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설명)
칼과 등불
여성이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두 가지 상징물이다.
칼은 냉철한 이성, 식별, 판단, 분리를 뜻한다.
등불은 위협적이지 않고, 잘 보존된 빛이다.
빛은 의식의 상징이자 그것을 보유하는 여성의 능력을 의미한다. ([She]에서 발췌)
사람들은 부부간에 아무런 갈등 없이 싸우지 않고 잘 지내는 것이
곧 행복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개 부부 상담을 하거나, 부부 관계 교육을 할 때, 부부가 강요받는 것은
부부간에 ‘나이스하게 잘 지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남아 있을까요?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이 잘못된 여성성을 가지고 있고....
자기 아내에게 남편의 잘못된 여성성을 아내의 여성성으로 삼고 남편이 시키는 대로 살라 하고....
그렇게 되다보면 여성의 남성성은 그러한 잘못된 여성성에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는데 옷을 제대로 입을 수가 없죠.
그래서 여성은 자신의 남성을 변화시키는 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성이 자신의 이러한 처지를 인식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자신의 진정한 행복, 가족의 행복의 조건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남성들은 왜 그렇게 잘못된 아니마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자기 성찰 노력을 해 본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남성들은 외부의 객관적 세계를 정복하는 데
중요한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고유한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지고 살아가기 힘듭니다.
남성들은 고유한 인격 대신 모든 남자들에게 공통되고,
집단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한 남성의 집단적인 모습이 외부 세계에서의 활동에서 그쳐야 하는데,
가정에서 부부관계에서,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족관계, 특히 부부관계는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는 절대 여자의 등불이 없이 내면을 성장시키기 어렵습니다.
프시케가 등불로 에로스의 얼굴을 밝히 드러냈듯이, 아내의 등불은 남편의 정체를 드러나게 만듭니다.
남성의 삶에서 여성이 결핍되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남성이 자신 안에 있는 최고의 선을 일깨워 주는 존재가 바로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남성이 외부 세계 경험의 충격으로 아무리 큰 용기를 잃게 되더라도
그를 바라보는 여성이 있다면 존재감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여성이 없으면 남성은 존재감을 가지기가 힘들어집니다.
남자가 내면의 여성성을 만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일상에서 남자가 내면의 여성성을 동반하지 않거나
또는 아내의 여성성을 잘라내고 산다면 남성은 외로움만 더해갈 뿐입니다.
내가 일상으로 만나는 사람 안에도 여성성이 있고, 생소한 환경에 들어가도
따뜻한 분위기와 통할 수 있는 의사소통을 만들어 내는 것도 바로 여성성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성이 자신의 내면의 여성성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아내의 여성성을
자신의 고유한 모양으로 획득해 가는 데에 힘을 보태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여성이 결혼하여 편하게 살려면, 자신의 여성성을 포기하고 남편이 투사하는 아니마를
자신의 여성성으로 삼는다고 「결혼, 여성의 여성성의 죽음의 시작」편 포스팅에서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내면에 있는 남성성에 사로잡힌 채로 살아가게 됩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남편의 여성성을 자신의 여성성으로 알고, 그 여성성에 맞춘 남성성을 가지고 살아가기 있습니다.
이를 바로 잡지 않으면, 자신이 어떤 불행에 처해 있는지, 또는 앞으로 처할 불행에 대해 눈을 감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남편이 가지고 있는 가부장적 아성을 무너뜨린다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도전인 것은 사실입니다. 남편에 대한 도전은 수천 년 동안 지배해 온 가부장적 문화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힘든 상황을 직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여성들이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여성 조상들 대대로 포기하고 넘어 온
가부장적 권위를 내가 감히 어떻게 도전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자신의 인생의 본질을 포기해 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반면 오늘날 사회적 분위가 여성들의 권익이 확장되어 왔고 지위가 갈수록
높아지는 쪽으로 변화되어 온 것은 여성들에게 매우 고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적 상황도 여성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큰 지지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가부장적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여성성을 억압하고 있다면,
당신은 스톡홀름 증후군에 사로잡힌 것과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내면적인 남성성인 아니무스가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경험은 하지만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She]).
자신의 아니무스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을 스스로 지배하지 못하게 됩니다.
남자에게 끌려 다니고, 자신의 아니무스에 끌려 다니고, 남편이 투사한 아니마에 끌려 다니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성 자신은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다면,
이것이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불행의 고리에 연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아니무스에 사로잡힌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아니무스와 관계 맺는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프시케는 자신의 아니무스와 남편인 에로스 사이의 괴리를 알아야 했습니다. \
그래서 프시케는 등불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남편이 자신의 여성성을 투사하여
아내가 남편의 여성성을 자신의 여성성으로 알고 살아가게 되면,
아내의 남성성도 그렇게 위장된 여성성에 맞춰 형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위장된 여성성과 거기에 적응된 남성성을
자신의 고유한 인격인 줄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우 심각한 현상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인데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프시케는 언니들 덕분에 자신의 이러한 상태에서 깨어나기로 작정하게 됩니다.
프시케는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얼굴의 소유자인지 알아내기 위해 칼과 등불을 들었습니다.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에로스의 본 모습을 궁금해 하는 의식의 등불을 켜지 않는다면
프시케는 ‘완전히 무의식 상태’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She])
칼은 현실을 예리하게 분절하여 파악해 가는 것을 의미하고,
등불은 끊임없이 진행하는 의식의 확장을 의미합니다.
현대의 젊은 세대들은 부모님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론으로 살아갑니다.
유교적 문화의 관계성에서는 많이 벗어났고, 가부장적 문화도 발길질을 해 버린 여성들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부모와의 세대 단절이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또는 가부장적 문화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의식의 확장이나 변화에 대한 욕망 없이 무조건 단절해 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는 중에 프시케의 언니들은 ‘등불과 칼’을 준비하라고 조언합니다. 등불이란 무엇인가요?
여성은 중년 중기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온갖 기억들이 기적처럼
되살아나는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기억력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결혼 생활 동안 남편에게서 받은 상처들을 몸으로 기억해 왔던 겁니다.
그런 기억들이 어느 순간 마치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환하게 드러나면서
남편에 대한 분노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끓어 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는 바로 갱년기가 시작되는 징조이죠.
그리하여 여성은 자신의 상처가 떠오를 때마다 남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사건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여성이 등불을 켜게 되면, 남편은 아내의 등불에 엄청난 고통에 시달립니다.
이 시점은 관계의 역전 현상이 일어나서 이미 남편은 여성화되었고,
아내는 남성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자신의 고유한 여성성과 남성성을 회복하기 위해 등불을 켠다는 것은
그 동안 그냥 넘어 왔던 남편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게 대두되는 때를 맞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여성의 등불은 남편의 내면에 거주하는 아니마를 일깨워주며,
남편이 그 동안 가부장적 문화에서 변질이 일어난 아니마에 큰 타격을 주게 됩니다.
남편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은 남편의 정체를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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