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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 본능 만족과 원형획득하기

탐구자 :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융(Carl G. Jung)은 '사람은 본능과 원형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본능은 몸의 욕구와 관련되어 있다면, 원형은 정신적인 욕망과 관련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좀 자세한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본능만족>에 관하여


철학자 : 본능에 관한 영향력 있는 이론은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인 Konrad Lorenz의 연구입니다. Lorenz는 동물의 행동을 연구했고 인간도 선천적이고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행동 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동물이 다른 개인이나 물체를 인식하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과정인 "각인"의 개념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Lorenz는 이 과정이 많은 종의 생존에 필수적이며 인간의 행동도 선천적 본능에 의해 유사하게 형성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분석가 : 정신분석학에서 본능을 이론으로 제시한 사람은 바로 프로이트죠. 프로이트는 본능을 id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 의미는 영어로 it라는 뜻입니다.


탐구자 : 이드를 우리나라 말로 바꾸면, '거시기'정도에 해당되는 것이군요.


분석가 : 맞아요. 그런데 아무래도 본능을 정신적 측면에서 다루다 보니 프로이트가 말하는 본능과 Lorenz가 말하는 본능은 좀 다릅니다. Lorenz가 말하는 본능은 동물적인 측면에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영어로 instinct겠지만, 프로이트가 말하는 본능은 'drive'입니다. 말하자면, '욕동' '충동'정도에 해당되는 개념입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생존과 번식과 관련된 기본 본능 또는 충동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드라이브에는 리비도 또는 성적 드라이브와 공격적 또는 파괴적인 드라이브가 포함됩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본능이 무의식 수준에서 작동하며 우리 행동의 많은 부분에 동기를 부여한다고 믿었습니다.


탐구자 : 유아에게 본능만족이 일어나면 유아의 정신적인 삶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신분석학은 이 영역을 밝히는 데 큰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정신분석학은 유아와 아동의 삶에 대한 연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유아가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한다는 것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배고픔, 목마름, 배변욕구 등의 생리학적인 요구가 충족되었을 때, 유아는 안정적이고 안전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유아가 인간의 본성에 따라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배우면서 자신의 자아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적으로 잘 공급하는 것이 본능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충분한 젖이 공급되지 않으면 아기의 구강기에 고착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아기는 먹는 욕구에 불만족을 느끼면서 충동을 발생시키게 됩니다. 성인이 되면서 이러한 고착이 있었던 사람은 담배나 술 중독에 빠지거나 시니컬한 태도를 취하거나 기자가 되는 등의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유아의 본능만족의 부분은 프로이트에서< 대상관계이론>로 넘어오면서 훨씬 정서적인 면, 관계적인 면, 환경적인 면이 강조됩니다. 위니캇의 경우, 엄마가 유아에게 젖을 잘 줬다면, 그것은 공감적인 젖가슴, 따뜻한 젖가슴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젖을 공급받아 본능만족을 얻게 되면, 유아는 나중에 기억하기를 "엄마는 나를 사랑을 많이 줬다"고 기억합니다. 반대로 엄마가 젖을 잘 주지 않거나, 젖을 줬어도 공감적으로 따뜻한 품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유아는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기억합니다. 이것은 유아에게 정서적으로, 그리고 정신적 영적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남깁니다.


탐구자 :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상처는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다. 기억할 수 없는 상처가 오히려 치명적이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인가 보네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사람이 가장 취약한 상태, 그때가 바로 유아기인데, 그 시기에 엄마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여 방치되거나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일평생의 정신적 정서적 영적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할 수 없는 상처가 치명적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원형>에 관하여


탐구자 : 이번에는 <원형>에 대한 주제로 넘어와 볼까요? <원형>이라는 용어는 참 어렵게 다가옵니다. 머리에 잘 잡히지 않는 개념입니다. 원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분석가 : 오늘 주제가 '본능과 원형'인 것을 보면, 아무래도 칼 융을 거론해야 될 것 같습니다. 칼 융에 의하면, 본능과 원형은 인간 행동과 심리학의 두 가지 근본적인 측면입니다. 융은 이 둘을 분명하게 구별하죠. 본능은 개인이 나타내는 선천적이고 생물학적 기반의 행동 패턴입니다. 본능이 배고픔, 갈증, 성적 욕망과 같이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는 타고난 생물학적 충동을 의미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충동들은 생존과 번식을 돕기 위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한 특정 자극에 대한 자동 반사 반응입니다.

