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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의존기: 유아 첫 1년

아기는 평생 펼쳐 갈 주름을 가지고 있다

절대적 의존기 : 생후 1년


탐구자 : 사람들은 소위 ‘인격 발달’이라고 하면, 초중등교육, 고등교육을 받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지식을 쌓고 그 지식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기고, 또는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훌륭하게 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인정받고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주로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 위니캇은 유아기 때 인격 발달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군요.


분석가 : 인격의 발달이라는 것은 평생 노력하는 것이죠. 탐구자가 말하는 것은 일종의 교육을 통해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고, 그렇게 받은 교육을 통해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해 낼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아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는 아주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교육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훌륭한 인격을 가지기 위해서는 세상을 통제할 수 있는 지식을 필요로 하고, 그 지식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노련하게 해 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탐구자 : 조선시대 유교 사회의 엘리트들이 그렇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요? 사대부 가문의 양반들이나 선비들이 바로 학문증진을 위해 살았고, 그것이 곧 인격의 도야라고 여기지 않았나요?


철학자 : 그들의 학문 증진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죠. 고대의 성인, 즉 공자나 맹자와 같은 성인들의 사상과 학문 그리고 삶의 태도나 사상을 받아들이려는 목표가 분명했죠. 그러나 그것도 체면문화 때문에 본질이 많이 훼손되었고, 사대부들은 학문을 통해 관리가 되고 권력을 얻어 가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되면서 또 한 번 변질이 되는 거죠. 그래서 오늘날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유교적 학문세계는 사회적 페르소나를 획득하는 데에 중요한 목표를 개인의 내면세계를 도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거죠. 고전적 지식을 가지고 관직에 나가는 것을 소위 출세라고 여겼고, 그 전통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죠. 교육을 통해 인격을 발달시킬 수 있다고 보는 자아심리학과 학문증진을 통한 인격도야를 강조하는 유교적 사고는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분석가 :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도널드 위니캇의 대상관계 이론은 자아심리학과는 좀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일단 위니캇은 개인적으로는 어느 학파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학파이기는 하지만, 그의 정신분석학은 자아 심리학의 계통에 속하기보다는 자기 심리학에 가깝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위니캇처음부터 자기와 자아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시작해요. 위니캇이 말하는 인격발달이란, ‘아동의 정서발달’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니캇은 유아기 때 인격발달을 위한 정서적인 구조를 어떻게 만들어가느냐를 보여주는데, 일단 제일 중요한 단계가 <절대적 의존기> 예요. 이 시기에는 자기의 구조가 발달하고, 상대적 의존기에는 자아의 구조가 발달하게 되죠. 이 두 기간 동안 유아가 수행해야 할 과제가 따로 있죠. 절대적 의존기는 생후 1년 기간 동안에 해당되고, 상대적 의존기는 1년에서 3년까지 해당됩니다.



절대적 의존기 첫 번째 과제 : 몸의 통합


탐구자 : 앞 장에서 분석가, 철학자께서 신체와 몸을 구별해서 설명해 주셨고, 위니캇의 몸 개념을 설명해 주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분석가 : 다른 대상관계학자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위니캇이 생각하는 몸의 중요성은 유아기 첫 1년 동안에는 가히 절대적이죠. 경우에 따라서는 첫 1년 동안 유아의 몸을 어떻게 돌보냐의 문제는 그 아이가 평생 살아가는 동안 삶의 질과 직결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니캇은 아기가 태어날 때의 몸의 상태는 마치 모래알이 뭉쳐 있는 상태와도 같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아기의 몸 상태는 조각나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위니캇이 절대적 의존기 동안에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조각난 몸을 하나의 몸으로 통합해 가는 과제를 수행하는 겁니다.


탐구자 : 아기가 그 과제를 어떻게 수행하는 거죠? 사람이 태어나면 모래알같이 조각난 상태의 몸을 하나의 몸으로 통합할 수 있는 선천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일까요


분석가 : 아닙니다. 아기가 파편화된 몸을 통합하는 데에는 중요한 환경이 필요한데, 그 환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환경은 ‘어머니’라는 환경입니다.


탐구자 : 아기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어머니가 필요하다는 건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어머니’라는 단어에 ‘환경’이라는 단어를 붙이니까 아기가 중심이 되는 느낌과 아기를 잘 양육하기 위해서는 좋은 환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게 왜 색다른 느낌으로 들어오느냐 하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는 오이디푸스를 이야기하지만, 양육이라는 개념과 환경이라는 개념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물론 유아를 보는 관점의 시기가 프로이트와 위니캇은 매우 달라요. 프로이트는 아이가 만 3세에서 6세 사이의 오이디푸스를 부모와의 삼각관계에서 어떤 관계 경험을 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죠. 프로이트에게 3세 이전의 유아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존재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유아의 3년은 생물학적으로 어떻게 발달해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유아가 처한 관계적 환경, 즉 어머니와의 양육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못하죠.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에 초점을 맞춰 오이디푸스 중심으로 세계와 역사와 예술과 문화, 종교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알고리즘을 만들어 낸 공로는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그리고 초기 3년에 대한 연구는 후대의 후계자들의 몫으로 남겨 둔 것이라 볼 수 있어요.


