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기, 심리적 트랜스젠더가 되다(3-3-2)

여성의 남성화

칼 융은 사람은 모두 <양성적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남성 안에는 여성성(아니마)이 있고, 여성 안에는 남성성(아니무스)이 있다고 하였다.

남성은 전면 인격으로 남성성을 가지고 있고, 여성성을 이면인격으로 가지고 있다.

여성은 여성성이 전면인격이고, 남성성이 이면 인격이다.

여성이 남성화된다는 것은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아니무스에 사로잡히다'가 된다.

즉 아니무스(남성성)가 여성의 전면인격으로 나온다는 말이다.

여성이 그렇게 되는 경우란 물론 중년기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중년기 이전부터 그런 인격으로 살아온 여성도 많다.

어릴 때부터 남자처럼 행동하고, 사고하는 경우의 여성이 바로 그런 여성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중년 여성의 남성화를 논하는 자리이니 그 경우는 논외로 하겠다.


외부 세계에서 성배를 찾는 남성


사람은 자기 혼자만의 욕망으로는 살아가기가 힘들다.

독신이라면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지만, 기혼자라면 혼자만의 욕망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우자를 통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은 아내의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아내의 욕망은 남편으로부터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것은 남편의 입장에서 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남편은 일단 결혼하면 아내를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일에 열중하지는 않는다.

소위 말하자면, 이제 아내는 '다 잡아 놓은 물고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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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관심은 자신의 사회적 욕망을 실현하는 데로 돌려진다.

남성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회적 페르소나(지위, 위치)를 견고하게 하는 데에 몰두한다.

그래서 남성은 자신의 성배를 외부세계에서 찾고자 한다.

외부세계에서 성배를 찾는 일에 열중하는 만큼 남성은 자신의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의 거리가 벌어진다.

그러는 동안 남성은 자신의 합리적 판단, 선택, 이성적 사고를 많이 사용하게 되면서 자신의 감정의 영역이 무뎌져가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대개 남성은 감정의 자리에 감정 대신 무드로 채운다.

남성이 성배를 찾기 위해 외부세계에 몰입하게 되면, 갈수록 부부관계의 어려움은 가중된다.


그 어려움은


첫째, 부부간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는다.

남성이 감정의 자리를 무드로 채우면, 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부부간의 갈등과 불화를 초래할 수 있다.


둘째, 부부간 상호 의존성이 감소된다. 남편이 감정의 자리를 무드로 채우면, 부인이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일에 능숙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는 부부간의 상호 의존성이 감소하게 되어, 부부간의 연결성이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셋째, 부부간 감정적 거리가 멀어진다. 남성이 감정의 자리를 무드로 채우면, 자신의 감정적인 삶과 부인의 감정적인 삶 사이에 거리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는 부부간의 감정적인 접근성이 낮아져, 부부 관계에서의 쾌적한 분위기가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넷째, 부부간 성적 문제가 생긴다. 부부간에 성관계 횟수가 현격히 줄어들면서, 그런 현상은 외도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내는 성배를 찾기 위해 외부세계를 나갈 필요가 없다


남편이 아내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했을 때 여성들은 숨어있는 자신들의 힘과 재능을 발견해 내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해 스스로 일어나는 일을 선택한다.

칼 융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아니무스가 분화되어 남성성(당당함, 독립성, 힘)을 회복하게 되면서 자신의 내면에서 성배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칼 융은 여성이 내면의 성배를 찾는 데 있어 남편과의 부부관계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개성화를 추구하는 남성에게도 마찬가지로 부부관계는 오히려 훼방거리로 지적된다.


그렇지만 칼 융의 이러한 견해를 따르게 되면 결혼의 목적과 의미는 사라진다.

나는 칼 융의 그러한 견해는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칼 융은 부인이 두 명(엠마 융과 토니 볼프)이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치열하게 갈등을 겪어냄으로써 남성성과 여성성을 분화해 가는 노력을 무산시킨 결과로 그러한 이론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결혼 생활에서 얻은 교훈과 그 교훈을 가지고 많은 부부들을 상담하면서 나타나는 효과로 볼 때, 칼융의 견해는 틀렸다고 확신한다.

여성은 성배를 찾기 위해 외부세계로 나갈 필요가 없는 것은 확실히 맞다.

그러나 여성의 과제는 어릴 때부터 몸에 장착해 온 히스테리를 벗고, 그리고 어릴 때부터 엄마로부터 차용해서 사용해 온 모성성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해 가면서 오랫동안 내면에 억압해 온 여성성이 비로소 본래 여성의 고유한 인격의 자리로 나오게 된다.

만일 여성이 성배를 찾기 위해 외부세계로 나가게 되면, 앞의 글(3-3-1)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사회적 남성화를 이루게 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남성화된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로 활동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남성성을 외부의 특정 남성에게 투사하여 정치적인 사건들을 일으키면서 정치판도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은 성배를 찾기 위해 외부 세계로 떠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성은 성배를 내면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He], 로버트 A. 존슨, 81)

여성이 내면의 성배를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편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남편은 외부세계에서 성배를 찾느라 자기 아내에게 관심의 초점을 모으지 않는다.

남편은 사회적 페르소나에 충실해야 가정의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점도 아내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아내는 남편이 처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나도 높다.

여성이 자신의 남편을 통해 자기 욕망을 실현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여성은 자신의 남성성을 남편에게 투사하여 분화시키는 대신 자신이 스스로 남성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중년 여성의 심리적 트랜스젠더화이다.


가정에서 여성의 남성화


그렇다면 여성이 가정 내에서 남성화가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나?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여성은 아니무스(남성성)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는 여성이 아니무스에 사로잡혀 남성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봤다.


