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아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삶 자체의 기반이 완전히 무너지는 듯
행동할 경우 결혼생활이 끔찍할 정도로 악화될 수도 있다.
남성은 대개 자신과 아내가 생각하는 결혼이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She])
남편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여자는 곧 죽음을 경험하는 프시케입니다.
여성은 자신 안에 죽었던 프시케를 살려내야 합니다.
프시케가 죽으면 생기를 잃어버리고, 생기를 잃게 되면 그녀의 자궁 안에 한으로 맺힌 울혈이
만성적인 우울증을 가져오기도 하고, 자궁암을 일으키며, 그렇게 억압된 원한 감정은 화병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남편과 아내는 처음부터 어긋나 있던 결혼생활의 개념이 중년기가 되면
완전히 달라져서 서로 어긋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지나갑니다.
이 지점에 대부분의 가정의 비극이 극에 달해 있다는 반증으로 보여주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자는 여성화되고, 여자는 남성화되는’ 현상입니다.
대부분의 부부, 아마도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모든 부부들이 바로 이러한 현상에서 비극을 극대화시켜 나가게 됩니다.
바로 이때부터 결혼의 의미가 사라져 버리고, 결혼생활에 쌓인 연륜이나
서로 쌓아 온 정(情)조차도 무의미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혼을 언급하기 시작하거나, 결혼 30년이 가까워지면서 부부가
함께 사는 것 자체를 지겨워하고, 결혼 생활 자체를 끝내고 싶어 ‘졸혼’을 꿈꾸기도 합니다.
그즈음에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부부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왜 여성화되고, 여자는 왜 남성화되는가? 논리는 간단합니다.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볼 때, 여성적이지 못해서 나라도 여성성을 발휘해야 되겠다 싶어서 여성화되는 것이고,
아내는 남편을 볼 때 도무지 남성적이지 못하니 나라도 남성 역할을 해야 되겠다 싶어서 남성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부부갈등이 극단적으로 치달았고, 구조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느 부부나 다 이런 경우를 맞이한다고 해서 이것이 정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의사들은 중년이 되면 호르몬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오는 것으로 남자의 여성화와 여자의 남성화를 정당화합니다.
인격의 발달 문제에 있어서 무엇인가가 <자연스럽다>는 것은 <미성숙하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현상은 남자의 남성성의 죽음이요,
여자의 여성성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도달하면, 바로 “결혼 생활이 끔찍할 정도로 악화”된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두 사람이 결혼한 의미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이혼과 졸혼이 거론되는 것입니다.
“프시케는 자기가 살고 있는 낙원이 얼마나 웅장한지 알게 된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질 수 있다.
남편 에로스는 매일 밤 그녀와 함께 보낸다. 그러나 금기사항이 있다.
절대로 자신을 쳐다보지 않겠다는 것과 그가 어디에 가든지 절대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프시케는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질 수 있고, 낙원에 살 수 있지만 에로스가 누군지 알려해서는 안 된다.
프시케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프시케는 에로스의 아내이기를 원하고
에로스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따르려 한다.”([She])
(2020년대 현재) 50대 60대 여성들은 자신의 부모님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자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편(남자)은 하늘이고, 아내(여자)는 땅이다.”
2000년 이전만 해도 ‘여성의 이상형’은 <현모양처>였습니다.
현모양처가 되는 지름길은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이런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님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이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여자는 땅이니, 남편을 하늘같이 떠받들고 살라는 말이죠.
남자는 하늘에 있고, 아내는 땅에 있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이제 어른들의 말씀의 의미를 바꿔 봅시다. 남자는 하늘에 있어 땅에 닿아 있지 못하고,
아내는 땅에 있어 현실에 닿아 있습니다.
여자가 치마를 입는 이유는 땅의 기운을 받아야 하는 음(陰)적 존재이며,
남자들이 바지를 입는 이유는 땅과 무관하게 언제든지 하늘로 날아갈 수 있는 양(陽)적 존재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자는 땅에 닿아있어 현실성이 있지만,
남자는 현실성이 없이 늘 붕 떠 있어 조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반대로 생각합니다.
남성은 사회생활에 익숙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남성들이 생각하는 여성은 집안에서 살림을 사는 사람이니 현실을 잘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젊었을 때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년 중반에서 후반으로 되어가면서 상황은 역전됩니다.
남성은 은퇴하여 페르소나(사회적 지위)를 내려놓는 순간, 고립된 개인이 됩니다.