탐구자 : 그렇군요. 그러니까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면, 대상관계이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상호 보완적이기 때문에 인간을 보다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함께 연구해야 되겠군요. 아까 분석가께서 말씀하신 절대적 의존기의 첫 번째 과제라고 하는 ‘통합’에 대해서 말씀을 주시죠.


분석가 : 위니캇의 입장에서 보면, 아기가 태어나서 일생 중 제일 첫 번째 중요한 과정을 수행하는 것인데, 이 통합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 충분히 머물러야 해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아’의 존재와 그 상태를 잘 이해해야 돼요. 아기가 태어나면 산부인과 의사는 아이에 대한 존재규정을 하겠죠.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아기는 키 몇 cm, 몸무게 몇 kg, 팔다리 작용정상, 울음을 우는가 등등… 그런데 아기의 존재를 이렇게 물리적으로 규정하면 어른에 비해 작은 존재에 불과하게 되죠.


탐구자 : 그런 관점이 바로, 앞장에서 언급된, 데카르트의 ‘신체’ 개념으로 아기를 바라보는 관점이 아닌가요?



존재 안에 잡혀 있는 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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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가 : 그렇죠. 위니캇의 ‘몸’의 관점에서 보면, 아기는 평생 살아갈 잠재력을 다 가지고 태어납니다.. 아기가 생후 초기에 통합을 위해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 충분히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바로 그 잠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라고 보면 돼요. 이 기간 동안에 유아는 어머니와 존재론적으로 ‘융합’이 되어갑니다.


철학자 : 독일 철학자 중에 17세기에 활동한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Leibniz)라는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물체도 탄성을 가지지 않을 만큼 작을 수는 없다”라고요. 그 말은, 아무리 작은 물체라 해도 그 안에는 무한한 물체가 있기 때문에 탄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물이 탄성을 가진다는 말은 물질은 중첩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라이프니츠만의 고유한 사고가 나오는데, 그게 바로 주름구조예요. 라이프니츠 연못의 물 안에 물과 고기와 각종 수초 등을 포함하고 있듯이, 대리석조차도 그 안에 수많은 존재들을 접하고 있다고 말하죠(참고서적: 접힘과 펼쳐짐, 이정우 지음. 102 ). 이런 관점에서 유아의 존재를 이해하면, 유아도 평생 살아가면서 펼쳐나갈 수많은 주름들을 보유하고 태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유아가 자라 가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주름을 하나씩 펼쳐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꼭 물리적인 주름만은 아닙니다. 영적 정신적 심리적 주름이 있거든요. 아이가 아동기에 겪은 정신적 발달이나 상황마다 겪는 심리적 국면들, 사춘기가 되면서 반항과 순종을 배워가는 상황에서의 심리적 발달 측면들, 어른이 되어서도 삶의 경험들을 새롭게 해 나갈 때마다 자기 존재 안에 접혀있던 주름들을 하나씩 하나씩 펼쳐 나가는 것이죠.


탐구자 : 저도 신문에서 그런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소의 가죽을 펼치면 약 50평의 넓이가 된다는 거예요. 또 TV에서 어떤 내과 의사가 내시경으로 대장을 쭉 살펴보면 아무리 봐도 ‘숙변’이라는 것은 없다고 단정을 내려요. 그런데 또 다른 의사 선생님은 그건 대장을 외관상으로만 봐서 내리는 결론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대장은 겹겹이 접혀 있는데 대장을 쭉 펼치면 수십 미터로 길어지게 된다고 설명하더라고요. 그래서 숙변이라는 것은 그 겹쳐진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잘 이해가 안 됐는데, 방금 말씀하신 라이프니츠의 주름 개념을 들으면서 확 와 닿았습니다.


철학자 : 라이프니츠가 오늘날에 사회학에서 잘 사용하는 중요한 명제를 선언하죠. “전체는 부분들의 합이 아니다”라고요. 부분을 다 합하면 전체보다 더 클 수도 있고, 또는 부분을 다 합해도 그 전체가 하나의 개체에 불과하기도 하죠. 사물이나 존재자는 매우 복잡한 겁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세계는 무한히 접혀있는 주름과도 같죠. 아마도 분석가께서도 그런 입장에서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분석가 : 맞습니다. 유아는 수많은 주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삶의 방향성이나 목적 달성 또는 삶의 질은 결국 그 주름을 얼마나 현실 속에서 펼쳐 나가느냐에 달려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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