반면 원형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모든 문화에 존재해 온 행동, 생각, 감정의 패턴을 나타내는 보편적이고 집단적인 무의식 개념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원형이 스위스 심리학자 칼 융에 의해 처음 기술되었죠. 그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행동, 생각 및 감정의 기본 패턴을 나타낸다고 제안했습니다. 원형은 모자관계, 영웅의 여정, 사기꾼 등 인간의 모든 문화에 존재하는 행동, 사고, 감정의 보편적인 패턴을 가리킵니다.


탐구자 : 원형과 본능이 중첩되는 부분도 있지 않나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의 젖을 빨 때는 먹고자 하는 욕구와 관련된 본능이 있지만, 단순히 본능만 가지고 젖을 빠는 것은 아닙니다. 젖을 빠는 법을 누구에게서 배웠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배워서 젖을 빠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집단 무의식, 즉 아기의 내면 안에 있는 원형이 하는 일이죠.


탐구자 : 집단무의식이라 함은, 인류가 태초부터 지금까지 체득한 모든 경험을 아기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주는 방식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분석가 : 맞아요. 신생아가 다른 여성의 향기나 목소리보다 자신의 어머니의 향기와 목소리를 인식하고 선호하는 타고난 능력이 있음이 밝혀졌는데, 이런 것으로 보아 원형의 작용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탐구자 : 그런데 본능이라는 개념은 과학적으로 뒷받침받는 데에 문제가 없는데, 원형의 개념을 뒷받침하는 명확한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더라고요.


분석가 : 그렇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원형에 대해 본격적으로 언급한 사람은 칼 융이지만, 그는 심리학자이지 과학자는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지만 원형이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존재가 부정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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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강아지의 예를 들어봅시다. TV 프로 중에 애완견의 일상을 담아서 방영한 적이 있었어요. 원룸에서 독립세대로 사는 청년이 애완견을 분양 받아 키우는데 고민이 생겼어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강아지가 집안 물건을 다 흩트려 놓을 뿐 아니라, 침대 위에 배설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CCTV를 달아서 녹화를 한 후, 청년이 강아지의 하루 일상을 보고는 펑펑 울더라고요. 주인 이 집을 나가는 순간부터 하루 종일 발광을 하는 모습을 본 거죠. 그 장면을 보고 동물전문가가 말하기를, ‘이 강아지는 개로서의 원형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개는 어미와 12주를 함께 있어야 개로서 종(種)의 원형을 획득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분양하는 입장에서는 태어난 지 한 달 전후가 가장 귀엽고 예쁘기 때문에 분양가를 많이 제시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12주를 채우지 못한 채 분양되는 경우가 태반인데, 그렇게 되면 강아지가 개로서의 종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강아지도 자기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나마 주인이 있을 때는 자신을 지켜줄 대상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출근하자마자, 스스로 존재 확보를 하지 못한 강아지는 주인의 냄새를 찾기 위해 화장품을 뒤지고, 침대 위에 올라가 주인의 흔적을 찾아 킁킁대며 급기야 그 위에 배설을 하는 겁니다. 분리불안 때문에 견디지를 못하는 겁니다. 종의 원형을 획득하지 못한 강아지는 자신의 종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답니다.


탐구자 : 아, 그렇군요. 강아지의 종의 기원은 늑대가 아니겠어요? 강아지가 하울링(howling)을 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분석가 : 그 강아지는 자신의 분리불안을 하울링(howling)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강아지는 멍멍대야 하는데 늑대의 하울링을 함으로써 ‘나, 받아야할 기본적인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표시를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개로서의 원형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개로서의 종보다 아래 단계로 내려 가는 겁니다.

이런 강아지는 다른 강아지를 만나서 멍멍 짖어댄다 해도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잡소리, 또는 소음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개들 간의 의사소통도 원형획득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거죠.


탐구자 : 그렇군요. 몇 년 전에 서울대학교에서 강아지 유치원을 12주 과정으로 잠시 개설한 적이 있었어요. 요즘은 맞벌이 부부를 위한 강아지 유치원이 여기저기서 많이 생겨나면서 서울대 강아지 유치원은 없어졌다 그러더라고요.


분석가 : 두 유치원은 개념이 좀 다릅니다. 지금은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울대학교에서 운영했던 강아지 유치원은 원형 획득을 못한 강아지들에게 원형을 획득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과정이고, 일반 강아지 유치원은 그게 아니라 그냥 분리불안을 가진 애완견들을 돌봐주는 유치원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탐구자 : 저는 지금 본능이나 원형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획득되는 것인가가 궁금해요.


