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의미
아기가 처음부터 엄청난 리비도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 리비도 안에는 사랑과 공격성이 마구 뒤 섞여 있다.
그래서 유아는 어머니를 공격하는 것인지 사랑을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아기는 어머니의 젖을 먹기 위해 공격적으로 젖가슴을 마구 빨아댄다.
그런데 아기는 어머니의 젖가슴이 자신을 공격한다고 생각한다.
아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 시기에는 어머니와 아기가 존재론적으로 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없다.
아기를 젖을 물려 본 어머니라면, 젖가슴을 향한 아기의 공격성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안다.
아기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마구 공격하면서 혼재된 리비도 중에 공격성을 조금씩 영역화한다.
아기는 어머니의 젖가슴으로부터 젖을 빨아내면서 좋음을 내사하여 자신 안에 있는 혼재된 리비도 중에 사랑의 요소를 뽑아낸다.
유아는 어머니로부터 받는 사랑과 공감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면에 혼재된 리비도는 사랑의 영역이 조금씩 커지면서 공격성이 조금씩 줄어든다.
아이가 공격성을 어머니의 젖가슴에 마구 발휘함으로써 감각적 충동과 원시적 운동성은 대상(어머니의 젖가슴)을 향한 파괴성을 촉진한다.(위니캇)
아기는 타고난 공격성을 가지고 어머니의 젖가슴을 사정없이 공격한다.
유아는 어머니를 죽이는 환상을 투사하면서 공격한다.
유아는 혼신을 힘을 다해 공격을 하는데,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빙그레 웃는다.
어머니가 아기 앞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기의 공격성의 결과로 어머니의 죽음을 맛본다.
그런데 잠시 후 어머니가 다시 나타날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면서 나타난다.
아기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아무리 파괴해도 어머니는 다시 살아남는다.
아기는
"안녕, 나는 너를 파괴했어"
"그런데 너는 맨날 살아남네."
"네가 내 파괴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너는 내게 가치 있는 거야"
"솔직히 나는 너를 사랑하는 동안 나는 내내 너를 파괴하고 있었어..."
공격성을 통해 자신의 악함, 나쁜 것을 외부에 있는 어머니에게 투사하고, 대상으로 살아남는 어머니를 통해 대상의 선함을 내사하게 됨으로써, 점차 존재의 질이 달라지는 것이다.
공격성은 증오에서 유발되며, 또한 내 안에 있는 동물적인 것이다.
이 공격성을 어머니의 젖가슴에 투사하고 어머니가 사랑으로 되돌려 주면, 궁극적으로 아이는 공격성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으로 바꿔낸다.
부모의 역할은 바로 자녀의 공격성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전환시켜 주는 것이다.
이것은 1~2년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최소한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아기는 끊임없이 어머니의 젖가슴을 공격하고 죽이는데, 어머니는 늘 살아남는다.
위니캇에 의하면, 이렇게 어머니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아기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아기는 어머니를 새롭게 경험한다.
어머니 내면의 질적 내용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유아의 파괴충동이다.
아기는 어머니라는 대상을 공격하고 죽이지만, 대상이 살아남음으로써 그 대상 세계 안에서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아기가 어머니를 공격했는데, 실제 어머니가 유아의 공격환상을 견디지 못하고 진짜 파괴된다면, 그 대상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신뢰를 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어머니가 아기의 공격성을 견디고 살아남는다면, 어머니라는 대상뿐 아니라, 어머니가 속한 세계에 대한 신뢰가 유아에게 발생한다.
-유아가 그의 눈을 감을 때 그는 그의 시각 속에 있는 세상의 작은 부분을 파괴하는 것이고, 눈을 뜨면 사물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게 되는데, 이는 외적 실재의 항구적 성질에 공헌하는 것이다.
유아가 어머니를 공격했는데 어머니가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거나 어머니가 죽으면 아기는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릴 것인가?
어머니라는 대상을 매일 죽였는데, 매일 다시 살아남았다면 아기가 느끼는 궁극적인 감정은 "감사"다.
얼마나 고맙겠는가?
그 결과 아기는 대상에 대한 질적 요소를 느끼게 되고, 감정의 색조를 강하하게 되면, 대상-항상성을 이루게 된다.
이 아이가 세상 사는 동안 죄책감을 넘어서고, 탐욕과 시기심을 극복하는 정서는 바로 이 시기에 느끼는 <감사>에서 비롯된다.