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의) 요구-욕구=욕망

자크 라캉의 공식

아동은 생의 시작부터 어머니-유아라는 이중적 단위의 기반 안에서 형성되고 발달해 간다. 어머니가 아동에게 어떤 적응을 하고, 아동에게 민감하고 공감적이든 아니든 간에, 아동의 신선하고 유연한 적응능력과 (만족을 얻기 위한) 적응에 대한 아동의 욕구는 어머니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

[유아의 심리적 탄생] 마가렛 S. 말러 외, 한국심리치료 연구소, 18쪽.


자아심리학자인 말러에 의하면, 어머니의 아기에 대한 적용력보다 아기의 어머니에 대한 적응력이 더 크다.

그리고 아동의 욕구를 어머니가 좇아가지 못한다.

그 이유는 어머니는 자기 욕망으로 아이를 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기의 욕구와 욕망 자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는 그런 어머니를 통해 일차적 자기애를 채울 수 있다.


욕구란 무엇인가?


자연적 육체는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한다.

목마를 때 물을 마셔야 하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한다.

아기가 배고파 울 때, 어머니는 젖을 줘야 한다.


동물은 본능대로 행동한다.

어떤 동물은 태어난 지 30분 안에 일어서고 뛰지 않으면 사자나 표범 같은 맹수에게 잡아 먹힐 수밖에 없다.

이처럼 동물은 사람에 비해 양육기간이 매우 짧다.

동물들에게는 타자적 관계가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사람은 태어나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사람은 타자를 통해 생존할 수 있고 타자적 관계에서만 사람이 되어 간다.

젖을 빠는 것, 기저귀 가는 것, 안아주기와 업히기, 언어적인 것 등을 필요로 하는 아기는 타자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욕구는 신체의 생존을 위한 본능 충족과 연결되어 있다.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이 바로 욕구이다.

자연의 신체는 생존하고 번성하기 위해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도록 설계되었다.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신체가 고통을 받고 궁극적으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의존은 인간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다.

동물과 달리 갓 태어난 인간은 생존을 위해 보호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여 태어난다.

발달 초기단계에 있는 아기는 영양, 편안함, 애정이 필요하며, 이러한 요구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모유 수유 행위는 아기의 영양 요구가 충족되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자라면서 유아는 영양, 보호 및 정서적 지원을 위해 어머니에게 의존한다.

이러한 의존성은 아동과 보호자 사이에 유대감을 형성하며 이는 아동의 전반적인 정서발달에 필수적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번성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와 사회적 상호 작용은 생존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과 정서적 발달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기는 성장하면서 보호자와 상호 작용하면서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다.

그들은 특히 가족 단위 내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언어 기술, 사회적 규범 및 가치를 습득한다.

초기 어머니와의 관계의 질은 사람의 정서적 안녕과 미래의 정신 건강을 형성하는 능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잘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감적으로 따뜻한 품을 제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요구란?


요구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유아가 배고플 때는 우는 것으로 의사표현을 하면서 젖을 요구한다.

때로는 유아는 이런저런 요구를 할 때 옹알이를 한다.

어머니는 유아의 울음이나 옹아리의 내용을 누구보다 잘 알아듣는다.

그것은 어머니-유아 사이에 <투사적 동일시>라는 정신 기제를 통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기 바로 옆에 있어도 아기의 울음이나 옹아리의 의미를 잘 못 알아듣지만, 엄마는 투사적 동일시를 통해 그 의미를 알아듣는다.


어머니는 유아가 보내는 신호를 언어로 바꿔 줘야 한다.


"네가 지금 배가 고픈 거로구나"

"지금 너는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우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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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을 먹고 난 후 아기가 만족스러워하면, 엄마는


"우리 아기 젖을 예쁘게도 먹네"

"우리 아기는 젖을 먹을 때가 제일 예뻐!!"


하며 칭찬해 주는 것이 아기의 기초적 정서를 발달시키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그 기초적 정서는 일평생 타자들과 정서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정동의 핵이 된다.