분석가 : 둘 다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지만, 유아 초기에 본능은 몸이 요구하는 욕구를 얼마나 충족시켜 주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에 극히 개인에 국한됩니다. 본능 충족을 위해서는 우선 아이의 물리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과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본능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 그것은 심리적인 문제로 넘어가서 ‘충동’으로 남게 되죠.

원형도 선천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것이지만,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집단무의식에 속하는 자기 존재를 초월하는 정신성입니다. 원형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것이기 때문에 한 개인의 존재 규모에 맞게 정착시키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어머니의 품에서 하게 되고, 아이가 그것을 위해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겁니다.

개가 원형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엄마와 12주를 함께 있어야 하듯이, 유아가 인간으로서 원형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1년 동안 엄마의 따뜻한 품을 필요로 합니다.


유아의 원형획득 : 몸의 통합


탐구자 : 만일 유아가 원형을 제대로 획득하지 못했다면 아이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건가요?


분석가 : 유아가 자기 정체성을 세워가는 과정에서 먼저 ‘나’라고 하는 동일성을 획득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작업이 바로 원형을 획득을 하는 것입니다. 탐구자의 질문처럼, 원형을 개인의 규모로 제대로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일단 하나의 자아를 형성하지 못하는 상태, 정신이 분열된 상태로 살아가게 됩니다. 또는 편집증 상태로 살아갈 가능성도 있죠. 물론 정신분열과 편집증이 겹칠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존재 차원을 넘어선 원형은 고등종교나 샤머니즘, 신비주의, 화가들의 작품들과 음악, 심지어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화책 속에도 있어서 아이들의 흥미와 재미로 이끌죠. 그러나 가장 멀리 있는 것으로는 신화를 들 수 있어요. 유아가 원형을 획득하지 못하면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정신은 분열된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탐구자 : 사람이 원형을 획득하였다면 그것으로 원형과 관련된 과제는 다 수행된 것인가요? 어린이 동화책을 보면 그 안에는 온통 원형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던데, 철학자께서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철학자 : 아이들이 동화책을 손에 잡으면 글자를 몰라도 그림만 보면서도 재미있게 보는 이유는, 그 안에는 바로 <원형>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원형>은 같은 사람으로서 동일성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서 아이들이 봐도 그 내용 안에 나오는 원형과 동일시하고자 하는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동화책의 내용은 대개 그 원형이 발달해 가는 형태로 전개되기 때문에, 아이도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발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원형의 발달이 바로 아이로 하여금 동화책을 도중에 놓지 않고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죠. 뿐만 아니라 이미 읽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또 읽게 되고 또 읽고, 동일한 내용을 수도 없이 읽게 만드는 힘이 바로 <원형>의 힘입니다.


분석가 : 아주 좋은 표현입니다. 원형은 발달해 가야 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원형이라는 것은 집단무의식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집단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형은 집단적인 것이기 때문에 성숙한 삶을 산다는 것은 이 원형을 분화해서 개별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개인도 그 원형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존재의 크기 만큼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 말이 나왔으니 잠깐만 언급할께요. 원형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종교적 경험에서 많이 나타나며, 어떤 종교에서도 원형이 분화되지 않으면 매우 신비주의적인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종교적 체험을 할 때 원형체험을 많이 하게 되죠. 그런데 그 사람의 인격 안에서 원형이 분화되지 못하면 계속해서 원형체험 상태만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신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을 신비주의적인 종교적 현상으로 치환해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황홀경, 은사주의, 기복주의 등의 현상이 성행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를 원형적인 형태로 만났습니다. 그런 영적 체험상태를 칼 융은 에난치오드로미아(Enanchiodromia)의 상태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원형체험을 분화시키기 위해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가서 한 동안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사막에서 내려 온 후로는 말씀 사역자로 전환하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원형의 힘은 신비롭지만, 그 신비로움에 빠지면 하나님과 인격으로 만나기 힘들게 됩니다. 집단적인 신앙이 되고, 예속화되기 쉬워 집니다. 말씀으로 분화되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만큼 그 사람의 일상적인 인격도 매우 개별화되는 것입니다.


탐구자 : 지금 두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형의 개념이 굉장히 광범위하군요.


