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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flesh)와 몸(body)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신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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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 데카르트는 해부학을 바탕으로 기계론적 신체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체는 영혼과 정신의

고유한 작용이 고려되지 못한 고깃덩어리(flesh)에 불과했습니다. 신체는 상처가 나면 치료하면

되고, 고장이 나도 다시 고치면 되는 한갓 기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다가 심장 기능이 멈추기라도

하면. 신체의 기능이 멈추게 되죠. 그것은 곧 죽음이자, 생명의 끝입니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생각

입니다.

탐구자 : 그건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요?

철학자 : 그렇게 질문한다는 것은 탐구자도 데카르트의 신체관에 물들어 있는 겁니다. 그런 신체관의 문제는

생명이 하늘에서 오는 것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유명한 명제(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통해 ‘개인’의 개념을 가져오기는 하였지만, 19

세기까지 그 개인의 개념은 보편적인 ‘나’인 것이지, 여전히 고유한 ‘나’라고 볼 수는 없어요.

데카르트의 ‘나’는 '몸'이라는 개념이 배제되어 있다는 문제를 낳게 됩니다.

탐구자 : 지금 철학자가 말하는 것이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잘 잡히지 않습니다,

철학자 : 이해합니다. 사람을 자신을 기계론적인 신체개념으로 보는 면이 오늘날에도 심각해지고 있습니

다.

현대인들은 사람의 장기나 신체가 고장 나면 언제든지 3D 프린터기로 프린트해서 갈아 끼우면

된다 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사람의 신체를 그렇게 본다는 것은 영혼이 없는 기계로 보

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만의 고유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탐구자 : 그 말은 좀 이해하기 힘든데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함으로써

‘나’라는 개인을 중세적 집단 개념에서 분리해 낸 것 아닌가요?

철학자 :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신체와 몸의 개념차이를 인정하기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 오해가 발생합니다.

탐구자 : 신체가 몸이고, 몸이 곧 신체 아닌가요?

철학자: 신체는 flesh라면, 몸은 (living) body입니다.

이 둘은 엄연히 다릅니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신체관은 바로 flesh입니다.

데카르트의 신체개념은 해부학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죽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제가 의사나 의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의학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철학자로서의 입장에서 보면

근대의학은 바로 데카르트의 해부학이 출발기원 중 하나에 해당되는 것을 확실합니다.

물론 의학은 현대로 오면서, 현대 생물학, 심리학, 인지과학, 그리고 양자물리학의 학문과 연계되면

서 질병으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기원의 한계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암 진단을 받으면, 의사는 예후 평가하는 기준( Karnofsky Performance

Scale(KPS)에 따라 "폐암 말기입니다. 당신은 6개월 더 살 수 있습니다."라고 죽음을 먼저 선포합

니다.

의사는 암 예후 평가에 따라 환자의 진단, 치료 계획 수립, 예후 예측 등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을 중요한 임무로 여기고 있는 것이지요.

의사의 그런 입장은 바로 죽음을 전제한 신체 개념에 입각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철학자, 심리학자들이 가세했죠.

그것이 바로 '심신환원론'입니다.

심신환원론은 바로 데카르트의 신체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신 환원론자의 신체관, 죽음과 폭력


탐구자 : 유발 하라리가 쓴 ‘호모데우스’의 신체 개념도 ‘고유한 몸’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을 보면,

심신환원론자인 셈이군요.

철학자 : 그렇습니다. ‘호모 데우스’는 고장 난 장기나 신체 부위는 갈아 끼우면 사람의 수명을 500년까지

연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지한 ‘심신환원주의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사람이 나이가 들면 젊은이의 정신을 구입해서 다운로드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신환원주의자들은 자기 신체에 대한 고유한 소유권을 포기하고 상호 공유하는 것은 이기심

을 극복하는 현대판 이타주의의 표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탐구자 : 그것이 어떻게 이타주의가 될 수 있을까요? 냉동인간 보관소에 수많은 머리들만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의문이 많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저 머리를 누구 몸에다 갖다 붙이는 거지?’라고요. 이렇게 냉동된 머리를 위해 자기 몸을

기꺼이 내어 줄 이타주의자가 있을까요?

철학자 : 그래서 내가 근대적 ‘신체관’은 죽음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한 겁니다.

