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여성의 여성성 죽음의 시작
여신 아프로디테는 아들 에로스를 시켜 프시케에게 화살을 쏘게 하여 죽음과 결혼하게 만들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로스는 프시케를 보는 순간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아마도 에로스가 프시케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저지른 실수,
즉 자신의 화살에 손이 베어 프시케를 사랑하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에로스는 프시케를 아내로 맞을 결심으로 서풍으로 감싸 낙원으로 데려갑니다.
프시케는 살아난 것만으로 다행으로 여겨 에로스에게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Pompeo Batoni, <The Marriage of Cupid and Psyche>, 1756.
남성에게 결혼은 여성이 생각하는 의미와는 완전히 다르다.
남자는 결혼으로 자신의 발달과정에 한 부분을 덧붙이게 된 것이다.
남성의 세계는 결혼으로 강화되고 삶의 기반이 튼튼해진다.
남성은 자기가 아내 내면에 존재하는 프시케를 죽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역할을 남성이 해야만 하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She인용)
여신 아프로디테는 아들 에로스를 시켜 프시케에게 화살을 쏘게 하여 죽음과 결혼하게 만들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로스는 프시케를 보는 순간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아마도 에로스가 프시케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저지른 실수,
즉 자신의 화살에 손이 베어 프시케를 사랑하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에로스는 프시케를 아내로 맞을 결심으로 서풍으로 감싸 낙원으로 데려갑니다.
프시케는 살아난 것만으로 다행으로 여겨 에로스에게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결혼의 의미는 결혼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서 나옵니다.
남편으로부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이해받지 못하는 채,
외모의 아름다움만 내세우면서 출발하는 여자가 바로 프시케입니다.
그리하여 프시케는 결혼식을 올리는 그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성에게 이러한 죽음은 왜 찾아오는 것일까요?
사실은 결혼 전 연애시절부터 여성 자신의 여성성은 죽음을 경험합니다.
남자의 사랑을 받으면서 여성은 자신의 여성성이 사랑받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여성성을 투사하기에 적합한 여성을 찾아 상대 여성의 고유한 여성성 대신에
남성의 여성성으로 덮어 씌워서 자기 환상으로 상대 여성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여성도 남성에게 마찬가지 과정을 겪습니다. 서로 콩깍지를 뒤집어쓰는 것이지요.
남성이 콩깍지를 씌워서 그 콩깍지를 거부하지 않는 여성이 그 남성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자신의 여성성을 뒤집어씌운 그 여성에게 온갖 찬사와 칭찬과 갈채를 보내면서 그 여성의 마음을 가져 오는 것입니다.
여성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여성됨으로 찬사를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남성의 입이 마르지 않는 찬사가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하면 그게 진짜로 들리는 겁니다.
그리하여 여성은 자신의 고유한 여성성을 뒷전으로 밀어내어 버리고 남성이 투사한 여성성으로 뒤집어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여성의 죽음입니다.
여자는 왜 이렇게 자신의 여성성을 죽음으로 몰아가면서 남자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일까요?
남자는 윗사람으로부터는 <총애>를 받고 싶어 하고, 아랫사람으로부터는 <존경>을 받고 싶어 합니다.
남자는 인간관계를 그렇게 상하관계로 보게 되면서 부부관계 조차도 상하관계로 보고 위에서 여자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에 반해 여자는 그런 총애나 존경보다는 <일체감>을 원하기 때문에 남편과의 <일체감>을 가지기 위해
남편이 원하는 <존경>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여자는 자신의 여성성을 희생하게 되는 거죠.
아내는 남편과의 <일체감>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남편이 투사하는 아니마(여성성)을 자신의 여성성으로 삼게 됩니다.
그 결과 여성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결혼 자체가 전제하고 있는 <여성성의 죽음>입니다.
결혼을 통해 여성은 이렇게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여성이 앞으로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신의 여성성을 죽이고 남편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고 돈 잘 벌어다 주는
남편을 건드리지 않고 남편 비위 맞추는 것을 통해 만족을 느끼는 여성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여성들, 최소한 50%(최대 70%)의 여성들이 이렇게 산다고 보면 됩니다.
과연 그런 삶이 행복한가는 주관적인 판단의 영역이긴 하지만,
불행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자신의 내면의 진실에 직면할 용기가 없는 것일 뿐입니다.
