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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페르소나, 자기에 대하여

사람은 주름을 가지고 태어난다


자아, 페르소나, 자기


탐구자 : 앞선 글 중에서 사람은 자아(ego)와 자기(self)를 가지고 있다고 하죠. 이 둘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요?


철학자 ; 자아는 누구나 자신을 알고 있는 그대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자기는 자아와는 차원이 좀 다릅니다. 자아가 현실을 직면하며 살아가야 하는 '나'라고 할 때, 그것은 오직 나만의 것입니다. 그것은 타자와의 경계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자기는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오는 차원의 존재입니다. 자기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것이고, 그와 나의 것이자,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면서, 자연과 우주 등 모두를 연결시키는 존재론적 기관입니다.


분석가 : 자아는 현실과 가장 맞닿아 있어 현실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자아도 옷을 입고 사는데, 그 옷이 바로 페로소나입니다. 페르소나란, 본래적 자아가 아닌 사회화된 자아인 셈이죠. 페르소나는 인격의 요소 중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심급입니다.


탐구자 :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하고,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좋은 대학에 가려고 애쓰고, 졸업장을 따고, 보다 높은 학위를 따려고 하고, 그 졸업장으로 취직하고, 박사학위를 따야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고 등등이 다 자신의 사회적 자아를 형성해 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페르소나 아닌가요?


분석가 : 맞습니다. 아동기부터 페르소나를 위한 교육이 시작되지만, 특히 청소년기부터 청년기, 장년기에는 페르소나를 제대로 갖추어 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과업입니다. 그래야 원하는 위치에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조심해야 하는 것은, 자아가 페르소나에 매몰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아가 페르소나에 매몰되면, 개인의 존재로 살아가기 힘들게 됩니다. 페르소나라는 것 자체가 매우 집단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매몰되면 개별적인 삶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아가 페르소나와 붙어 있기 때문에 그의 자아는 자기를 만나기가 어려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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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자 : 페르소나의 기원에 대해 질문해도 될까요?


철학자 : 원래 고대 그리스 시기에, 연극을 할 때 배우들은 자신들의 역할과 캐릭터를 나타내기 위해 가면을 쓰곤 했습니다. 이러한 가면을 페르소나 (persona)라고 부르며, 희곡 및 비극과 같은 여러 장르에서 사용했습니다. 페르소나는 보통 나무나 털, 가죽으로 만들어졌으며, 배우의 목에 매거나 머리에 씌웠습니다. 가면은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성격, 나이, 지위, 심리, 감정 등을 나타냈고, 또한 배우가 더욱 쉽게 캐릭터에 녹아들어 연기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또한, 가면이 없다면 배우의 얼굴이 드러나 연기를 보는 시청객들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으며, 각 캐릭터의 실제적인 개성을 부각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배우들은 페르소나를 매우 중요한 연극 의상 요소로 여기며, 매번 새로운 가면을 제작하는 일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분석가 : 그런 페르소나를 심리학에서 사용하게 된 것은 바로 칼 융(C.G.Jung)이죠. 심리학적으로 페르소나(persona)는 일반적으로 일상적인 상황에서 사용하는 가상 인격 혹은 가면을 의미합니다. 융은 인간이 자신의 신체, 성격, 인식, 감정 등 모든 측면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일종의 가면을 쓰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를 페르소나라고 명명하였습니다.

페르소나는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 있으며, 인간이 일상적인 상황에서 취하는 역할이나 지위를 반영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일자리에서의 역할과 가정에서의 역할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 지위나 인식도 페르소나에 영향을 미칩니다.

페르소나는 개인의 정체성과 분리된 존재이지만, 개인의 행동이나 실제 성격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페르소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탐구자 : 페르소나의 역사적 기원과 심리학적 기원을 말씀해 주셨는데, 개인에게 있어서 페르소나가 어떻게 기원하는가를 따져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분석가 : 그 기원은 유년기부터 따지느냐, 청소년기부터 따지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Ted 강연 중 Kang Lee의 관찰 실험에 따르면, 2세부터 거짓말을 시작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3세에, 어떤 아이는 4세에 거짓말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5세의 아이들 중에는 약 80%가 거짓말을 합니다. 문제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20%의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대개 자폐 스펙트럼, 심각한 강박증, 아스퍼거 증후군에 속한 아이들이죠. 페르소나는 자아의 이중성인데, 페르소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신학자 : 이 대목에서 제가 잠시 끼여드면, 그것은 신학적인 이야기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는 기본적인 자세는 '죄 지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자폐, 심각한 강박증 상태에서는 죄 지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었으면,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을 들으면, 강박증 환자는 굉장히 고통스러워합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온몸과 마음을 철갑 강박으로 방어를 치죠. 그래서 죄를 안 지을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고 김동길 교수가 이 말씀에 대해, "그것은 인간의 한계니라"라는 의미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분석가 : 청소년기의 기원을 말하자면,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성의 개념이 들어오면서 자아의 본래적 모습을 내면으로 감춰야 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온갖 성적 환상과 건강한 남자아이라면 누구나 시작하는 자위행위 등을 노출시키면서 살 수는 없게 되죠. 그래서 제1 자아와 제2 자아로 분화를 하게 됩니다. 이 제2 자아가 바로 페르소나가 되면서 사회적 자아로 형성되어 갑니다.


