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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2)

청소년의 통과의례(1)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수많은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보는 각도에 따라 논점이 달라질 수 있는 소설이다.

내가 이 소설을 접하게 된 것은 '배세달'이라는 고교 친구의 독서 경험에서 시작된다.

세달은 내게 말하기를,


"[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 같은 책은 옛날에는 아이들이 읽는 소설이라 생각했는데, 읽어 보니까, 이건 어른들이 읽어야 할 소설이더라고. 말하자면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소설인 것이지."

(아래 그림의 DVD는 yes24에서 19세 이하에게는 '판매제한'이 걸려 있다)


이 말을 듣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내용이 궁금했다.

그래서 내가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중이기도 해서, 그 책을 내가 읽을 수 있도록 좀 빌려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선듯 기증하겠다고 제안을 해 주었다.

그래서 참 고마웠다.

빌려서 읽으면 줄도 못 긋고 중간중간 메모도 못하는데 기증을 해 주니 내 책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좋았다.


기증을 받고 읽어보니, 참으로 그랬다.

이 책은 '어른을 위한 동화책'이었다.


이 책은 성인용 책으로 분류된 것은 폭력적이거나 성적장면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도 주인공의 비도덕적 행동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다른 기준에서 이 소설이 어른을 위한 동화책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첫째, 어른의 입장에서 14세 전후의 아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허클 베리가 14세의 청소년 나이가 우리나라에서 중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나이이다.

허클베리의 행동거지를 보면 우리나라에서의 <중2병>과 비교될만하다.


둘째, 이 소설은 그 시기에 허클베리 같은 방황을 충분히 하지 못하면, 결국 성인이 되어 특히 중년이 되어 그 보다 몇십배의 방황을 하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었다.(물론 이 관점은 작가가 제시한다기 보다 내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허클베리의 방황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

심지어 친구인 톰소여와도 다르다.

톰소여는 적극적 모험을 한다면, 허클베리의 모험은 매우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다.

두 모험의 차이는 부모로부터 보호를 받은 양육인지 아닌지에서 벌어지는 것 같다.


이 소설에 대한 두 가지 비판

이 소설은 당시 미국 사회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았다.


이 책은 처음 출간되면서부터 ‘불량 도서’ 판정을 받았다. 주인공 헉 핀이 거짓말과 욕설, 상스런 말을 밥 먹듯이 하며, 당시 미국 사회의 주춧돌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도덕 그리고 학교 교육을 조롱하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출간되자마자 매사추세츠주의 콩코드 도서관 위원회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쓰레기’로 판정하며 도서관 장서목록에서 삭제했다. 또한 미국 전역에 걸쳐 많은 학교에서 이 작품을 학생들이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로 지정했다.(위키백과)


나는 이 소설에 대한 이러한 비판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소설을 향한 첫 번째 비판은 허클베리 핀의 자유분방한 행동들은 도덕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반사회적이라는 점이다.

소설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소설가는 소설을 쓸 뿐이지 도덕적인 이야기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독자는 허클베리 핀이 왜 도덕적이 될 수 없는가를 암시하는 대목에 초점을 맞춰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

작가가 비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작가는 허클베리 핀이 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는 가정환경과 그런 가정을 양산하는 당시의 사회환경을 고발하는 것이다.

허클베리 핀의 이런 반사회적 경향성은 부모가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한 결과다.


그렇지만 어떤 부모도 자녀를 완벽하게 보호해 주지 못한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제대로 양육받지 못한 것을 수많은 기회에 좌절하고 방황한다.

중요한 것은, 아이는 이런 좌절과 결핍 때문에 인생이 망가질 수도 있지만, 헉 핀처럼 이 좌절과 결핍은 방황을 잘 해 냄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정신세계를 발달시켜 갈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허클베리 핀의 상황은 통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 늘 두들겨 패기만 한다.

허클베리 핀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둔 '결핍'과 '좌절' 투성의 아이다.