그 죽음의 개념에는 ‘이타주의’라는 미명하에 폭력과 착취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기 머리를 잘라서 냉동해 놓았다가 의학이 발달한 시대가 오면 다시 해동하여 다른 사람의 신체

에 갖다 붙이겠다는 발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0.01%에 해당되는 부자나 특권층에 속하는 사람들

이겠죠.

거기에는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돈의 폭력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폭력은 데카르트의 ‘나는 사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로 시작된 근대적 이성에서

비롯되었고, 근대적 폭력은 제국주의로 나타났습니다.

미개한 국가들을 문명화시켜 준다는 미명하에 정복과 착취와 폭력으로 제3 국가들을 식민지화

했습니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정신과 신체의 분리를 주장하는 데서 시작되었고, 데카르트의 '신체'라는 것은

'몸'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탐구자 : 몸의 개념과 신체 개념이 어떻게 다른가가 이제 좀 구별이 됩니다.


신체와 몸은 어떻게 다른가?


신학자 : 신학에서는 편의상 신체를 '육체'로 칭하는 것이 낫습니다.

영어로는 둘 다 같은 'flesh'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한국말에서는, '신체'라고 하면 철학적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죄의 개념까지 포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육체', '육신'이라 하면 죄의 개념이 확 들어오죠.

사실은 뉘앙스의 차이일 뿐입니다.

신학에서는 '육체'를 쉽게 유혹당하거나 죄짓기 쉬운 것으로서, 악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새 생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육체는 죽여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집니다.

갈라디아서 5:16-17에 따르면, 육체는 성령을 거스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갈 5:19에는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성경은 '몸'을 거룩한 영이 깃드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고전 6:19)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철학자: 철학에서는 철학자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몽테뉴(Montaigne)는 신체와 몸을 동의어로 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방법서" (Discours de la méthode)에서 " 내가 말하는 '몸'이란, 대개 생각

하는 것처럼, 오직 인간의 물리적인 부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말 그대로 나 자신, 나의 존재

전체를 의미한다."라고 말합니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멘느 드 비랑(Pierre Maine de Biran)은 인간의 '몸'과 '신체' 개념을

다루는 철학자 중 하나입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정신의 이중성에 대한 탐구》에서는 인간의 정신활동이 자유의지와 함께 몸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인간의 체감 경험을

중요한 철학적 주제로 삼았으며, 인간의 내적 경험이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인간

의 경험과 인식, 특히 몸과 감각적 경험에 대한 연구로 유명합니다.

그의 철학에서 신체와 몸의 관계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인간의 경험을 단순히 인식이나 이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인간의 몸이 인식과 상호작용하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인간의 몸은 단순히 물리적 존재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상호작용에서 의미를

가지고 인식을 형성합니다.

메를로-퐁티는 몸과 정신을 구분하지 않고, 인간의 몸 자체가 의식과 감각적 경험을 형성하는 것

이라고 봅니다.

그는 인간의 몸이 존재의 근원이자 주체적 존재이며, 몸을 통해 경험하는 것이 인식의 시작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는 인간의 몸이 세상과 일체화될 때, 세상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발생한다는 것을 강조

합니다.


분석가: 철학자의 말씀을 들어보니, 신체와 몸의 관계측면에서 볼 때, 위니캇은 메를로-퐁티의 철학적 견해

와 가장 가까워 보입니다.

위니캇은 신체를 지양하고 고유한 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위니캇은 몸과 정신의 통전을 크게 강조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아기의 몸이 엄마의 몸과 많은 접촉이 일어나야 하고, 엄마와는 몸과 몸이 맞 닿아 있으면서 감각이 발달하고 그 감각은 감정을 발달시키게 되면서 전반적으로 유아는 자신만의

고유한 정서를 발달시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아기는 '고유한 몸'을 획득하게 됩니다.

탐구자 : 그 고유성이라는 것은 배타성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위니캇의 견해에 따르면, 아기는 엄마만의 고유한 냄새, 엄마만의 고유한 소리, 엄마만의 고유한

얼굴, 엄마만의 고유한 피부감각, 엄마만의 고유한 젖맛 등을 통해 감각을 통합해 가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분석가 : 좋은 견해입니다. '엄마만의'라는 것이 바로 '배타성'이지요.