첫째, 잔소리가 많아진다.

그 잔소리는 대개 남편과 자녀들에게 행해지지만, 그 잔소리로 가족 삶의 모양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남성화된 현상으로서 잔소리는, 사고 과정이 없는 사고를 하기 때문에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남성성은 곧 로고스이다.

남성성이 로고스라는 말은, 남성이 가진 권위는 곧 말씀(로고스)을 가졌다는 뚯이다.

이 로고스는 논리적 과정을 가지고 있다.

남성이 말의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논리적 사고를 해야 하며, 이를 위해 책을 읽고 공부를 해야 한다.

이 부분은 여성이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그런데 여성이 남성화되면, 사고과정을 거치지 않고 올바른 말을 마구 쏟아낸다.

그래서 집안에서 중년 여성의 잔소리는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없다.

그 잔소리는 지극히 당연하고 올바른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옳고 당연한 진리에 속한다고 해도, 여성이 쏟아내는 말이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고 나오는 것이라면,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은 마이동풍으로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보내고 싶다.

남성화된 중년 여성의 말은 사고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일사천리로 내리 달리는 말이 된다.

그래서 남자가 이런 여성과 토론의 장에서 만나거나, 싸울 일이 발생하면, 판판이 깨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토론의 장에서 남성은 자기주장을 하기 위해 논리적으로 전개해 가는 과정을 일일이 겪어내기 때문에 말의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남성화된 여성은 '뭘 말해야 되겠다' 싶다고 머릿속에 주제를 떠올리기만 하는 것으로 자동으로 말의 연속을 장전하게 되면서 공격 수위를 높이면서 말폭탄을 쏟아낼 수 있다.

논리적으로 전개해 가는 남성은 비논리성의 남성화된 여성을 감당해 내기란 어렵다.


둘째, 아니무스를 분화하지 못해 무의식에 둔 채로 살아간다.

이것은 아니무스를 분화한다는 것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합하려는 남편의 노력과 어우러져야 하는데, 남편에게서 이를 기대할 수 없으니 아니무스는 무의식에 놔둔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남편이 외부 세계에서 페르소나를 잘 발휘함으로써 경제적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만족하여 외양상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지만 이유 없는 신체증상, 과민성, 불안상태에 시달리는 이유는 바로 무의식에 방치된 아니무스가 벌이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아니마와 아니무스], 이부영, 한길사, 119)


셋째, 본능적인 여성성의 매력을 거부한다.

"이런 경우는 아니무스상을 투사할 만한 남성이 없는 경우에 잘 일어난다. 반드시 독신여성이라야 할 이유는 없으나 지적 활동과 사회활동에만 전심"(같은 책, 120)하는 경우의 여성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때 여성성은 아니무스에 지배된 의식에서 밀려나게 되어 여성성은 질식하게 된다.

이런 여성이 아니무스에 사로잡힌 결과 우울, 전반적인 불만, 이생에 대한 관심의 상실 등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나며 여성성이라는 인격의 반이 아니무스에 의해서 생명을 빼앗기고 만다.(같은 책, 120)


넷째,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집단적 사고에 매몰된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큰 인물인지, 작은 인물인지 혼돈스러운 상태로 살아간다.

대개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큰 인격이 되었다가, 혼자 개인의 규모로 돌아오면 작은 인격으로 산다.

그래서 사람은 대개 내가 큰 인격인지 작은 인격인지 모른 채,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살아간다.


중년기는 자신의 존재 규모를 만들어 가는 때이다.

특히 여성은 자기 내면에 억압된 여성성을 끄집어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개별화시켜야 한다.

여성성이란 '지금-여기의 감정'으로 현재 이 순간만큼에 필요한 존재만 가지고 살아가게 만든다.

이런 일도 남편과 갈등을 겪어내면서 자신의 내면을 직면해야 일어나는 일이다.

대개의 여성은 그런 상황을 찾아가기 힘들기 때문에 남성화되는 것이다.

남성화된다는 것은 본래적인 여성적 존재보다 훨씬 큰 인격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며, 그 남성화 자체가 바로

집단적인 것이다.

여성이 중년기에 이르면, 대개의 여성은 모성성이 극에 도달하여 소위 '아줌마 정신'을 발휘한다.

아줌마의 손은 미다스의 손과도 같아서, 닿으면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다.

아줌마로서 중년 여성은 대표적으로 아니무스에 사로잡힌 상이자, 모성성 그 자체에 매몰되어 있는 상이다.

아줌마로서 중년 여성은 그 집안의 해결사이다.

남편이 별짓을 다해도 해결사로서 기술을 발휘하는 데에 의의를 가진다.

남편이 별의별 사고를 다 치고 다녀도 어머니처럼 모성성을 발휘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

몇 년 전, 코인투기에 빠진 남편이 집 담보 대출 3억 원을 받아 몇 달 만에 1억 2천 원으로 말아먹어도 남성화된 아내는 열심히 벌어서 그 손실을 다 메워준다.

남편의 사고로 1억 원을 3번 날려 먹어도 아내는 남편의 권위를 생각하여 묵묵히 일하면서 그 손실복원에 여념이 없다.


내가 물었다.


"이 정도면 화가 나지 않는가요?"


그녀는 "저는 남편에게 화를 내 본 적이 없는데요"라는 답변을 했다.

그녀는 그만큼 모성성으로, 그리고 남성화되어 집단적 사고를 하기 때문에 화가 안 나는 것이다.

그녀는 개별적 존재, 한 여성으로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화를 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부부가 이런 관계하에 있으면, 남편을 일평생 이런저런 사고를 치고, 아내는 엄마같이 남편의 사고를수습하러 다니느라 바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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