남성은 여성에게 도대체 왜 그럴까요? 남성의 여성성은 대개 유아기 때부터 경험한 어머니 경험과 모성적 이미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성들의 이상형은 ‘엄마 같은 여자’입니다. 그것은 남성이 여성을 가장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남성이 그런 모성적 여성성을 투사하여 찾은 여성은 결혼 후에 남성이 매우 다루기 쉬운 아내가 됩니다.
그런데 부부관계가 이런 형태로 계속되는 것은 분화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삶이 중년기, 노년기까지 계속 이어 진다면, 내면에 억압되어 있는 여성의 여성성은 얼마나 공허하고 외롭겠습니까?
노년이 되어서야 겨우 깨달아서 지금이라도 내 인생을 살아야 되겠다고 반기를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황혼 이혼’이 바로 그런 경우에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여성성의 죽음은 꼭 황혼이혼까지 가지 않더라도 다른 모양으로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여성성을 포기한 여성은 자신의 고유한 삶을 찾지 못할 뿐 아니라,
남편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통한 자아실현을 추구합니다.
자신이 남편의 여성성의 포로가 되었듯이, 여성은 자신의 자녀들을 포로로 삼게 됩니다.
그것도 사랑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며, 엄마가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알아서 공급해 주게 됩니다.
이런 여성은 남편이 원하는 아내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아울러 아내는 자녀로 하여금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줍니다.
자녀가 스스로 어떤 판단을 하기도 전에 엄마가 미리 알아서 다 챙겨 줍니다.
결혼생활 과정에서 엄마 자신의 존재가 무시되었듯이, 엄마는 자녀의 존재도 무시해 버립니다.
자녀는 인생 방향을 잡아가는 데에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엄마가 여러 상황에서의 결정과 선택을 다 해 주니 엄마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엄마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이 요구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잘 알거든요.
엄마는 자녀가 자기 존재로 사는 것을 원치 않고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으로 자녀를 만들어갈 때,
엄마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남보다 훨씬 경쟁력 있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사회 진출을 해 낼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만 생각해 보죠.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녀가 과연 인생에서 성공한 것일까요?
자기 존재가 무시되고,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 억압되고, 사회적 가면을 쓰는 데에만 유능해진 사회적 능력자!!
엄마 자신이 자기 존재로 살지 못한 만큼 자녀도 자기 존재로 살지 못하게 만든다면 성공적인 자녀 양육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사회적 능력자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는 것은 사실이지만,
불행하게도 거기에는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엄마가 발라놓은 약발은 40대 초반까지 통할 뿐입니다.
사회적 능력자들은 40대 중반만 되어도 외롭다, 공허하다 한탄하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엉뚱한 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엉뚱한 짓이란 설명하지 않아도 독자들도 잘 아실 겁니다.
대한민국의 40~50대 중년 남성들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를...
그 덕에 대한민국 경제는 외곽지역까지도 잘 돌아갑니다.
밤 문화가 활개를 치고... 유흥가가 흥청망청... 새벽 5시에도 노래방과 노래방 사이를 넘나들며 출근하는 여성들...
이렇게 남성들은 여성성을 내면화시키지 못하고( 공간과 공감 블로그: “3. 현대 남성들의 여성성” 참조)
여전히 외부로 투사하느라 바쁘죠. 100세 시대에 이제 절반을 보낸 나이에 벌써 허무하고 공허하고 외롭다 하면 어쩌자는 걸까요?
이렇게 한심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현대인은 바로 ‘자기 존재’로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흔히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성은 자녀가 아닌, 자신의 남편을 통해 자아실현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각자가 자기 존재론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혼으로 죽었던 여성성을 부활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활’은 말이 좋아 부활이지 부부 간에는 긴 고통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는 결혼한 부부가 긴 세월을 두고 반드시 실행해야 할 역동이 있습니다.
여기서 결혼의 의미가 발생하고, 부부가 함께 살아야 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며,
부부가 인격이 성숙해 가는 과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앞으로 계속하게 되는 이야기는 바로 여성성의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결혼을 통해 여성은 이렇게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여성이 앞으로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신의 여성성을 죽이고 남편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고 돈 잘 벌어다 주는
남편을 건드리지 않고 남편 비위 맞추는 것을 통해 만족을 느끼는 여성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여성들, 최소한 50%(최대 70%)의 여성들이 이렇게 산다고 보면 됩니다.
