(철학자와 신학자)이 너무 멀리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분의 관점은 정신분석적 인간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프로이트는 ‘죄책감이 많은 인간’으로서 부정적 인간관을 가지고 있는 반면, 위니캇은 '원선'을
가진 존재로서 매우 낙관적인 인간관을 언급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니캇이 인간의 타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그러한 두 가지 측면은 위니캇이 제시하는 ‘거짓 자기’와 ‘참 자기’의 관계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위니캇은 어떤 악인이 악을 행할 때는 거짓 자기(false self)를 사용하지만, 그 거짓 자기 안에는
참자기(true self)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극악무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본래적 원선을 회복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희망
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신학자 : 저는 실제로 그런 변화를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김기환을 두목으로 한 지존파 사건(至尊派 事件)을 기억하실 겁니다.
당시 지존파 일당 7명은 1993년 7월부터 1994년 9월까지 5명을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아주 극악
무도한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체포되고 사형선고를 받게 되죠.
그 과정에서 당시 사랑의 교회의 이재명 집사가 감옥 선교를 하는 중에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극악무도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잔인한 일을 저질렀는가를
알고 크게 회개를 하게 되죠.
그리하여 그들이 사형을 당할 즈음에는 선한 양 같은 인간이 되어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하나
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이야 말로 분석가의 말씀처럼 일평생 <거짓 자기>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는 가장 선한 인간으로
서 <참자기>를 회복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철학자: 프로이트나 위니캇과 동시대에 활동하던 실존주의자들 중에는 야스퍼스 같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도 있었지만, 사르트르 같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도 있었어요.
사르트르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성이라는 것은 없다고 선언한 철학자입니다.
그런 시대에 위니캇이 선천적으로 타고 난 본성으로서 ‘원선’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 것은 그가
탁월한 통찰력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분석가 : 위니캇은 ‘창조적으로 사는 것은 건강한 상태라는 믿음을 포함하고 있으며, 순응은 병든 삶의
기초라는 믿음을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위니캇은 유아가 어머니와의 초기 관계에서 실패를 경험하면 곧 거짓과 순응의 병인의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탐구자 : 탄생 초기에 유아가 어머니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군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생후 첫 1년 동안 어머니와 유아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
다.
그 시기에는 유아가 앞으로 평생 살아갈 수 있는 심리적 프레임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때이기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위니캇이 ‘태초’를 강조하는 것은, 태초의 인간이자 타락한 인간인 아담을 존재의 출발점으로 삼하고
자 하는 목적도 있겠지만, 그것은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각자의 태초(유아기)를 자각시키고자 함
입니다.
위니캇은 우리 각자의 태초의 문제를 태초의 아담과 동일한 상태라는 유비적 관계로 보는 방식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존재론적 문제가 태초의 타락 사건에 달려 있듯이, 각자 인간의 문제 역시 자신의 태초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어머니도 완벽한 어머니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태초의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의 품에서 발생한, 태초(유아기)의 문제로 인해 아담처럼 각자의 삶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요인들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태초의 실패는 각자 유아기 태초의 실패의 원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아’의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자기’가 있기 때문에 자아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능력과 에너지를 동원할 수
있습니다.
탐구자 ; 분석가가 말하는 '자기'가 바로 원선에 해당되는 것일까요?
분석가 : '자기'와 '원선'을 꼭 일치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나 아담의 후손들이 태어나면서 모두 죄인이듯이, 자아는 엄마의 실패로 유아도 어느 정도 실패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기도 합니다.
정신분석적으로 자아의 실패는 관계의 실패입니다.
그 관계의 실패는 엄마와 유아의 관계에서의 남긴 상처, 증상 등을 남기게 됩니다.
위니캇의 ‘아동정신발달’ 이론은 바로 이런 관계 실패의 관점에서 세워진 심리학입니다.
유아기의 실패는 평생에 영향을 미치지만, 사람은 자신의 삶의 긴 여정에서 이 실패를 극복해 감으로써
성숙을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의 실패는 자기의 회복으로 극복되고, 내면에서 자기가 성숙해 감으로써 자아는 현실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다음 글 ; 자아와 자기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