자기는 주름을 가지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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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자 : 자아와 자기는 어떻게 출현하는 것일까요?


분석가 : 이 문제를 철학으로 다루면 굉장히 복잡해지겠지만, 정신분석학에서는 그것보다는 좀 단순할 겁니다. 좀 단순하게 말하자면, 프로이트는 아기가 태어나면 원본능(id) 리비도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현실적인 불만이 생기면서 정신 작용이 발생하게 될 때, 원본능에서 분화되어 나오는 것이 '자아'입니다. 그때를 대략 2세 정도로 잡고 있죠. 그런데 위니캇은 처음부터 자아가 있었고, 자아에게 현실개념이 들어오는 1세쯤에 자기가 형성된다고 보죠.


탐구자 : 자아라는 용어는 누구에게나 익숙해 있지만, 자기라는 개념은 참 생소합니다.


철학자 : 생소하다고 해서 그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의 개념은 오랜 철학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플라톤의 철학 안에도 그 개념을 가지고 있죠. 철학자마다 자신의 철학적 개념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바로 '자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신학자 : '자기'(self)라는 용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발명품입니다. 그는 한 손에는 플라톤 철학을, 다른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 연구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자기'의 개념입니다.


철학자 : 라이프니츠는 자기의 개념을 '주름'이라는 개념을 표현했죠. 모든 사물은 '주름'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주름'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겠죠. 이 주름에 대해 지난 세기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 가능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어요. 내가 존경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 뉴스 속에 나오는 모든 상황과 그 상황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동물들, 아끼는 식물들, 광물들조차도 모두 나의 존재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내가 관심을 가지고 또 우리가 이런 관심들을 가질 때마다 내 안에 있는 존재의 주름들을 하나씩 펼쳐 나가겠죠. 플라톤은 작은 돌멩이 안에도 전자가 돌고 있음은 바로 하늘의 별이 한없이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요. 그래서 하늘의 별이 돌아가지 않으면 돌멩이 안에 전자가 돌아갈 이유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돌멩이의 존재 안에는 우주의 이치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인용: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37c~39e. "이와 같은 이치에 의하면, 하늘에 있는 별들은 매일 자신의 궤도를 돌아간다. 그리하여 이들이 하늘에 있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원동운동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비록 하늘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이 여전히 불규칙한 운동을 하고 있건만, 하늘에 있는 별들 뿐만 아니라 작은 돌멩이들에도 그러한 원동운동이 존재한다." )



분석가 : 위니캇이 아기가 엄마 품 안에서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 충분히 머문다는 것은 엄마가 아기가 앞으로 살아갈 존재 가능성들을 다 품어내는 상태로 내려가고 그 존재 안으로 스며드는 상태라고 볼 수 있겠어요. 이 시기에는 이 상태를 충분히 머물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안전하고 따뜻한 품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밖에서 전쟁이 나건, 옆집에서 싸움질을 하건 외부적인 어떤 상황과 관계없이, 어머니만 있으면 되는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죠. 그래서 아이는 아무런 생각 없이 어머니의 품에서 깊이 잠들 수 있고, 눈을 뜨고 깨어나도 어머니만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필요한 겁니다. 아까 철학자께서 식물의 상태도 인간의 존재가능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상태뿐 아니라, 때로는 광물의 상태까지 내려갈 수도 있으면 좋겠죠.


철학자 : 그런가요. 그때(식물의 상태 및 광물의 상태)는 뇌가 있으나 사용할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뇌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운동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거든요. 뇌과학자들이 뇌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할 때 보통 ‘멍게’를 거론합니다. 멍게는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어느 순간에는 바위에 딱 붙어서 운동을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때는 스스로 자기 뇌를 먹어버린다고 하죠. 그러면 유아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기 위해서는 멍게처럼 뇌가 필요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할까요?


분석가 :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유아의 존재 상태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상태라고 볼 수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서 오랜동안 머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봐요. 저는 뇌가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뇌를 세팅하는 것이 하나의 유기체적인 존재로 만들어 가는 바탕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봐요. 하이데거의 용어인 ‘존재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물질로서의 존재 가능성, 광물의 상태 또는 식물의 상태의 존재 가능성에 자신의 잠재력을 포함시킨 상태라고 볼 수 있어요. 물론 거기에 머물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자폐 상태니까요.