아기는 욕구를 통해 어머니의 존재에 의해 충족되어 가는 것을 배우고, 언어로 욕구를 표현하면서 요구를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기의 요구와 욕구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욕구는 무한성을 전제로 한다.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되지만, 사람은 계속 목마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요구는 끝이 없다.


이런 측면에서 아기가 어머니에게 젖을 요구하는 것은 절대적 요구이다.

즉, 절대적으로 끝까지 채워줘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생후 첫 6개월은 더욱 그렇다.

어머니에게 아기가 요구하는 것이 좌절되면, 아기는 장차 신경증, 심하게는 정신증까지 발생할 수 있다.

또는 요구하는 대로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지 않으면 영원한 충동으로 남을 수도 있다.


아기가 6개월이 되기까지는 아기의 요구를 무조건 채워줘야 하지만, 그 이후는 반드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생후 6개월이 지나면서 아기가 요구하는 것과 욕구충족 사이에는 괴리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6개월이 지나면 어머니는 아기와 항상 함께 있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아지고, 아기의 비언어적 요구를 어머니가 모두 잘 해석해 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기의 요구가 어머니에게서 언어화되면서 의미의 틈이 벌어지게 된다.


라캉의 공식 ; 요구-욕구=욕망


아기의 욕구가 요구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아기의 신호가 어머니의 언어로 바뀌면서 불가피하게 틈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

아기가 요구하는 대로 어머니가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 안 된다.

특히 6개월이 지난 아기가 요구한다고 해서 아기의 욕구를 다 충족시켜 주는 어머니는 나쁜 어머니다.


심각한 경,우 6살까지 젖을 먹이는 어머니가 있다고 한다.

이런 어머니는 아기가 요구하는 대로 욕구를 다 채워줬다.

이런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충족만 경험했을 뿐, 좌절을 경험한 적이 없다.


6개월이 지난 아기에게 적절한 좌절이 필요한 이유는, 좌절이 발생하는 만큼 아기는 정신 작용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100을 요구하는 아이에게 100의 욕구를 채워줬을 때, 그 아이가 가질 수 있는 욕망은 0이다.

100을 요구하는 아이에게 어머니가 70의 욕구를 채워줬다면, 그 아이는 30의 욕망을 가지게 된다.

30의 욕망을 가진 아이는 그만큼 정신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욕망이 제로인 아이는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이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는, 소위 '너무 좋은 어머니'는 '나쁜 어머니'이다.

이런 어머니는 자기 아이보다 먼저 죽을 수도 없다.

어머니만 있으면 만사 OK인 사람으로 만들었으니까, 어머니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무능력자이다.


그렇지만 요구와 욕구 사이에 틈이 발생한 만큼 타자가 뭔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둘 사이 틈은 욕망으로 상징화된다.


아이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는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아이에게 올인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남편을 남근으로 삼아야 하는데, 남편이 남근 역할을 해 주지 않으니까, 자녀를 사로잡아 남근으로 삼는 것이다.

어머니의 남근이 되는 자녀가 꼭 아들일 필요는 없다.

요즘은 아들 대신 딸을 어머니의 남근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어딜 봐도 아들보다 딸이 유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녀는 자신만의 고유한 욕망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오로지 어머니의 욕망 충족을 위해 헌신한다.

그러한 헌신도 40대 초반까지만 가능한 헌신이다.

40세까지는 부모의 영향력아래 있지만, 그 이상이 되면 이제 그동안 숨겨져 있던 원래의 <존재>가 나오기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한 번도 자신만의 존재로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은 그때부터 방황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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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 이제 방황의 시작일 뿐이다.

그 방황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보다 더 길게 이어질 것이다.

지금 20대면 120세를 살고,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150세를 산다고 한다.

40년간은 어머니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남근으로, 그 이후 110년을 방황하는 존재의 남근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것이 부부관계에서 실패한 어머니의 욕망을 위해 살아가는 자녀의 인생 청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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