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무엇) vs who(누구)
내담자가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경우, 이야기를 잘할 수 있도록 잘 도와주는 것이 상담자의 1차적 역할이다.
조현병 환자나 자폐증자( 아스퍼거 환자), 또는 심각한 강박증 환자는 이야기하는 데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어려움이란 대화 중 리비도가 흐르다가 말고 흐르다가 말고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흐르기를 멈춰버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리비도가 멈춘 상태에서 침묵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상담자는 리비도의 끊어짐을 잘 이어주는 역할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내담자의 침묵을 안전하게 잘 지켜 주는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내담자가 침묵하는 순간, 상담자의 역할은 내담자가 침묵하는 동안 발생하는 불안을 내가 받아서 그 불안을 소화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역할을 반복하고, 내담자가 상담의 공간을 안전하다고 느낄 때 리비도가 끊어지는 데서 오는 불안을 해소하게 되면서 이야기를 하는 데에 어려움을 극복해 가게 된다.
그동안 이야기를 할 때 단락(끊어짐)이 생긴 것은 내담자가 사실의 세계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상담자의 도움으로 불안이 해소되고 리비도의 흐름이 원활해지면서 이야기의 단락이 조금씩 개선된다.
이야기하는 데 어려움이 있던 내담자가 이야기를 잘할 수 있게 되면서, 사실의 세계에 머물러 있던 리비도가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가면서 활동의 영역을 넓혀 나가게 된다.
사람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이다.
누구나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장벽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그것을 방어기제라고 부른다.
방어기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끼리 모여서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
사람에게 알코올이 들어가면 의식이 수준이 내려가면서 무의식에 잠겨두었던 이야기들이 쉽게 나올 수 있다.
의식으로는 접근하기 힘든 이야기, 즉 멀쩡한 정신으로는 꺼낼 수 없는 이야기가 술이 들어가면 별 저항 없이 쉽게 나온다.
의식으로는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도 술이 들어감으로써 무의식 수준의 동지 내지는 동맹관계가 가능해진다.
멀쩡한 정신으로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는 관계가 술이 들어가면서 가까운 관계를 쉽게 열 수 있는 것은 깊이 내려가는 무의식 수준에서 연대가 일어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함께 술을 마시는 동안 더불어 취하는 정도가 깊은 만큼 마치 어린 시절부터 친해 온 죽마고우 같은 관계로까지 쉽게 내려갈 수 있다.
이런 만남에서 사람들과 수많은 이야기를 서로 앞다투어 주고받는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직장에서 하지 못하는 이야기, 집에서 가족들과 할 수 없는 이야기, 심지어 부부간에도 못할 이야기들이 많아서 이런 술친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많다.
이야기를 시작하다 보면, 집에 가야 할 시간도 잊고, 가족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사람들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에 심취해 있다.
이들은 술로 동맹을 맺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를 삶 속에서 가장 생생하게 느낀다.
이처럼 삶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그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사람은 어떤 고민이나 고통받는 일이 있어 오랜 친구를 찾거나 술친구를 찾아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놓으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면서 뭉쳤던 응어리가 풀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술친구나 주변사람에게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해서 자신의 상태에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친구에게 이야기해 봤자 리비도의 흐름이 이쪽 호주머니에서 저쪽 호주머니로 옮기는 차원을 경험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지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정도, 동병상련의 공감, 연민 정도의 느낌을 가지면서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만남의 자리에서는 각자가 자기 이야기하는 일에 바쁘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방이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수준이 거의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스토리텔링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을 통해 인격의 변화나 성숙함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그 스토리텔링은 내러티브로 전환되어야 한다.
스토리텔링은 목적지 없이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다.
거기에는 과거나 미래가 없이, 리비도가 흐르는 현재 밖에 없다.
거기에는 과거에 대한 반성능력도 미래 예지력도 없는 상태의 스토리텔링이 있을 뿐이다.
스토리는 각자 증상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담았다.
스토리텔링은 은유이기에, A=B로 밖에 살지 못한다.
스토리에서 은유이지만, 서사에서 상징으로 풀어가야 한다.
A=B라는 은유를 상징으로 풀어주면서, A를 풍성하게 의미화시킨다.
스토리텔링이 은유라는 것은, 내담자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 증상을 드러낸다.
내담자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그 이야기(A)는 이미 그의 신체 안에서, 또는 마음 안에서 증상(B)이 되었다.
내담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아무리 전달해도 자신의 증상을 반복해서 드러낼 뿐이다.
아무도 이야기가 증상이 되는 것을 눈여겨보지도 않을 뿐, 그 증상(B)을 C나 D로 의미를 확장시켜 주지 못한다.
상담자는 그렇게 이야기가 지닌 증상을 다른 모양으로 변형시켜 주고, 의미화시킬 뿐 아니라, 상징화시킴으로써 내담자를 이야기가 증상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이야기(storytelling)를 서사(narrative)로 바꿔 줌으로써 내담자는 자기 정체성을 찾아간다.
결국, 내담자의 이야기를 자기 서사로 바꿔주는 것이다.
이야기를 할 때는 과거와 미래가 없지만, 서사로 바뀌면 과거에 대해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현재를 재조명하며, 현재를 새롭게 받아들임으로써 미래를 기획하고, 이상, 가치 그리고 미래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춰 간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스토리를 가지고 서사적 해석을 해 주는 것이다.
스토리 속에 흐르는 리비도안에는 유아기부터 짊어지고 온 상처와 결핍, 왜곡이 있지만, 이것을 밝히 드러내어 줄 뿐 아니라 개선시켜 주는 것이 바로 <서사>(narrative)다.