분석가 : 원형개념 자체가 원래 그래요. 그 자체를 이해하기 조차 힘든 것이 원형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기의 원형이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아기의 몸의 상태는 모래뭉치와 같아서 그 자체로 분열 상태에 있습니다. 이 분열은 엄마의 따뜻하고 공감적인 품으로 극복되면서, 아기는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된 몸을 가지게 됩니다. 이 통합을 위해 아기는 엄마의 공감적인 품 안에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 충분히 머무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탐구자 : 아기가 정신분열 상태에 머문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분석가 : 이미 말씀드렸듯이 아기는 태어나자 몸의 상태는 모래뭉치와 같습니다. 정신이 분열되기 전에 이미 파편화된 몸으로 태어났고 그것을 통합하지 못하면 몸이 분열된 상태에 머물게 되는데, 몸의 분열은 곧 정신의 분열인 겁니다. 정신이 분열되기 전에 이미 몸이 분열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탐구자 : 그렇다면 원형을 획득한다는 것은 분열된 몸이 하나의 몸으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하는군요. 그러면 원형을 획득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요?


분석가 : 분열증 환자가 현실의 삶을 살지 못하고 신화적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은 바로 원형을 획득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죠.


탐구자 : 그렇다면 유아가 어머니의 품에서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 충분히 머무는 동안에 원형을 획득하는 작업을 할 때에 아기는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나요? 그때는 아무런 생각을 안 한다면서요.


분석가 : 원형을 획득한다는 것을 컴퓨터로 비유하자면, 저장 디스크를 로-포맷(Low-Format)을 하는 것으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탐구자 : 저장 디스크를 포맷을 하고 나면 어떤 실행 화일이든, 자료든, 어떤 프로그램이든 원하는 대로 활용이 가능해 지듯이, 유아가 원형을 획득하고 나면 모든 삶이 가능해진다는 말씀이군요. 유아의 존재 상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매우 넓어질 것 같은데요.


원형획득의 두 가지 의미 : 유사성과 고유성


철학자 : 그렇습니다. 사람이 원형을 획득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곧 유사성과 고유성입니다. 유사성이라 함은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이 다 인간이듯이 나도 그런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서 나도 그들과 같은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의 삶은 바로 나의 삶의 가능성이 되는 겁니다. 모든 삶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 모든 삶을 살 수는 없겠죠. 나의 선택에 의해 내 삶을 살아갈 뿐이겠죠. 나는 원형을 획득한 결과 나만의 존재로 세워져 가게 됩니다. 그래서 유사성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누가 봐도 다른 사람과 동일한 인간인 ‘나’이고, 고유성에서 보면, 아무도 내 존재를 침범할 수 없는 ‘나’가 되는 겁니다.


탐구자 : 말씀을 들어보니, 원형의 획득이란 인간이 되어 갈 수 있도록 존재론적인 형식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 같군요. 그러면 원형을 획득한다고 할 때 존재론적 내용은 무엇인가요?


분석가 : 매우 적절한 질문이라 여깁니다. 왜냐하면 원형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그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철학자가 말씀하신 ‘관계 중의 관계’라는 용어와 통하는 부분인데, 이때 저 밑으로는 물질적인 영역, 그 위로는 정신적 영역, 제일 높게는 영적인 영역을 그 내용으로 확보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탐구자 : 그렇다면 유아는 그냥 몸의 크기로만 봐서는 안 되는 존재이군요. 어쩌면 평생 살아갈 삶을 미리 자기 존재 고유성 속에 담아 놓는 작업을 한 후에, 라이프니츠의 주장처럼, 주름을 하나씩 펼쳐 나가는 것이겠군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결국 원형 획득은, 유아가 어머니와의 융합을 통해 이룩해 가는 것입니다. 그때는 외부와 아무런 의사소통이 없는,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존재가 멈춘 상태와도 같은데 그 기간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존재론적 의미를 깊이 천착하는 상태인 것이죠. (철학자에게) 먼저 유아가 정신성을 갖추어 간다고 할 때, 그 정신성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철학자 : 유아는 일평생 물질에 속한 많은 존재물들과 관계할 준비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는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 내려고 세상을 상징화 시킬 수 있는 능력과 진선미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 뭔가에 열중하여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열정, 세상과 타자를 믿고 신뢰할 수 있는 타자성,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가치관, 감정과 이성을 균형 있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신체적 욕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정신력 등을 구성한다. 그것들이 바로 정신성, 즉 spirituality에 해당되는 내용들입니다. 칸트 역시 인간의 정신성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어요. 칸트는 존경(reverence)과 존중(respect)으로 구분합니다. 존경은 정언명령과 같은 법칙에 대해서는 ‘존경’을, 그리고 자기애에 기원을 둔 가언명령이 만들어 내는 준칙에 대해서는 ‘존중’을 말합니다. 법칙에 대한 존경과 자기 존중은 세상을 살아 갈만한 가치 있는 세계로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자의 인생을 살면서 서로 ‘좋은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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