엄마만이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여러 감각들을 아기는 엄마의 품에서 마음껏 경험할 수 있어야 나만

의 '고유한 몸'을 획득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기로서는 자기 정체성을 세우는 기본틀이 되는 거죠.



우주 탄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우리의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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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가 : 위니캇의 ‘몸’ 개념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그런 단순한 고깃덩어리가 아닙니다.

탄생 후부터 아기는 어머니의 사랑과 공감으로 자기애를 채워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주체는 바로 몸으로 자기애를 채우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몸에 자기애를 온전히 채울 때, 그때야. 비로소 이타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몸은 절대 남과 공유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고유한 몸’입니다.

신학자 : 천체물리학자인 이석영 박사는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무거운 원소들이 태양계 탄생

이전의 한 초신성에서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실제로 우리 몸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물의 주원료인

수소는 거의 전부가 빅뱅 우주 초기 3분간 만들어졌다. 우리 몸이야말로 우주 탄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최후의 증인인 것이다. 여기까지 알게 되면 여러분의 우주는 수백억 광년 크기에 달하게 된다.”

([빅뱅 우주론 강의], 19)고 말합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직접 물려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태초의 1초에서 3분 사이에 만들

어진 물질을 가지고 와서 몸을 구성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신학적으로 바꾸면, 하나님의 창조가 6일 만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모태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생명뿐만 아니라, 질병도 사망도 모두 하늘에서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은 후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믿는 것이 올바른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신체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물리적 차원 이상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듭니

다.

분석가 : 위니캇의 몸을 구성하는 것으로 먼저 인격의 핵으로서 자기 동일성을 이루는 I am(나는 있다)

을 획득한 몸이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환경으로 삼는 정서적 관계를 담고 있습니다.

몸의 형성은 신체 접촉이라는 물리적인 관계로부터 시작하여 촉각, 시각, 청각, 후각 등 감각을 통합

해 가는 것으로 비롯되지만 그 과정은 물리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의 관계적, 정서적

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감각의 통합이 잘 일어날 때 유아는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고 피부를 기준으로 하여 몸의

경계를 세우게 되면서 정신적 영적 존재로 성장해 가게 됩니다.


현대 정신의학과 정신분석학


탐구자 :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영향권 안에 있는 오늘날의 정신의학은 몸의 개념보다는 신체 개념으로 정립

된 의학이라고 봐야 되는 것이군요.

철학자 : 꼭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의학은 데카르트의 영향하에서 시작하였지만, 오늘날의 정신의학은 정신과 뇌와의 상호

작용 및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요인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합니다.

탐구자 : 제가 알기로는 정신의학적 치료는 주로 약물로 호르몬을 조절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틀린 말인가

요?

분석가 : 약물치료는 정신의학에서 사용되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며, 정신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접근 방식이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정신분석적 방법론으로 내담자들이 증상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고 있지만, 때로는 정신의학적

접근이 병행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경우도 많습니다.

철학자 : 정신의학적 처방으로서 약물사용에 대한 탐구자의 오해에 가까운 질문과 어느 정도 들어맞는 철학

사조가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스토아 철학이죠.

스토아철학은 플라톤이 말하는 천상의 이데아를 부정하면서 출발하는 철학이죠.

플라톤은 신체(물질)에서 해방된 영혼이나 정신을 가지고 천상의 이데아 세계, 즉 형상의 세계

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물질을 제거한 본질, 또는 실체를 찾고자 했습니다( [시물라크르의

시대], 이정우, 89) 그러나 스토아주의자들은 물질 안에서 지상의 세계를 사유했습니다. 즉 물질

을 통해 발생하는 정신적 현상들을 발견한 것이죠.

스토아 철학자들이 ‘사고하는 것 자체가 바로 물질의 운동, 또는 원자의 운동’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분석가 : 정신분석학과 정신의학은 많은 부분에서 다르기 때문에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만, 현실적으로

는 상호 보완적입니다.

특히 두 분야는 뇌과학 분야 연구에 있어서는 많은 주제들을 함께 공유할 수 있습니다.

20세기까지는 전문가시대라고 하여 한 가지만 잘하는 전문가가 자기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것이라면, 21세기는 여러 학문이 연계되는 통전적 관점으로 가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하는

시기라고 봐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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