술자리를 만들어 술친구와 주고받는 이런저런 이야기, 신세한탄, 술주정에 이르기까지, 이런 것들은 아무리 나를 표현하고자 해도, 그것은 나의 '무엇'에 관한 것이다.
간혹 인생 선배나 지혜로운 어른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여 삶의 진보가 일어난다면, 그때 그는 '나는 누구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수준을 낮추고 무의식을 활성화시킨 술자리에서는 '나는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중년을 넘기면서 내면의 공허함과 허무감으로 술친구들과 술자리가 잦아지고, 그렇게 잦아진 술자리로 귀가가 늦어 짜증 내는 아내의 불평과 불만,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울음 속에서 오히려 '나는 누구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
나이가 60세가 넘어가면서 사람들은 공허함과 허무감이 사무친다고 말한다.
그래도 내가 그동안 사회 발전에 기여도 했고, 사회적 지위와 영광을 누렸으며, 가정의 경제적 여건도 안정감 있게 다져 놨는데, '나는 왜 이렇게 공허한지 모르겠다'라고 토로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존재 공백과 결핍, 빈틈이 무엇인지를 미리 알아 젊을 때부터 수많은 책을 읽어내고 높은 소양과 지식을 보유하고 있고, 세상 어디 내어 놓아도 자부심을 가질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나름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공허한지 모르겠다'라고 토로한다.
그런 하소연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많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노력하고 애써 온 것이, '나는 무엇인가?'를 위한 것이었다.
술친구를 만나고 책을 읽고 학문을 연마하고 할지라고 거기서 발견하는 '나'는 나의 '무엇'(what)에 관한 것일 뿐이다.
나의 '무엇'을 발견하는 것은 storytelling과 관련된다면, 나의 '누구'를 발견하는 것은 narrative에 해당한다.
요즘 챗 GPT가 내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에 대해서 알려 줄 뿐, '누구'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은 없다.
요즘 챗 GPT가 하도 유능하니까, 챗 GPT와의 대화도 가능해진다.
GPT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동일성(what)에 대해서는 이야기해 줄 수 있지만, 자기성(who)에 대해서는 이야기해 줄 수 없다.
즉 storytelling은 가능하지만, narrative은 불가능하다.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
"너 자신을 알라"
사람들은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을 알기 위해 이런저런 지식을 쌓아가는 작업도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외부에서 들어와서 나의 지성을 이루는 것은 대부분 나의 '무엇'에 해당된다.
김용욱의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는다고 해서, 여자를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 연애를 잘할 것이라는 것을 착각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여자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무엇은 나의 동일성을 이룬다,
상담자를 찾은 내담자는 '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어요' '이런저런 행동 때문에 이런 진단을 받았어요''저는 이런 증상을 가지고 살아요' 등등은 모두 그의 동일성, '무엇'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저는 아직 내가 누구인 줄 모르겠어요'
라고 답변한다면, 그것은 매우 솔직한 말이다.
그래서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전하는 모든 이야기는 일종의 '반복하는 증상'이다.
상담자는 그의 증상이 더 이상 반복하지 않도록 내담자의 스토리텔링을 내러티브로 바꿔준다.
'당신 안에는 당신이 모르는 면모가 있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당신의 전부가 아니다.'
'당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라는 해석을 해 줌으로써, 상담자는 내담자의 스토리텔링을 내러티브로 바꿔준다.
성경에는 구약과 신약이 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과 신약에서의 하나님은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그의 이름이 다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I am who I am.'
이다.
하나님의 동일성이다.
I am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완벽한 진리로서 하나님은 동어반복인 것이다.
그렇지만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동일시되기 위해(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 그리고 죄 앞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 하시기 위해 친히 인간이 되심), 동어반복을 포기한다.
그래서
'I am A.'
가 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는 생명의 떡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 되심을 버리고 친히 인간이 되심으로 구약의 동일성(what)에서 신약의 자기성(selfhood)의 자기 비하를 단행한다.
내담자는 상담실에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자기 증상을 반복할 뿐이다.
증상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말이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소화해 주고 다시 되돌려 주는 과정에서 내담자는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서, 더이상 증상을 반복하지 않게 된다.
틱의 증상을 가진 환자가 상담실을 찾아왔다고 생각해 보자.
그 환자는 틱이라는 증상을 무한반복하기 때문에 그 반복을 멈추고자 상담자를 찾은 것이다.
틱이라는 증상 안에는 수많은 시간과 다양한 이야기들이 압축되어 있다.
환자는 스토리텔링을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지만, 스토리텔링만으로 증상 자체를 멈추지는 못한다.
틱 증상에 대한 상담자의 새로운 해석이 보태어지면서, 환자는 '나는 누구인가?'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하게 되면서,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이 달라진다.
만일 환자가 자신의 증상을 인공지능에게 묻고 답변을 들게 된다고 생각해 보자.
환자와 인공지능 사이에 수많은 대화가 오간다 할지라도 '무엇'에 관한 이야기만 서로 주고받을 수 있을 뿐이다.
인공지능이 많은 지식을 제공해 준다고 해도 그것은 내게 '무엇'을 보태 줄 뿐이다.
즉 GPT는 정보나 지식을 전달할 뿐, 인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는 없다.
상담이란, 내담자가 증상의 반복으로 약화된 인격을 새롭게 세우기 위해 상담자의 인격을 빌려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담자의 스토리텔링은 내러티브로 바뀌게 되면서, 내담자의 심리적 발달이 일어난다.
부모란 자녀의 스토리텔링을 내러티브로 바꿔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어른이란 증상이나 기억을 무한반복하는 연약한 사람에게 내러티브를 제공해 주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