만일 허클베리 핀이 정상적인 양육을 받지도 못한 채 도덕적이기를 강요당하는 가정환경이나 사회적 환경에서 자랐다면 성인이 되어서는 범죄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헉 핀은 왓슨 부인의 보수적인 양육에서 탈피하여 밖으로 돌면서 방황한다.

허클베리는 왓슨 부인의 양자로 들어갔지만 무엇보다 학교를 규칙적으로 다녀야 한다는 것, 매일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매일 기도해야 한다는 것 등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학교 가지 않고 땡땡이치는 것을 좋아하는 허클베리는 왓슨부인에게 늘 두들겨 맞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런 아이가 만일 현실적 좌절을 방황으로 표출하지 못한 채 자라서 성인이 된다면 그는 그가 속한 조직의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좌절을 표출하지 못해 억압하였다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될 것이며, 그의 억압의 정도는 곧 폭발력의 규모가 될 것이다.

다행히도 허클베리 핀은 자신의 결핍과 좌절을 방황하는 형태로 마음껏 드러냈다.

허클베리는 그 결핍과 좌절을 방황하는 것을 충분히 표출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성인이 되어도 불필요한 욕망이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었다.


두 번째 비판은 작가가 기독교를 매우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비판에 대한 작가의 견해는 이미 작품 속에 다 나와 있다.

당시 남북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사회에서 주류문화라 할 수 있는 기독교가 노예제도와 흑인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였기 때문에 마크 트웨인은 소설을 통해 기독교를 통렬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소설 중 기독교를 대표한 인물은 프랑스혁명으로 쫓겨난 자칭 '왕세자'이자 '왕'으로 자처하는 노인이다.

그는 목사이자 사기꾼이다.

그는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해 설교를 한다.

그는 어느 가문의 가장이 사망하여 슬픔에 빠진 집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죽은 사람의 형으로 위장하여 유족들의 재산을 가로채려 다가 진짜 형들이 나타나 부랴부랴 도망치는 매우 파렴치한 노인이다.

마크 트웨인은 그 노인을 당시 혼란한 시기의 기독교의 타락상을 표상하고 있는 인물로 삼았다.


마크 트웨인은 기독교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기독교의 타락상을 비판한 것이다.

오늘날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마크 트웨인의 대표작으로 꼽을 뿐 아니라, 미국 문학의 뿌리가 되고 최정점에 서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 데에는 이러한 두 가지 오해에서 벗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평론가들의 시야가 넓어졌다는 말이다.



부모가 내 삶을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오늘의 글을 이렇게 결론 맺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아마도 좋은 부모를 만나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고 내 부모가 좋은 부모가 아니라고 서운해하거나, 나쁜 부모라고 원망할 필요도 없다.


이 민진의 소설 [파친코]의 첫 부분을 상기해 보자.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렇다.


부모가 내 삶을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과 그렇지 못한 부모를 만난 것은 단지 다음과 같은 차이다.


좋은 부모를 만나 고속도로로 달릴 수 있었던 인생으로 사는 것도 좋겠지만,

그런 부모를 만나지 못해 400km 고속도로 대신 4000km 국도로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차이.


고속도로를 타고 시속 120Km를 달려 목적지에 남보다 빨리 도착하여 조급한 부지런함으로 높은 빌딩을 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4000km 국도를 타고 방황해야 하는 나는 전국을 누비며 산의 풍경과 강과 바다를 즐기고 때로는 계절의 변화도 음미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동네마다 다른 색깔과 다른 냄새를 맡는 등 내 발로 밟은 곳은 모두 정감 있는 내 고향이 될 것이다.


허클베리 핀도 부모가 내 삶을 망쳐 놨다고 분노하지 않는다.

그는 미시시피 강을 따라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덕분에 세상 구경 한번 잘했다!!'라는 자부심에 쩔 것이다.

헉 핀의 이러한 방황 경험은 장차 성인이 되어 자신의 삶을 펼쳐 나갈 추동력이 되고, 그의 방황 편력은 장차 사회적 역량을 발휘할 바운더리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헉 핀의 방황하는 모험은 청소년기에 그가 어른이 되기 전에 마땅히 겪어내야 할 통과의례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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