과연 그런 삶이 행복한가는 주관적인 판단의 영역이긴 하지만,
불행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자신의 내면의 진실에 직면할 용기가 없는 것일 뿐입니다.
남성은 여성에게 도대체 왜 그럴까요? 남성의 여성성은 대개 유아기 때부터 경험한 어머니 경험과 모성적 이미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성들의 이상형은 ‘엄마 같은 여자’입니다. 그것은 남성이 여성을 가장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남성이 그런 모성적 여성성을 투사하여 찾은 여성은 결혼 후에 남성이 매우 다루기 쉬운 아내가 됩니다.
그런데 부부관계가 이런 형태로 계속되는 것은 분화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삶이 중년기, 노년기까지 계속 이어 진다면, 내면에 억압되어 있는 여성의 여성성은 얼마나 공허하고 외롭겠습니까?
노년이 되어서야 겨우 깨달아서 지금이라도 내 인생을 살아야 되겠다고 반기를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황혼 이혼’이 바로 그런 경우에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여성성의 죽음은 꼭 황혼이혼까지 가지 않더라도 다른 모양으로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여성성을 포기한 여성은 자신의 고유한 삶을 찾지 못할 뿐 아니라,
남편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통한 자아실현을 추구합니다.
자신이 남편의 여성성의 포로가 되었듯이, 여성은 자신의 자녀들을 포로로 삼게 됩니다.
그것도 사랑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며, 엄마가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알아서 공급해 주게 됩니다.
이런 여성은 남편이 원하는 아내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아울러 아내는 자녀로 하여금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줍니다.
자녀가 스스로 어떤 판단을 하기도 전에 엄마가 미리 알아서 다 챙겨 줍니다.
결혼생활 과정에서 엄마 자신의 존재가 무시되었듯이, 엄마는 자녀의 존재도 무시해 버립니다.
자녀는 인생 방향을 잡아가는 데에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엄마가 여러 상황에서의 결정과 선택을 다 해 주니 엄마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엄마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이 요구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잘 알거든요.
엄마는 자녀가 자기 존재로 사는 것을 원치 않고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으로 자녀를 만들어갈 때,
엄마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남보다 훨씬 경쟁력 있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사회 진출을 해 낼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만 생각해 보죠.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녀가 과연 인생에서 성공한 것일까요?
자기 존재가 무시되고,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 억압되고, 사회적 가면을 쓰는 데에만 유능해진 사회적 능력자!!
엄마 자신이 자기 존재로 살지 못한 만큼 자녀도 자기 존재로 살지 못하게 만든다면 성공적인 자녀 양육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사회적 능력자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는 것은 사실이지만,
불행하게도 거기에는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엄마가 발라놓은 약발은 40대 초반까지 통할 뿐입니다.
사회적 능력자들은 40대 중반만 되어도 외롭다, 공허하다 한탄하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엉뚱한 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엉뚱한 짓이란 설명하지 않아도 독자들도 잘 아실 겁니다.
대한민국의 40~50대 중년 남성들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를...
그 덕에 대한민국 경제는 외곽지역까지도 잘 돌아갑니다.
밤 문화가 활개를 치고... 유흥가가 흥청망청... 새벽 5시에도 노래방과 노래방 사이를 넘나들며 출근하는 여성들...
이렇게 남성들은 여성성을 내면화시키지 못하고( 공간과 공감 블로그: “3. 현대 남성들의 여성성” 참조)
여전히 외부로 투사하느라 바쁘죠. 100세 시대에 이제 절반을 보낸 나이에 벌써 허무하고 공허하고 외롭다 하면 어쩌자는 걸까요?
이렇게 한심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현대인은 바로 ‘자기 존재’로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흔히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성은 자녀가 아닌, 자신의 남편을 통해 자아실현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각자가 자기 존재론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혼으로 죽었던 여성성을 부활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활’은 말이 좋아 부활이지 부부 간에는 긴 고통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는 결혼한 부부가 긴 세월을 두고 반드시 실행해야 할 역동이 있습니다.
여기서 결혼의 의미가 발생하고, 부부가 함께 살아야 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며,
부부가 인격이 성숙해 가는 과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앞으로 계속하게 되는 이야기는 바로 여성성의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