그러나 여성은 일체감과 관계를 중시해 온 결과 다양한 인간관계를 그물망처럼 촘촘히 형성되어 있습니다.
동네 도서관을 가보면, 중년이 되어 도서관을 찾는 사람은 거의 세상에서 거세된 남자들입니다.
여자들은 굳이 도서관까지 올 필요가 없을 정도로 관계가 단단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여성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남편이 자신의 아니마(여성성)를 투사하는 대로
살아가는 여자는 남자가 보여주는 세상만을 보게 되니까
세상 물정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남편의 사회적 역할과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아무런 의문 없이,
처음의 프시케처럼 남편에게 질문을 하지 않는 아내로 살아가는 데에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남편의 사회적 역할과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의문을 던지고,
질문을 하는 아내는 남편이 보여주는 세상을 거부하고 아내 자신의 세상을 열어가는 사람입니다.
집안에 있는 여자는 그냥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보지 못하는 집 안과 밖의 전체를 조망하면서 살아갑니다.
남성은 보너스를 모아 몫 돈을 만들어 주식에 투자하는 쪽쪽 망할 가능성이 높지만,
세상에 눈을 뜬 여자는 특별하게 배운 것도 없어도 재테크에 있어 남자보다 월등합니다.
그래서 집안의 경제권을 여자가 맡아야 집안 경제가 풍성하게 돌아갑니다.
여성이 푼돈을 모아 큰돈을 만들 줄 알게 되는 것은 남자의 세계에 의문을 던짐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프시케가 한 동안 에로스의 요구대로 남편의 얼굴을 보려 해서는 안 되고
어떤 질문이든 해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잘 지켜 냅니다.
신화가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어떤 여성이든 어떤 결혼에서든
여성이 남성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시기가 원형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남편에 대한 무조건 복종에 익숙해지면서 자신의 여성성을 포기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그 프시케는 아프로디테(시어머니)가 되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억울함을
새 프시케(며느리)에게 화풀이로 드러낼 것이며, 억압당한 여성성 또한 새 프시케에게 강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프시케는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바로 신세대 며느리 말입니다.
오늘날 신세대의 프시케들은 이런 가부장적 문화에 젖어 있는 아프로디테에게 당하고 싶지 않아 시집을 가지 않겠답니다.
‘내가 이렇게 능력 있는데 굳이 가당치도 않은 시월드에 들어가면서까지 내가 그런 굴욕을 당해야 해?’
여자 프시케들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하니 아들 장가 못 갈까 봐 걱정하는 아프로디테는 프시케에게 파격적인 양보를 합니다.
‘시댁에 안 와도 되고, 제사 안 지내도 되고, 우리 아들과 잘 살아주기만 하면 돼~’라고.
자신이 여성성이 충만한 프시케로 살지 보지도 못하고,
아프로디테의 권력조차 누리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 오늘날 노년의 여성들의 삶입니다.
이들 여성들은 젊을 때는 생명력 넘치는 프시케로도 살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 대비마마 급의 아프로디테로도 살지 못하는 억울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프로디테로 살지 못한 것을 억울해하지 말고, 젊은 프시케를 보면서,
자신 내면에 오래전에 잠들어 있어 깨워 본 적인 없는 16세의 프시케를 깨워야 할 것입니다.
요즘의 젊은 여성들은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남편을 하늘로 알고
자신을 땅으로 여겼던 순종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히스테리화되지 않은 여성들입니다. 속된 말로 하면, ‘날라리 땅콩들’입니다.
이제는 이 날라리들을 정숙한 여성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에로스의 역할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 남성들의 책무가 되었습니다.
거의 모든 남성이 아내에게 이런 것을 바랍니다.
즉 남편은 아내가 남편의 의식발달을 위한 질문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에게 무조건적으로 순종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 남편은 가부장적인 결혼 생활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남성이 주요한 결정을 하고 여성은 그저 남편에게 “예”하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성향을 가진 남성은 한 동안은 자기가 원하는 식으로 결혼생활을 꾸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중년기가 되면 부부관계의 역전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입니다.
남자가 자신의 여성성을 투사하는 대로 살아가는 아내는 현모양처로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남편의 의도를 따라 살며, 남편에게 저항하지 않고 순응적으로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과거에는 ‘금슬이 좋다’고 사람들은 말해 왔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자신의 여성성, 프시케를 희생하면서 살게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바로 자녀들 문제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자녀들은 남녀 간의 관계성을 이해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