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의 세계(어머니 영역) vs 허구의 세계(아버지 영역)
첫 상담에서 만난 어떤 내담자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느낌이 쇠~한 경우가 있다.
그는 사실적인 이야기만 하고 무의식이 전혀 묻어 있지 않은 무미건조한 말만 내게 건넨다.
상상력이 부족해 보이고, 환상의 영역이 메말라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언어만 건너온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상담자 : 혹시 드라마 좋아하십니까?
내담자 : 아뇨. 저는 드라마 같은 것 보지 않습니다.
상담자 : 영화도 안 좋아하시나요?
내담자 : 그렇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나 모두 사실이 아니잖아요?
상담자 : 아~, 드라마나 영화는 다 꾸며낸 이야기라는 거로군요.
내담자 : 그렇습니다. 저는 사실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 외는 다 거짓말이잖아요.
상담자 : 그럼, TV는 전혀 안 보시는 건가요?
내담자 : 아뇨. 전혀 안 보지는 않죠. 뉴스나 다큐멘터리 같은 프로는 봅니다. 저는 사실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답변은 건강한 신경증자에게서는 들을 수 없다.
편집증자나 조현병에 가까운 환자일수록 이런 답변을 아무렇지 않게 내어 놓는다.
이런 사람은 뉴스 경청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을 놓치는 법이 없다.
내가 20년 전에 만났던 어떤 내담자는 신문을 5가지를 구독하는데, 사실적인 면들을 형광펜으로 마크하여 형형색색으로 칠해가면서 하루종일 읽어 신문을 누더기로 만들 때까지 다 읽어낸다.
그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듯이 사실영역 탐구에 무진 애를 썼다.
아이에게 어떤 엄마가 가장 능력 있는 엄마인가?
아이와 늘 함께 있어 주는 엄마가 유능한 엄마다.
엄마가 아이의 눈앞에 현존할 때 아이는 안정감을 누린다.
아기는 곁에 엄마만 있으면 큰 불안 없이 '홀로 설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
그래서 자녀에게 엄마는 늘 만만한 존재다.
항상 눈에 보이는 만큼의 엄마니까, 아기에게 엄마는 함께 있어 주는 만큼 진실하다.
이처럼 아기가 보기에 엄마는 눈에 보이는 현존의 영역, 사실의 영역에 있다.
그런데 아버지는 엄마처럼 아이와 늘 함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버지는 아침에 어디론가 사라져서 저녁이 되면 '짠~'하고 나타나는 마술적인 존재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환은 온 가족을 열광시킨다.
아침에 나갔다가 하루종일 밖에서 지내다가 저녁에야 나타나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온 가족을 흥분시키는 대상이다.
아이가 보기에 엄마는 늘 눈앞에 있어하는 엄마의 행동이나 생활반경이 빤하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는 바깥세상 어디론가 사라지기 때문에, 아이는 '아빠가 밖에 나가서 도대체 뭐 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거지?' 하며 궁금해 한다.
엄마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사실적 존재라면, 아버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외부 세계를 대표하는 허구적 존재이다.
그래서 아이는 아버지가 하루종일 돌아다니는 바깥 세상이 궁금해진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우리 아들, 서울구경시켜 줄까?"
하면, 아들은 좋아서 아버지 곁으로 한 걸음에 달려와서 아버지 앞에 선다.
그러면 아버지는 양손으로 아들의 얼굴에 대고 그대로 높이 들어 올린 후, 그 자리에서 아들을 한 바퀴 돌린다.
아들은 아버지의 손아귀에 들어가 주물럭거림을 당하는 동안 얼굴이 아프지만, 아버지가 돌아다니는 세상을 아버지가 간접적으로 구경시켜 주는 상징적 효과를 보게 된다.
이때 아들에게 아버지는 온 세상의 기준이 되고 세상을 대표하는 기표가 된다.
아들은 이러한 놀이를 통해 세상의 기준이자 기표인 아버지가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계기로 삼는다.
건강한 권위를 가진 아버지는 이런 저런 모양ㅇ로 아들에게 세상을 상징화시켜 주는 효과를 낳는다.
이렇게 건강한 아버지를 통해 세상을 상징화한 아들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뿐 아니라, 넓고 방대한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채운다.
만일 아버지가 부재하거나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아버지로서 권위가 없다면, 아버지가 돌아다니는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없으며, 세상을 상징화시킬 수가 없다.