탐구자 : 지금 말씀하시는 부분은 앞 장에서 말씀하신 분석철학자 스트로슨(P.F. Strawson)의 ‘관계 중의 관계’라는 개념이 생각나는군요. 사람은 기본적으로 신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 중에 가장 기본적인 측면, 즉 물질로서의 존재를 확인하는 단계이죠. 아마도 유아가 이 단계를 머물면서 물질과 관련된 모든 사물들, 존재자들과 관계 맺을 수 있는 가능성, 또는 존재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라 보이네요. (스트로슨의 [Individual: An Essay in Descriptive Metaphysics]에 나오는 개념)


관계들 중의 관계


철학자 : 스트로슨의 '관계 중의 관계'라는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스트로슨은 모든 사물과 사건의 근본적인 상호의존성이 자아 개념을 낳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아는 고립되고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다른 사람 및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 또는 사물입니다. 즉 스트로슨의 '관계들 중의 관계' 개념은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상호의존성, 복잡성,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러한 요소들이 자기와 세계에서의 우리 위치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임을 시사합니다. 이렇게 보면, 탐구자가 말하는 존재의 물질성은 모든 존재의 가장 낮은 단계에 있는 요소라는 것을 볼 때 맞는 말이기도 하죠.

Paul Ricoeur는 그의 저서 "Oneself as Another"에서 이야기 정체성과 이야기로서의 자기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스트로슨의 '관계들 중의 관계' 개념을 재해석합니다. 관계 간의 관계'는 우리 개인의 내러티브가 주변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얽혀 형성되는 방식을 나타내는 자기의 본질적인 측면이 됩니다.


신학자 : 제가 보기에는 모든 것이 하나의 주제로 모여드는 것 같군요. '관계들 중의 관계'라는 주제는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의 이슈이기도 합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영적 존재로서 친히 육신을 입으셔서 인간이 되시고 죄인 된 인간의 연약함을 몸소 체휼 하심으로써 자신이 창조하신 물리적 우주에 친히 참여하셨어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보혈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엡 1:10)이라는 또 다른 목적을 달성하신 거죠. 그 결과 예수는 ‘만유의 아버지’가 되셔서,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는”(엡 4:6)분이 되신 거죠. 성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결과(물질로서 인간의 육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만물 등이 모두가 ‘자기’로서 연결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자 예수는 자기로서 계시하실 때, 존재의 가장 낮은 단계인 물질로서 성육신 하셔서, 모든 물질(만유)을 통일하시는 만유의 아버지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의 모든 범주를 커버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관계들 중의 관계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분석가 : 신학자의 말씀을 들어보면,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유아의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경험과 매우 유사하다고 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기 위해 영적 존재로서 육신을 입으셨지만, 유아는 그 반대이죠. 유아는 영적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몸의 깊은 부분까지 내려가는 겁니다. 이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 머무는 동안 유아에 모든 외부 상황을 차단한 채, 의사소통이 되지 않은 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앞의 서론에서 탐구자와 철학자께서 스트로슨의 ‘관계 중의 관계’를 언급하셨는데, 스트로슨의 그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탐구자 : 그 두 가지의 개념은 상호 모순이 있는 것 같아요.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관계를 만들고, 그것도 관계 중의 관계… 좀 납득이 가지 않아요. 이 모순이 해결이 되어야 다음단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분석가 : 여기서 ‘관계 중의 관계’를 만든다는 것은 바로 칼융이 말하는 ‘원형’을 만드는 작업이라 볼 수 있습니다. 융은 사람에게 필수적으로 사람이 태어나면 두 가지를 획득해야 한다고 말하죠. 본능과 원형. 본능과 관련해서는 프로이트가 잘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이고, 원형은 융의 설명이 필요하죠. 본능은 한 마디로 몸과 관련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과 관련되지만, 원형은 심리적인 부분이 개입되어 있어요. 위니캇의 입장에서 보면, 본능과 원형 둘 다 어머니의 돌봄이 매우 중요한 환경적 요소로 삼고 있지요. 위니캇이 본능과 관련해서, 자아의 성숙이란 본능경험이 자아를 강화시키는 것이고, 자아의 미성숙이란 본능경험이 자아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소아의학을 거쳐 정신분석학으로} 578) 성숙한 사람은 본능이 가지고 있는 리비도를 힘입어 관계발달과 목표 성취 능력을 한없이 높일 수가 있지만, 미성숙한 사람은 유아기 때 젖을 공감적으로 받아먹지 못하고, 어머니와의 정서적 접촉의 부재, 좋은 품의 경험의 결핍으로 인해 불충분한 본능경험이 삶의 방해꾼으로 작동하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원활하게 작동하는 본능이 제공하는 리비도를 가지고 거침없이 자신의 목표를 성취해 내는 반면, 미성숙한 사람은 본능의 방해를 받아서 늘 작심삼일로 끝나기를 반복하는 사람이죠.


탐구자 : 분석가 말씀을 들어보니 담배나 술을 끊기 힘들어하는 몇몇 사람들이 떠오르네요. 프로이트 말처럼, 아마도 구강기 때 공감적인 젖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고착이 일어나면 그렇게 충동에 사로잡혀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인 거겠죠?


분석가 : 그렇습니다. 구강기 고착이 일어나면, 술․담배 중독자처럼. 계속 몸 안으로 빨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계속 뱉어내야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 평론가, 기자, 비평가의 직업을 가지기 십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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