그런 자녀는 세상으로 나가기가 두렵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 아버지가 기준이 되어주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는 아버지를 통해 외부 세계를 상징화시키지 못하게 된다.
그런 아이는 세상에 나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고 무시무시한 세상을 끔찍하게 경험하게 된다.
아이에게 엄마는 존재 자체로 들어오지만, 아버지는 존재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으로 들어온다.
아이가 보기에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대표하며, 아버지 뒤에는 광대무변한 세계이 있어, 아버지는 늘 거대한 세계를 짊어지고 오는 존재와도 같다.
그래서 아이가 보기에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존재같다.
아버지는 밤에 잠시 나타났다가 아침이면 사라지는 도깨비 같은 존재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것처럼, 또는 일 년에 한 번 나타나는 산타 할아버지처럼, 아버지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아버지 뒤에는 세상이 있어 아이로서는 그 세상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세상인데, 아버지가 밤이 되어 들어올 때마다 세상의 새로운 소식들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집에 들어올 때는 아이는 흥분과 희열을 동반하여 아버지의 귀환을 반긴다.
아버지가 들어올 때는 세상의 온갖 귀한 소식과 궁금한 점들을 가지고 들어오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이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다.
그러면서 아들은 '나도 나중에 아버지처럼 될 거야' 하고 다짐한다.
이런 아버지는 자신이 활동하는 세계를 통해 자녀를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허구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꿈을 가지게 하고, 장래의 목표를 가지게 하며, 이상과 좋은 가치를 추구하게 만든다.
나도 아버지처럼 세상을 정복하면서 살아갈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아버지처럼 살려면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 거지?'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러한 아버지는 어디까지나 권위가 있는 아버지 일 때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켜 주는 존재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빤한 사실의 영역에 있는 엄마와는 달리, 아버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허구의 영역에 있는 존재이다.
아버지가 활동하는 허구의 세계는 자녀에게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러한 아버지의 상은 어디까지나 건강한 권위를 가진 아버지인 경우에 해당된다.
자녀에게 아버지는 엄마처럼 존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권위 있는 이름이 중요하다.
아이에게 산타 할아버지는 존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허구적 존재로서 '산타 할아버지'라는 이름이 중요하다.
산타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연장으로서 존재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산타 할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도 허구적 영역에서 아이에게 자아이상과 초자아를 만들어내는 데 충분하다.
그래서 산타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천년 넘게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다.
그러면, 권위 없는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9권(Θ)에서 뒤나미스(dynamis) 상태와 에네르게이아(energeia) 상태를 비교한다.
뒤나미스(dynamis)란 어떤 존재 및 상황의 잠재적 가능성을 의미하며, 그 존재가지고 있는 변화의 가능성이나 능력을 뜻한다.
예를 들어, 나무판자가 의자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나무판자가 가진 의자로 변화할 수 있는 능력, 즉 뒤나미스가 있어야 한다.
에네르게이아(energeia)는 실제적인 활동 또는 완성된 상태를 의미하며, 사물이 뒤나미스의 상태로 있던 능력을 실제적으로 발휘하거나 완성된 상태를 말한다.
위의 예시에서, 나무판자가 의자로 만들어진 후에는 나무판자가 가진 의자로 완성된 상태, 즉 에네르게이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뒤나미스와 에네르게이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며, 사물의 본질적인 변화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개념이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견해에 반발하는 학파가 있었다.
그 학파는 바로 '메가라학파'이다.
메가라학파는 존재의 잠재력을 부정한다.
그들은 오직 힘이나 능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에만 '~할 능력이 있고', 힘을 발휘하지 않을 때는 '~할 능력이 없다'라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집을 지을 능력이 있으면 지금 집을 짓고 있지 않아도 언제든지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메가라학파는 지금 집을 짓고 있지 않으면 집을 지을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학파이다.
메가라학파는 현실태(에네르게이아)만 인정하고 잠재태(뒤나미스)는 인정하지 않는다.
시간의 개념으로 보면, 메가라학파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시간개념, 즉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단절되어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메가라학파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밖에 생각을 못할까?
'과연 그랬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사실은 오늘날 자녀들을 키우는 부모들의 많은 사람들이 바로 메가라학파에 속한다.
부모들이 자녀에게 요구하는 것이 can(할 수 있음)의 영역에서 잠재력의 상태(과거의 상태이자, 미래의 실현가능상태)로 내버려 두지 못하고 그 능력은 당장 현실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건강한 부모라면 자녀가 잠재태 상태에 머물렀다가 스스로 욕망이 용솟음쳐 오를 때 능력을 발휘하기를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건강하지 못한 부모는, 내 아이가 당장 꽃을 피우든지 열매를 맺지 않으면 나무를 잘라 버리겠다고 공포를 조성하기도 한다.
만일 아버지가 그 가정에서 건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즉 아버지가 밤에 들어올 때마다 술에 취해서 돌아오고, 늦은 밤에 잠자는 식구들 다 깨워놓고, 폭력까지 행사하는 아버지라면, 아버지가 아침에 사라졌다 저녁에야 돌아오는 아버지의 세상은 자녀들의 의심을 받게 된다.
아버지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 무능한 아버지이거나 권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여 가족의 의심을 받는다면, 메가라학파처럼 그런 아버지는 무능한 아버지에 불과한 것이다.
가족들에게 신뢰도 주지 못하고 권위조차 없는 아버지가 아침마다 바깥 세상으로 사라져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오는지 알 수 없고, 그의 활동마저도 의심받고 있다면, 아버지가 뭔가 구리고 의심스러운 세상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만으로 아들의 영혼에 구멍을 낸다.
이렇게 영혼에 구멍이 난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 미래와 목표와 이상과 가치를 위해 꿈을 꿀 수 없다.
이런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는 자녀에게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 중요할 뿐, 장차 미래를 꿈꾸며 지금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 가겠다는 상상력은 가짜에 불과하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 너무 진실해서 자본금 100을 가지고 그 안에서만 기업을 운영하고자 한다면 그는 기업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는 부채로 짐 지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서 은행의 대출을 마다하고 자본금 안에서만 기업을 경영하고자 한다면 현실의 다양한 변화에 맞서거나 과감한 도전에 나서지 못하고 말 것이다.
자본금 100은 기업가로 하여금 그것을 담보로 은행에서 200, 300의 돈을 꿀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든다.
사업을 하는 동안, 자본금은 '사실'의 영역에 있는 것이라면, 부채는 '허구'의 영역에 있다.
사실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를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허구를 허위, 또는 거짓으로 치부하는 일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수 없는 사람은 허구를 거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일을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드라마가 영화가 사람들을 속인다고 생각할 것이다.
알고 보면, 우리는 허구의 영역에 푹 빠져서 살아가고 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친구 간의 우정, 남녀 간의 사랑, 상호 신뢰할만한 관계에서 주고받는 이야기, 목사님의 설교, 드라마, 영화, 유튜브, 신문, 음악, 미술, 연극, 정치적 집회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영역이 어느 정도의 사실과 많은 정도의 허구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의 어느 대학 기숙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친구가 화장실 간 사이에 옆방에 있던 절친이 와보니, 친구가 노트북이 켜 놓은 채, 과제를 작성하고 있는 듯했다.
이 친구는 옆방 친구를 골려 주기 위한 장난기가 발동해 친구의 노트북을 접어서 자기 방에 살짝 숨겨 놓았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친구가 자기 방에 들어와 보니, 자신의 노트북이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친구는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하였다.
옆방 친구는 자신의 장난이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사건으로 비화되는 것을 보면서, 더 이상 노트북을 숨길 수가 없어 자진해서 '내가 장난으로 가져갔었노라'라고 출동한 경찰에게 자백 했다.
이 사건은 경찰이 봐도 친구 간에 장난으로 일어난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내 노트북을 누군가가 훔쳐갔다'는 위기감에 내 몰린 적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친구의 장난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굴 옆방 친구는 절도죄로 고소당하여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허구의 세계에서 우정을 나누던 친구관계가 갑자기 사실의 세계로 건너와 절도죄로 고발하고 고발당하는 관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수갑을 찬 채 끌려가는 친구의 뒤통수에다 대고,
"네가 내 노트북을 훔쳐 간 것은 사실이잖아."
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들의 우정의 세계는 이렇게 깨지고 말았다.
둘 사이에는 더 이상 허구의 세계가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들 사이에 친구 간의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져 버렸다.
만일 어느 소설가가 소설을 쓴다면, 20%의 조각난 사실들을 이리저리 끌어 모아 그것을 바탕으로 일관성 있는 스토리를 진행시켜 갈 것이다.
이때 소설가가 스토리를 구성해 가는 힘은 사실의 힘이 아니라, 허구의 힘이다.
이 세상은 사실, 또는 진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의 세계보다 허구의 세계가 더 크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20%의 사실과 80%의 허구가 연계적으로 작동하는 공간이다.
허구의 세계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사실의 세계가 필요하지만, 거꾸로 사실의 세계 역시 사실을 유지해 가기 위해서는 허구의 세계가 필요하다.
그것은 작가의 세계뿐 아니라, 기자가 사실을 보도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기자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객관적 사실을 보도하는 것 같지만, 그 사실들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기자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야 된다.
기자가 아무리 객관적 사실을 전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실에 대해 기자의 관점을 가지는 순간, 그리고 시청자들이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의식하는 순간, 기자의 허구가 작동하게 된다.
오늘날 정치계가 앞장서서 fact를 많이 찾는다.
이들은 이분법적 사고에 오랫동안 젖어 살아왔기 때문에 fact가 아니면, 모두 거짓이라는 아주 단순한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사실에 어긋나면 모두 거짓으로 몰아서 법으로 제재를 가하겠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이 세상에는 소설가나 만화가, 드라마 작가, 영화 작가는 모두 감옥에 갈 판이 되었다.
아직은 그 정도는 아니니 다행이다.
실제로 언론계와 관련하여 그런 법이 만들어질 뻔 하다가 전 세계 언론계의 지탄을 받으면서 철회한 적이 있다.
요즘 정치인들의 수준을 보니, 상대방이 미워서 법부터 만들자는 정치인들이 많으니 앞뒤 안 재고 법을 만들다가 실제로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다.
사람이 최소한 드라마나 영화 정도라도 볼 수 있는 정서적 여유를 가지고 있다면 타자에 대한 이해가 이 정도는 안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얼토당토 않은 일을 벌이는 사람은 대개 '허위'와 '허구'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허구의 세계를 경험한다.
누구의 탄생은 필연이고 누구의 탄생은 우연이고 이런 것이 아니다.
신화나 전설 속의 영웅들은 이야기가 본격진행되기 전, 즉 역사적 인물이 되기 전, 탄생의 필연성부터 먼저 확보한다.
영웅은 존재 필연성을 확보해야 그 영웅의 모든 행적은 역사 속에 기록된다.
영웅의 존재 필연성은 일반적으로 신화화되어 다른 일반인의 존재와 특별한 차별화를 둔다.
이러한 영웅은 역사에 기록되고 역사를 바꾼다.
그런데 현대에는 이런 영웅이 필요없다.
누구나 이런 영웅될 필요도 없고, 되고자 하지도 않는다.
과거에는 나라를 세워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거나 역사를 바꾸는 사람이 영웅이지만, 오늘날의 영웅은 나라를 세우지 않으며, 역사를 바꾸지도 않는다.
현대의 영웅은 '나'라는 나라를 세우는 사람이다.
나는 내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내가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한, 하이데거가 말한, 이 세계에 우연히 던져지는 존재, 현존재가 아니다.
나(일반적인 나)의 어머니는 나의 탄생에 의미를 부여하여 나의 존재를 신화화해 준다.
현대에는 어떤 어머니든지, 자기 자녀의 탄생을 신화화하기 위해 아이를 잉태하거나 태어날 때쯤에는 태몽을 꾼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는 태몽 속에서 나를 신화화하여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이 땅에서 태어나야 하는 존재필연성을 보증해 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태몽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스로를 신화화하여 과거 나라를 세우고 이 땅을 지킨 영웅과 동일시하여 자신의 삶의 의미와 인생의 사명을 확립하여 헌신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나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고 기록하며 기억한다.
나이가 들어서 초 중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고자 하는 이유 중에는 내가 잊고 있는 나의 이야기들을 동창들을 통해 들음으로써 자기 이야기를 통합해 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이렇게 볼 때, 나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통일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망 뒤에는 나 이전의, 내가 태어나기 전의 역사와 내 가족들의 이야기, 그리고 주변 이웃 동료 친구들의 이야기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나에 관한 이러한 모든 이야기들이 합쳐져서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악에 나도 동참하고 있어 나 역시 그들의 죄와 악에 빚진 서사적 존재(이야기하는 존재)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가 된다.
내가 죽은 후에는 나의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이 전해 주는 이야기로 나에 관한 이야기를 완성해 간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일생의 시간을 통해 이야기하는 존재, 서사적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사실의 세계를 바탕으로 허구의 세계를 한없이 넓혀 나가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